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93화 (93/862)

18화. 외뿔부족 (3)

목소리에는 약간 탁음이 섞여 있었다.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노파가 꺼내는 듯한 목소리. 약간의 호기심과 장난기도 섞여 있었다.

『그렇군. 네가 에도라, 그 아이가 말하던…… 호호. 참 재미난 아이를 데려왔어. 과연. 큰소리칠 만하다는 건가.』

목소리에는 살짝 웃음기도 묻어 났다.

『아무튼 손님이라면 곧 만날 수 있겠지. 이따가 보자꾸나. 재미난 아이야.』

목소리는 그 말만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

연우는 대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굴까 하다가 곧 야누가 다급하게 달려오자 생각을 거뒀다.

“으아아! 이게 뭡니까! 대체 어딜 가셨던 거였어요?”

야누는 연우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지 얼굴에 식겁한 기색이 역력했다.

“운이 좋아서 빠져나왔길 망정이지, 거기서 잘못 휘말렸으면 진법에서 영영 갇힐……!”

“길이 보여서 나왔다만.”

“예?”

야누는 순간 연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했다.

“좀 더 쉬운 길이 보여서 나온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

야누는 입을 더 크게 벌리면서 중얼거렸다.

“뭔…… 괴물 같은…… 말도 안 되는…….”

* * *

호호안무진은 오랫동안 외뿔부족의 마을을 외부로부터 격리시켜 줬던 진법이다.

진법의 대가들이 부린다는 기문둔갑에 비할 바는 아니더라도, 꽤 상위에 놓인 진법이었다.

그런데 그걸, 이제 처음 봤으면서 그냥 뚫었다고?

야누는 ‘괴물’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3미터나 되는 알을 봤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도저히 연우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고, 마을 한가운데에 놓인 길을 따라 가로지르고 있었다.

‘외뿔부족이라고 해서 뭔가 다른 면이 있을까 했는데. 평범한 시골 마을과 크게 다를 게 없어.’

연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한 마을 모습에 조금 놀랐다.

왠지 ‘최강의 일족’이라는 단어만큼 마을에서도, 일족 구성원 전부가 무술 수련에 집중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마을은 일반 시골 풍경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길쭉하게 난 길을 따라 좌우로 넓은 논밭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은 햇볕을 막아 주는 모자를 쓴 채로 농사일에 집중했다.

언덕에는 나무를 쌓아 만든 오두막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마당에는 꼬마 아이들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집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 분위기 그대로였다.

조금 독특한 모습이 있다면 사람들이 전부 뿔을 달고 있고, 옷차림이 특이하다는 점이었다.

판트와 에도라도 자주 입고 다니던 품이 넉넉한 옷.

움직이는 데 거슬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통이 컸지만, 그렇지는 않은지 움직임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이런 곳에서는 반대인가.’

그러다 연우는 마을 사람들이 일을 하다 말고 멀뚱하게 자신을 쳐다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숭이 무리에 가면 인간이 동물원 동물 신세가 된다더니.

탑에서와 달리, 갑옷으로 무장하고 까만 가면까지 쓴 연우의 모습이 여기서는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어라? 저거 인간 아냐?”

“플레이어 같은데. 오늘 누구 온다는 말 있었나? 들은 사람 있어?”

“아니. 못 들었는데.”

“근데 웬 가면…… 아! 야누가 공주님 심부름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 그럼?”

“오오. 그럼 저 사람이, 에도라 님의?”

“그렇다니까.”

마을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날 알고 있나?’

연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눈빛이 꽤 익숙했다. 야누에게서도 받아 본 눈빛. 호감 섞인 눈빛이었다.

‘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들은 거지?’

연우는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저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방문객에 대한 소문이 더욱 퍼졌는지, 곳곳에서 더 많은 외뿔부족의 사람들이 모여 연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오오.”

“과연……!”

“강하려나?”

“강하겠지. 강하다고 했잖아?”

“가면을 쓰고 있어도 눈빛이 강렬하군. 신체적 밸런스도 적당하게 잡혀 있고. 기운도 깔끔하게 잘 갈무리하고 있어. 물건인데?”

연우는 정말 동물원 원숭이가 된 느낌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개중에는 품평을 해 대는 이도 있었고, 젊은 사람들 중에는 노골적으로 연우에게 호승심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 정말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건 따로 있었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올라 연우의 뒤를 따라오는 3미터 크기의 알.

“근데…… 저건 대체 뭐지?”

“동물 알 같은데. 환수의 알…… 이지 않을까?”

“말도 안 돼. 마수 중에도 저런 게 있다는 말은 못 들어 봤다고.”

마을 사람들은 알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을 하느라 바빴다.

환수의 알이니, 아니면 그냥 아티팩트일 것이니 등등, 저게 대체 뭐냐는 의문이 대부분이었다.

탑의 오랜 거주민인 그들이 보기에도 연우의 알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가사의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급한 일이 닥친 마을 맞나? 하나같이 여유로워 보이는데.’

의문을 가지는 동안, 연우는 어느새 야누를 따라 마을의 중심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른 집들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규모에서 차이가 있는 큰 집. 거기서 익숙한 얼굴이 뛰어나온 것이다.

“오라버니!”

이미 야누를 통해 소식을 전해 받은 에도라는 연우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왔다.

사람들의 계속된 시선에 언짢은 표정을 짓던 연우도 그제야 표정이 풀어졌다.

“그동안 잘 지냈나?”

“예. 그럼요.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죄송했어요. 저희는 금방 돌아갈 수 있을 줄 알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거였는데.”

“사정이 있었다면서.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연우는 에도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평온한 태도에 에도라는 살짝 눈이 커졌지만, 곧 배시시 해맑게 웃었다.

“이야. 정말 신기하네. 우리 얼음 공주님을 웃게 만드는 인간이라니.”

“이쯤 되면 판트 님의 말씀이 맞는 거 같지?”

“젊은 애들 중에 깨나 질질 짤 놈들이 많겠는데? 으핫!”

에도라는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기 바쁜 마을 사람들을 살짝 도끼눈으로 째려봤다.

마을 사람들은 슬쩍 시선을 돌리면서도 실실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연우는 그 모습에서 외뿔부족의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왕족이니 뭐니로 구분되어 있어도, 그들 사이에는 이렇다 할 계급적 차이를 느끼지 않는 분위기.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태도 속에서도 왕족은 왕족 나름대로의, 그리고 전사는 전사 나름대로의 예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

자율 속의 규율.

오만한 성격만큼이나 자신들을 통제하는 데에도 철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같이 기운을 갈무리하는 데 아주 능숙해.’

평범한 시골 사람처럼 차림을 하고 있어도, 하나하나가 뛰어난 힘을 가진 전사들이었다.

특히 마력 제어에 능숙하다는 건, 그만큼 마력을 효율적으로 다룬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 그런 점을 넘어, 마력을 아주 순조롭게 다룰 수 있는 어떤 ‘방식’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진법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연우는 마력회로를 진법처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착안했던 생각이, 실제로 통용되고 있자 눈을 반짝였다.

“호오. 이 사람이 이번에 찾아왔다는 손님이로군. 우리 따님과 아드님이 그렇게 칭찬했던 인간이 자넨가?”

연우와 에도라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인파를 가로지르면서 한 중년인이 대거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 옆에는 판트를 비롯해 여러 촌로들이며, 허리춤에 칼을 차고 절도 있게 걷는 호위무사들까지 가득했다.

하지만.

‘크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만이 연우의 눈에 들어왔다.

갓 밭일을 하다가 온 건지, 모래와 먼지를 폭 뒤집어쓴 상태에 얼굴이 햇볕에 살짝 그을린 중년인.

한쪽 어깨에는 모래가 잔뜩 묻은 쟁기를 짊어지고 있었다.

시골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지만.

‘……강해.’

연우는 중년인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크게 어깨가 짓눌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처음 바할과 마주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달라.’

바할이 모든 것을 압도하면서 우뚝 서 있는 느낌이라면.

눈앞에 있는 중년인은 오로지 이 세상에 ‘나만 있다’는 고고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분명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할이 산이라면, 중년인은 하늘이었다.

산은 오를 엄두라도 낼 수 있지, 하늘은 전혀 그럴 생각조차 못하게 만들지 않던가.

게다가 익살맞게 호선을 그리는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뭔가가 담겨 있었다.

포악한 짐승 같은 뭔가가.

지금은 얌전하게 있지만,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마력회로도 그런 짐승의 시선을 느꼈던지, 저절로 운용되면서 육체를 보호하고자 움직였다.

이 사람이, 바로.

‘무왕.’

외뿔부족의 족장이자 왕으로서, 부족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고 알려진 자.

그리고.

8대 클랜 없이도 탑의 최정점에 놓여 있다는 ‘아홉 왕’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존재였다.

무왕은 웃음 속에 짐승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지만, 호시탐탐 날뛸 기회만을 노리는 짐승.

그와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어서 별다른 친분도 악연도 쌓지 못했지만, 멀리서만 봐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대로 강하다고 알려진 외뿔부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고 평가를 받을 정도라면.

그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그때.

무왕이 갑자기 연우를 보면서 씩 입꼬리를 크게 말아 올렸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여태 엿보고 있던 눈동자 속의 ‘짐승’과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등골이 저절로 오싹해질 정도였다.

“이야! 그걸 봤어?”

“……!”

“이거, 진짜 물건인데? 하긴 그럴 법도 한가? 진법도 그냥 통과했던 아이이니.”

무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때, 옆에 있던 판트가 퉁명스럽게 아버지 무왕에게 물었다.

“형님이 뭘 봤다는 겁니까?”

“있다. 그런 거. 너 같은 햇병아리는 아직 못 보는 거.”

“으이씨! 또 그렇게 잘난 척하시깁니까?”

판트는 인상을 팍 구겼다.

자신의 아버지는 참 존경스러운 인물이었지만, 이렇게 자기 잘난 척이 심할 때는 너무 재수가 없었다.

무왕은 그런 아들의 태도에 콧방귀를 뀌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어쩌겠냐. 네가 이 아버지를 따라오려면 백 년도 더 멀었는데.”

“내가 어서 크든가 해야지, 진짜! 아무튼 조금만 기다리십쇼. 아버지 자리는 내가 확 찬탈해 버릴라니까. 그때 가서 뒷방 늙은이 되기 싫다고 질질 짜지나 마십쇼.”

“응. 하고 나서나 이야기해.”

“으으. 진짜 저 빌어먹을 영감쟁이가……!”

판트가 주먹을 꽉 쥐면서 부글부글 끓는 사이.

무왕은 연우를 다시 바라봤다.

“아무튼 그래서 말이다만.”

연우는 잔뜩 긴장했다.

무왕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말투는 여전히 익살스러웠지만,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어느새 무겁게 가라앉고 그의 색(色)으로 세상이 물들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판트와 장로, 호위무사들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잔뜩 긴장했다.

패왕의 기세가, 위엄이, 주변을 한껏 휘어잡았다.

연우는 무왕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잔뜩 긴장했다.

‘짐승’을 본 게 어떤 잘못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진법을 통과한 것에 무슨 문제라도?

그렇게 그의 입술에 잔뜩 집중하는데.

무왕이 짓궂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던졌다.

“내 딸은 언제 데려갈 생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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