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외뿔부족 (5)
[서든 퀘스트 / 참전]
내용: 현재 탑은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으로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 외뿔부족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개입을 표방하고, 용병 집단으로서의 참전을 계획중에 있습니다.
그들의 일원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세요. 높은 공을 세우고, 명성이 커질수록 혜택과 보상이 많아지며 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지켜볼 것입니다.
제한 시간: 전쟁 종료 시점
보상:
1. 외뿔부족과의 친밀도 +150
2. 달의 씨앗
3. ???
놀란 건 연우만이 아니었다.
“어? 저 인간도 같이?”
“외부인사 영입?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해도 상관없잖아?”
“아니. 굳이 신경은 안 쓰는데. 그래도 실력이 있어야지. 방해만 되면 좀.”
“공주님과 왕자님이 추천한 인사인데.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독식자라면 꽤 유명하다면서?”
“그렇겠지?”
장로들과 다른 사람들도 전혀 언질을 받지 못했던 내용인지 잠깐 웅성거렸다.
판트와 에도라도 놀란 눈으로 자신들의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만큼 이번 사안은 절대 작은 게 아니었다.
외뿔부족이 몇십 년 만에 밖으로 모습을 내비치는 큰 사안이었으니까.
그리고.
연우의 가슴도 그들처럼 점차 방망이질을 치고 있었다.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이미 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이벤트가 되어 버린 대규모 사건.
그건 연우도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지켜보고 있는 사건이기도 했다.
두 곳 모두 언젠가 세상에서 지워 버려야 할 곳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연우는 최대한 빨리 11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전쟁이 터지기 전에 더 많은 층계를 올라서 계속 명성을 쌓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단번에 두 클랜의 간부들로부터 이목을 집중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 했다.
당장 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가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용병으로 고용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외뿔부족에서, 용병으로 참전을 하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제안을 받고 말았다.
외뿔부족과 함께라면. 명성을 쌓을 방법에 대해서 전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러니 연우에게는 더 좋은 기회였다.
외뿔부족은 구성원조차 여러 클랜에서 서로 모셔 가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는 곳. 그런 곳이 통 째로 참전을 한다면 클랜의 중심부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연우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인 것이다.
알도 부화시키면서 참전까지 해결을 한다면.
이보다 더한 일석이조가 어디에 있을까.
다만, 걸리는 점은.
‘외뿔부족은 탑 내의 일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관심과 중립을 내세우는 게 원칙 아니었나?’
아르티야라는 거대 클랜이 몰락하는 데 있어 외뿔부족이 전혀 관여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외부의 일에는 절대 크게 간섭하지 않고, 자신들도 간섭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외뿔부족이 최강자로서 오랫동안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런 원칙을 바꿔 버렸으니.
물론,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청화도의 창무신(槍武神). 그자가 외뿔부족 출신이긴 했었지.’
청화도를 다스린다는 다섯 무신 중 하나인 창무신. 그가 부리는 창 솜씨는 웬만한 랭커들도 날려 버릴 정도로 강하다 알려져 있었다.
그가 외뿔부족을 세상에 다시 나오게 한 건 아닐까?
“청화도로 참전을 한 겁니까?”
“크. 역시. 머리 회전이 빠른데?”
무왕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미심쩍은 점들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다.
“외뿔부족은 원래 절대적 중립을 표방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참전을 하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노코멘트. 다만, 자네가 짐작하고 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다는 건 알아 둬.”
‘역시 창무신이 끌어들인 거로군.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건 다 갖추고 있을 외뿔 부족을 끌어들일 만한 제안이 무엇인지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이 전쟁은 이제 쉽게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렸어.’
두 클랜의 전쟁만 하더라도 너무 큰 사안인데. 여기에 외뿔부족까지 더해진다면?
‘파란이 일어나겠지. 아주 크게.’
그리고 청화도의 절묘한 수에 혀를 찼다.
레드 드래곤에 비해 부족한 전력을 어떻게 보충할까 싶었는데, 이렇게 충격적인 인사들을 끌어 올 줄은.
아무리 안하무인인 레드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외뿔부족은 무시하지 못할 테니.
전쟁은 이제 절대 쉽게 끝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슴속이 끓었다.
원수 집단이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 쓰러진다면. 거기서 자신은 취할 것만 취하면서 목을 날려 버리면 되는 거니까.
“만약 제가 용병으로 참전을 하게 된다면. 어떤 포지션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까? 사실 외뿔부족이나 되는 곳에서 외부 인사를 필요로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만.”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아.”
무왕은 의자에 등을 붙이면서 관자놀이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자네, 혹시 마을 가로지르면서 우리가 전쟁을 준비한다거나 하는 인상을 받은 적 있나?”
연우는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 풍경을 떠올렸다.
그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치? 이 양반들이 그런 족속들이라니까? 우리가 참전한다고 발표를 했어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작자들이 좀 있어. 뭐, 반면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날뛸 수 있다고 좋아라 하는 미친놈들도 있지만.”
연우는 그제야 외뿔부족의 속사정을 알 것 같았다.
“부족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건 아니신 거군요.”
“맞아. 내가 나서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대도, 말귀를 알아쳐 듣는 새끼는 한정되어 있어서. 그래도 내 체면이 있지, 머릿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왕은 그러면서 깍지를 낀 손 위로 턱을 올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일손은 많을수록 손해 볼 건 없지. 뭐, 사실 자네 말고도 식객은 아홉 명 정도 더 있어. 다들 한 가락 하는 양반들이고.”
연우는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무왕이 나선다고 하면 거동이 불편한 장로들을 제외하면 전사들 대부분은 따라나설 테지.’
평화로운 분위기를 하더라도, 왕과 일족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 곳이 외뿔부족이었다.
연우로서는 전혀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참전을 하고, 청화도의 중심에서 리언트를 지켜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마력회로의 발전에 도움을 줄 외뿔부족의 무공과 진법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선불리 하겠노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왕의 속내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어.’
연우의 눈에는 여전히 무왕이 포악한 짐승이 웃고 있는 것으로만 비쳐졌으니.
저 속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마치 판트와 에도라를 정교하게 합쳐 놓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판트의 과격함과 에도라의 치밀함.
두 가지를 동시에 겸비했다는 건, 그만큼 상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이건 자신에게 너무 유리하기만 한 조건이었다.
참전하겠다고 말만 하고 제대로 싸우질 않으면? 전쟁에 참여해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는다면?
무왕은 어느 정도 선까지 활약을 하라는 조건부를 달지 않았다.
그때 가서 달의 씨앗을 주지 않는다고 하지도 못할 것이다. 퀘스트창까지 뜬 이상, 이건 정식 ‘계약’이 되어 버린 셈이었으니.
탑의 시스템은 계약에 관한 한 엄중한 면이 있었다.
무왕이나 되는 작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 주려는 걸까.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여러 모로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아니면 따로 고민할 시간 줘?”
무왕은 그런 연우를 재촉해 댔다.
결국.
연우는 고민을 끝내고, 결정을 내렸다.
“참전하겠습니다. 용병으로.”
무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깍지를 낀 손에서 얼굴을 떼며 책상을 세게 내려쳤다.
쾅!
“그렇지! 남자라면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전쟁 돌아가는 꼴 잘 봐 두라고. 앞으로 탑을 오르는 데 있어서 자네한테도 꽤 많은 공부가 될 테니까.”
무왕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를 비롯한 궐내의 여러 사람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왕이 주도한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건, 무왕에 대한 부족원들의 절대적인 신뢰였다.
태도는 경망스러워도 절대 허투루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어차피 별관에는 연우 외에도 다른 식객들도 머물고 있었으니 별달리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다만, 판트와 에도라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분위기에 휩쓸려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독식자 카인은 당분간 우리 일족의 식객으로서 같이 이번 전쟁에 참전하도록 한다. 이의 있는 사람?”
부족원들은 모두 팔짱을 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는 뜻.
몇몇은 대놓고 연우를 보면서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호승심이 잔뜩 섞인 눈빛이었다.
“그럼 그렇게 결……!”
무왕이 선고를 내리려던 그때.
“이의 있습니다.”
갑자기 호위무사들 중에서 한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런데 저마다 표정이 달랐다.
장로들은 흥미진진하다는 얼굴을 한 반면, 판트는 대놓고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에도라의 표정도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무왕이 이의를 제기한 사람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 장. 하고 싶은 말은?”
“아버지!”
‘아버지?’
연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여긴 공식 석상이다. 말 가려.”
“죄송합니다. 왕이시여. 실력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을, 그것도 11층도 제대로 클리어하지 못하고 있는 어중이떠중이를 함부로 식객으로 들이시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장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연우를 노려봤다.
마치 네깟 놈이 우리 일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느냐는 오만한 눈빛.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디선가 많이 봤던 눈빛이었으니까.
튜토리얼에서 처음 만났던 판트와 에도라가 저런 눈을 하고 있었지, 아마?
그리고 연우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진짜 외뿔부족의 마을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동안 야누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너무 자신을 호감 어린 시선으로 봐서 깜빡할 뻔했다.
이들은 오만함으로 똘똘 뭉친 작자들이 아닌가.
“그래서요? 지금 저와 판트 왕자의 추천 인사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때, 에도라가 싸늘한 목소리로 장에게 물었다.
장은 에도라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맞받아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
“무례하시군요.”
“무례한 것은 너희 남매지. 어찌 한낱 인간 따위를. 쯧!”
“지금 그 말, 책임질 자신 있으신가요?”
“못할 것도 없지.”
도저히 같은 아버지를 둔 남매라고 생각하기 힘든 모습.
둘 사이에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만류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서로 칼을 빼 들고 달려들 것 같았다.
장로들은 너무 재미나다는 듯이 구경만 해 댔지만. 팝콘을 가져다 주면 딱 좋아할 것 같았다.
짜악!
“자, 거기까지.”
무왕이 박수를 큰 소리가 나게 쳤다. 그러자 궐내를 휘감고 있던 살기가 확 하고 흩어졌다.
장로들이 아쉽다면서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렸을 때 많이 싸웠던 형제자 매일수록 친해진다는 말은 있지만, 그래도 싸우려거든 나가서 싸워. 정신 사나우니까. 하여간. 장, 너는 카인을 믿지 못하겠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그럼 검증하면 되겠네.”
무왕은 연우를 돌아봤다.
연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왕이 씩 웃으면서 다시 장을 돌아봤다.
“본인도 하겠다고 나섰으니. 실력 검증은 장, 네가 직접 해. 그럼 불만 없지?”
장이 잘되었다는 듯이 차갑게 웃었다.
“예.”
“아버지!”
에도라가 무왕을 돌아봤지만, 무왕은 손을 뻗어 그녀의 말을 묵살했다.
“그럼 5분 뒤에 뒤쪽에 있는 연무장으로 집합해. 거기서 검증하겠다.”
* * *
그 많던 사람들은 썰물처럼 무궐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나가던 장은 연우를 한 차례 비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에도라와 판트가 연우에게 다가왔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형님. 으음. 이거 좀 귀찮게 만들었수다.”
판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연우가 물었다.
“어차피 식객으로 있으려면 실력을 보이긴 보여야 했다. 차라리 잘되었어.”
“그건 그런데…… 좀 골치가 아파서 말입니다. 괜히 형님을 우리 가정사에 끌어들인 것 같기도 하고.”
“……?”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안 사정?
에도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혹시 저희 일족의 구성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나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외뿔부족은 ‘부족’이라는 단어로 한데 묶여 있었지만, 사실 총 51개의 가문이 연합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최강자가 왕이 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저희 일족은 총 51개의 가문으로 이뤄져 있어요. 판트 오빠와 제가 있는 청람가도 그중 하나고요. 아버지는 백선가(白仙家)라는 곳의 출신이셨어요.”
에도라의 설명이 이어졌다.
“본디 외뿔부족의 왕은 선대 왕의 자식들 중에서 뽑히도록 되어 있어요. 그리고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왕은 반드시 각 가문에 최소 한 명 이상씩 후계를 낳아야만 하는 의무가 있고요.”
왕은 반드시 51개 가문의 여자들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반드시 그들에게서 자식을 봐야 한다는 뜻이었다.
너무 복잡한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예. 장은 우리와 아버지만 같은 이복 남매예요. 아버지처럼 백선가 출신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에도라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판트 오빠와 함께…… 차기 왕으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지는 네 후보 중 한 사람이기도 해요. 아니, 사실 따지자면 판트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은 편이예요.”
“야! 그건 아니거든!”
“시끄러. 그러게 누가 약하래?”
에도라는 판트의 반발을 묵살하고, 다시 연우를 바라봤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 초조함이 살짝 어렸다.
연우는 전후 사정을 알아채고 가볍게 혀를 찼다.
“너희 남매를 괄시하고, 장로들이 있는 데서 체면을 꺾을 목적으로 이딴 일을 꾸몄다는 거군.”
“맞아요.”
이래서 복잡한 가정사에 끌어들여 미안하다고 한 모양이었다. 괜히 연우만 휘말리게 됐으니.
“게다가 장은 이미 이른 나이에 30층계를 주파했을 정도로 손꼽히는 무재로 불리고 있어요. 그러니…….”
에도라는 뒷말을 흐렸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굳이 부딪칠 필요가 없다. 아니, 부딪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연우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걱정하는 판트와 에도라가 귀여웠다. 정말 튜토리얼에서 만났던 그 녀석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 아이들이 약한 모습을 보일 정도라면 어떤 상대라는 걸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조금 짜증이 난다고.
그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 강제로 휘말리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리고 판트와 에도라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든 헛짓거리도 짜증이 났다.
“달의 씨앗이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어떻게든 구…….”
“아니. 됐다.”
연우는 손을 뻗어 에도라의 머리를 헝클었다.
에도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너희들은 앉아 있어.”
“하, 지만.”
“너희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라. 너희들이 날 형제처럼 생각한다면. 원래 이런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하는 건.”
가면 아래, 연우의 눈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형이 할 일이니까.”
* * *
뒤쪽에 마련된 연무장이 꽤 시끌벅적해졌다.
무왕과 장로들이 입회를 했다. 그리고 소문을 듣고 부족원들 대부분이 우르르 몰려와 구경하기 여념이 없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판트, 에도라의 인간과 차기 왕으로 각광받는 장의 대결이었으니까.
에도라는 연무장으로 들어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축 떨어뜨린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연우가 했던 말을 계속 되새김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판트는 그런 동생을 보면서 ‘중병이야, 중병’이라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 연무장 중심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무장 중심으로, 연우와 장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장은 검을 쓰는지 검을 들고 가볍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은 연우에게 향했다.
평소 눈엣가시였던 판트와 에도라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어 대던 인간.
밖에서는 독식자니 뭐니 하면서 시끄러운지 몰라도, 장에게는 우습기만 한 상대였다.
장은 처음부터 판트 남매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아 간 창녀의 자식들. 더러운 피가 흐르는 것만큼 불결한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불결한 것들과 가까이 지내는 작자라면. 뭐, 딱히 보지 않아도 뻔하겠지.
그런데 정작 그 인간은 연무장에 들어선 뒤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기를 점검하지도, 몸을 풀지도 않았다.
이상한 가면 아래로, 그저 고요한 눈길만 보낼 뿐.
장은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뭔가 있는 척을 해 봤자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앞서 말했듯, 이건 어디까지나 검증이 목적이다. 살상은 불허하며, 만약 불상사가 벌어진다면 엄벌에 처할 거다. 알아들었나?”
무왕은 팔짱을 끼며 예의 익살 맞은 모습으로 둘에게 물었다. 연우와 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왕이 크게 소리쳤다.
“그럼 시작하도록!”
장은 칼을 고쳐 쥐었다.
백선가의 비기, 〈선무검식(仙舞劍式)〉의 기수식.
그는 단번에 연우를 거꾸러뜨릴 속셈이었다.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여야 판트 남매의 체면도 땅바닥에 떨어질 테니까.
전력을 다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30층의 보스, 드라고니안을 단칼에 베었을 때처럼 상위 기술인 오러를 날리려는 찰나.
팟-
갑자기 서 있던 연우의 신형이 아래로 움푹 꺼졌다.
‘어디 갔……?’
장은 연우를 찾아 재빨리 감각을 돌리려 했지만, 그의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는 이미 그의 머리통이 지면에 처박혀 있었으니까.
콰아앙!
장의 머리가 단단하게 다져 놓은 지면을 부수고 내리꽂혔다. 그 위에는 어느새 차가운 눈을 한 연우가 녀석의 뒤통수를 단단히 움켜쥔 채 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
“……!”
압도적인 패배.
좌중이 일제히 경악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