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94화 (94/862)

19화. 외뿔부족 (4)

“……?”

연우는 순간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살을 가늘게 좁혔다.

다짜고짜 딸을 데려가라니.

결혼이라도 하라는 소리일까?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나오는 거지?

연우는 무왕이나 되는 사람이 실없는 소리를 할 거라고 생각지는 못해서,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아주 잠깐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사이.

“아버지!”

갑자기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된 에도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던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시뻘겋 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무왕은 특유의 뻔뻔한 넉살로 웃으면서 말했다.

“딸아. 그새 며칠 밖에 있었다고 우리 관습을 잊었냐? 좋은 놈팡이 있으면 재빨리 낚아채. 저만하면 됐구만. 이 아비도 너만 할 때 너희 엄마랑 만나서 결혼해 너네 낳았……!”

“결혼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신경 끄세요!”

“흐흐. 부끄러워하긴.”

“……진짜 한 번만 더 놀리시면, 아버지고 뭐고 간에 칼춤 춰 버릴 거예요?”

에도라는 신마도에 손을 가져가면서 으르렁거렸다.

정말 더 자극하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칼을 뽑아 버리겠다는 살의가 물씬 풍겼다.

무왕은 그런 딸의 반응이 너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방실방실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에도라를 더 화나게 만들었지만.

무왕은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크게 외쳤다.

“아무튼 이렇게 외부에서 손님이 오신 것도 오랜만인데. 계속 세워 둘 수는 없지. 안으로 들어와. 차나 마시면서 마저 이야기 나누자고.”

* * *

무왕이 연우를 데리고 뒤에 있는 큰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에도라는 연우의 옆에 붙으면서 이곳을 가리켜 ‘궁궐’이라고 했다. 정확한 이름은 무궐(武威).

연우는 혹시나 했던 생각이 들어맞자 내심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궐을 지나면서 속으로 살짝 놀라고 말았다.

무궐은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내부 구조도 아주 단순하고 실용적으로 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감자와 고구마 따위를 일구는 텃밭이 전부였고, 내부 인테리어도 소박한 것들로 가득했다.

누가 이걸 두고 최강의 일족을 다스리는 왕이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할까.

응접실에서 내놓은 음식도 따뜻한 차와 곡물로 만든 쿠키가 전부였다.

연우는 잠깐 쿠키를 입에 넣어 맛을 봤다.

바삭바삭해서 씹는 맛이 일품이고, 많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우러났다.

엄청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한 번 먹고 나면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그러고 보니 판트와 에도라는 보통 육식을 피하지 않았었나?’

어쩌면 이런 곡물이 이들에게는 주요 식사거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무왕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하네. 옷을 갈아입는다고 조금 늦었어. 오랜만에 입었더니 순서가 생각이 나질 않더라고.”

무왕은 원래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황금색과 검은색 무늬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화려함과 근엄함을 한껏 갖춘 옷.

보통 의례를 하거나 외부 인사를 맞이할 때에 입는 옷으로 보였다.

“잘 어울리십니다.”

“흐흐. 나도 알아. 내가 옷발이 좀 많이 받는 편이거든. 젊은 시절에는 처자들도 꽤나 울렸지.”

또 시작된 자기 잘난 척.

옆에 있던 에도라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노인들이나 호위무사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연우는 문득 일기장에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무왕은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심하면 자신의 잘난 면을 어필하는, 자기애(自己愛)가 참 투철한 사람이다 싶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이야기를 나눠 볼까.”

연우는 무왕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먼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현재 11층을 오르고…….”

“아, 자기소개를 하는 거라면 그만둬. 이미 자네에 대해서는 우리 아드님과 따님한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거든. 아니, 그런 것을 제외하더라도 저층 구간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네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걸?”

무왕은 팔짱을 끼면서 말을 마저 이었다.

“튜토리얼과 초심자 구간의 기록을 싹쓸이하는 최고의 루키. 혈검과 폭시 테일의 파트너. 모든 보상은 싹쓸이를 해야만 성이 풀린다는 괴물. 독식자.”

모두 현재 연우를 가리키는 호칭들이었다.

“그리고.”

무왕은 잠시 말을 끊으면서 말 끝에 힘을 팍 주었다.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면서 언뜻 드러낸 송곳니가 왠지 모르게 연우를 긴장케 했다.

『아랑단을 홀로 무찌른 신예. 맞지?』

“……!”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아랑단의 사건은 현재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의 단초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사건.

아직 외부로 자신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그로서는 반드시 묻어 둬야만 하는 사건이었다.

분명히 칸과 도일 외에는 목격자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어떻게 무왕이 알고 있는지를 따져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쉬쉭-

다른 호위무사들이 반사적으로 일제히 칼 손잡이로 손을 가져가고, 노인들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살벌한 분위기가 궐내를 감돌았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무왕이 웃으며 짧게 말했다.

“앉아.”

“…….”

단순한 한 마디인데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가…… 없다.’

연우는 마치 보이지 않은 사슬에 감긴 것처럼 몸이 바싹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왕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연우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괴물이다.’

연우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짐승’은 무왕의 눈가에 잠복해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저 웃는 낯을 하고 있어 전혀 모르고 있었을 뿐.

이미 포악하게 웃으면서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연우는 왜 동생이 그를 그냥 짐승이라고 표현했는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먹이를 코앞에 둔 맹수가 어떻게 장난을 칠까, 하고 고민을 한다면 저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압박은 금세 강해져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하지만 가면 아래로 비치는 연우의 시선은 예리하게 빛났다. 여차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굴복한 건 아니란 뜻이었다.

털썩-

무왕이 재미나다는 듯이 더 짙은 웃음을 흘렸다.

『걱정 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탑 내에서도 세 명을 넘지 않을 테니까.』

분명히 입을 닫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심어를 통해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이 사실을 외부에는 알릴 생각이 없다는 뜻.

연우는 입을 꾹 다물면서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무왕을 바라봤다.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섣불리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무왕의 속내가 대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세 명이나 알고 있다는 말은, 남은 두 명이 누굴까 하는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무왕은 별다른 언급도 없이 웃으면서 연우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연우는 그 모습에서 더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때.

“또, 또 저 고약한 심보 나오셨구만. 우리 영감님. 또 무슨 이상한 말씀으로 사람 도발한 거 아뇨?”

판트가 안 봐도 훤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투덜거렸다.

호위무사들도 그제야 칼 손잡이에서 손을 뗐고, 노인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나이를 처먹고도 저딴 심통이니’하는 말도 나왔다.

“아버, 지?”

에도라는 인상을 구기면서 무왕을 째려봤다.

무왕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흘리자, 에도라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버지를 대신해 연우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저희 아버지가 짓궂은…… 아니, 좀 괴팍한 면이 있으셔서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자극부터 하고 보시는 편이라. 이런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이해 부탁드릴게요.”

무왕이 투덜거렸다.

“에이. 그래도 괴팍하다는 말은 좀 너무한 것 아니냐, 딸아?”

“아니라고 못하실 텐데요.”

“자기 낭군 감싼다고, 이제 아버지는 아예 눈 밖에 난 꼴이로구만. 자식 헛 키웠어.”

“제발 그 입 좀 닫아 주실래요?”

무왕은 에도라와 가볍게 티격태격하다가, 연우를 보면서 말했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자세한 건 나중에 이따 사람들 물러나거든 물어봐. 일일이 제대로 응 답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연우는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확실히 여기서는 나눌 대화가 아니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자네가 우리 마을에 찾아온 이유는 일단 야누에게 들어서 알고 있네만. 혹시 저기 무식하게 큰 게 그 알인가?”

“그렇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위로 저었다.

그러자 뒤에 바위처럼 우뚝 서 있던 알이 둥실 떠올라 탁상에 떠억 하니 놓였다.

천장이 높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수 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야누에게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뭔 헛소리인가 싶었는데, 놀라워.”

“이런 게 가능한가……?”

“11층의 시련을 수없이 봐 왔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이렇게 큰 환수의 알이라니. 대체 안에 뭐가 든 거야?”

노인들은 알에 달라붙어 이모저모를 살피면서 자기들끼리 토의에 들어갔다.

어떤 노인은 톡톡 두들겨서 강도를 체크해 보기도 하고, 돋보기를 가져와 색과 무늬를 비교하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잡다하게 가져온 옛 고서를 뒤지는 노인도 있었다.

“우리 마을 장로들이야. 노인네들이 평소에 밥만 축내는 식충이들이긴 해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 많아서 아마 도움이 될 거다.”

무왕의 말에 장로들은 그를 한껏 째려봤지만, 곧 다시 알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만큼 새로운 알은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연우는 가만히 장로들을 지켜봤다.

외뿔부족은 젊었을 때에는 힘에 미치고, 나이가 들면 지식에 미친 다는 말이 있다더니.

탐구심을 잔뜩 드러내면서도 그들은 전부 노인답지 않은 다부진 체격과 기품을 자랑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연우로서는 도저히 얼마나 강한지 짐작도 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연우는 외뿔부족이 가진 ‘저력’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방법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차마 노인들을 방해하지는 못하고, 무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전히 무왕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야 모를 일이지. 힘쓰는 게 내 전문 분야지, 저런 건 골치만 아파서. 그래도 우리 영감님들 한 번 믿어 봐. 식충이라도 쓸 만하다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장로들을 보는 무왕의 시선에는 짙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노인들은 저들끼리 한참 토의를 나누다가, 어떤 공통된 결론을 내렸는지 떨어져서 연우를 돌아봤다.

“문헌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다는군. 이것도 그와 같은 케이스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다네.”

“정말입니까?”

연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닉스도 알아내지 못했던 사실을 이렇게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걸까?

에도라의 혜안을 믿고 왔던 그로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드디어 11 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눈이 반짝였다.

“정말? 그게 뭔데, 영감?”

무왕도 호기심을 잔뜩 드러냈다.

대표로 말한 노인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못 돼먹은 말투를 쓰는 철없는 자신들의 왕을 노려보다가, 연우를 보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만 약간 문제가 있다네.”

“문제라시면, 혹 해결책이 없다는 말씀이신지요?”

“아니. 해결책은 있다네. 당시에는 4미터 남짓하게 알이 커졌지만, 모종의 수를 투입시켜 바로 부화를 해냈다는군. 거기서 태어난 게, 지금의 허무룡이라 하니 놀랍지 않은가?”

“……!”

“오.”

“허얼?”

말을 듣고 있던 연우와 무왕, 판트, 심지어 다른 장로들이며 호위무사들까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허무룡은 11층에서 피닉스와 함께 4대 신수로 불린다.

그리고 허무룡은 그런 신수 중에서도 가장 강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존재가 태어난 사례라면.

지금 연우의 알에서도 신수나, 그에 못지않은 최상위종 환수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뜻.

“우와. 되는 놈만 계속 되는 더러운 세상. 난 어디 진짜 목매달아야 하나?”

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체 비법이 뭐냐는 얼굴로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연우는 그런 판트를 무시하고, 환수의 알을 돌아봤다.

우웅, 우웅-

심령의 연결고리를 통해 녀석이 우쭐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러고도 자신을 괴롭힐 거냐며 따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에도라가 손을 들더니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장로님, 제가 알기로는 분명히 4대 신수는 탑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맞네. 내가 말하고 싶었던 문제점이 바로 그거였어. 본래 신수는 외부에서 흘러온 존재. 허무룡도 마찬가지이니, 이 케이스는 탑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점일세.”

‘탑이 열리기 전에 있었던 케이스? 그런데 그게 내 알에서 다시 되풀이되었다는 건가?’

연우는 환수의 알을 가만히 바라봤다.

대체 이 안에 든 게 무엇이기에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피닉스는 알의 주인인 연우에게 ‘꿈’이 없기 때문에 환수가 태어날 계기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꿈이 없다는 점이 ‘조건’이 되어 환수를 기형적으로 변화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때, 무왕이 말을 정리했다.

“아무튼 그런 알에서 허무룡이 태어났으니, 이 알에서도 허무룡과 비슷하거나 그에 못지않은 게 태어날 거란 이 말이지, 영감?”

“그렇다네.”

“그럼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네. 센 놈이 나타난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노인은 사안을 단순화시킨 무왕을 노려봤지만, 무왕은 룰루랄라 콧노래만 흥얼거렸다.

노인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하튼 이렇게 생각하면 편할 걸세. 현재 이 알은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기형 상태가 되어 비정상적으로 커져 버렸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달의 씨앗’을 필요로 한다네.”

‘달의 씨앗?’

연우는 처음 듣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음! 확실히 달의 씨앗이라면.”

“제법 일리가 있긴 하지.”

듣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도라도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연우의 의문은 커졌다.

일기장을 통해 숱하게 많은 아티팩트와 여러 영약 등을 줄줄이 꿰고 있었지만, 달의 씨앗이라는 건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니까.

에도라도 그런 연우의 눈빛을 읽었는지 차분하게 설명했다.

“달의 씨앗은 저희 일족에게만 대대로 전승되는 희귀 약초 중에 하나예요. 저희 외에 타 종족에게는 큰 쓸모가 없어서 알려지지 않은 편이고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족의 비밀이었다면 동생이 몰랐어도 이해가 가니까.

그리고 해결책이 외뿔부족에 있다는 사실에 주먹을 꽉 쥐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용마안으로 장로를 몇 번씩 살펴봤지만,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진실이라는 뜻.

드디어 한 달도 넘는 사투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달의 씨앗을 구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할 수 있겠습니까?”

연우는 무왕을 바라봤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왕의 미소가 짙어졌다.

“넌 달의 씨앗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유하고 있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딸에게 들었다시피, 그건 우리 일족 내에서도 아주 귀하게 다뤄지는 약초야. 15년을 꼬박 재배해야 한 뿌리를 겨우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가면 아래, 연우의 눈매가 깊어졌다.

무왕은 거래를 제시하고 있었다.

물건을 원한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뜻.

옆에서 에도라가 뭐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옆에 있던 장로가 손을 뻗어 그녀를 막았다.

지금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

아무리 경망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일족의 왕으로서 행동할 때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일족의 원칙이었다.

에도라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결국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판트는 말없이 고요한 눈길로 연우와 무왕을 번갈아 봤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연우는 숱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가진 게 크게 없습니다. 들어가 있는 세력도 없고, 지원해 주는 곳도 없습니다. 대가를 치르라 하신다면 차후에…….”

“우리는 외상은 안 받아.”

“…….”

단호한 거절.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걸 생각해야만 했다.

머릿속으로 자신이 가진 여러 아티팩트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하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

하지만 그중에서 무왕의 눈에 찰 만한 건, 비그리드와 아이기스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함부로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래도 건네야 한다면 비그리드가 되겠지만. 비그리드에는 칸, 도일과 쌓았던 추억이 어려 있었다.

그런 걸 내어 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무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 참. 굳이 대가를 물건으로는 제시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너한테는 꽤나 좋은 몸뚱이가 있는데, 그걸 잠시 대가로 빌려주는 건 어때?”

연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육체적인 노동이라면 얼마든지 시간을 들일 생각이 있었다.

다만, 의문이 드는 것은.

‘외뿔부족이 내 손을 필요로 할 일이 있나?’

무왕이 뭘 시킬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때, 무왕이 내건 제안은 연우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처럼 정신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들어 봤지? 조만간에 우리가 거기에 용병으로 참여하게 되어서 말이야. 너도 거기에 손을 좀 보태 줬으면 싶은데. 어때?”

연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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