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96화 (96/862)

21화. 외뿔부족 (6)

사람들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독식자에 대해 알고 있던 사람들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에 충격에 빠진 얼굴이었다.

눈썰미가 좋은 장로들은 얼추 연우의 힘을 짐작하고 있어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는 건 똑같았다.

에도라는 탄성을 터뜨리고, 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괴물이 못 본 사이에 더 큰 괴물이 되었어.’라는 혼잣말을 중얼 거리면서.

그리고.

“푸하핫!”

무왕은 재미있다는 듯이 양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은 그가 아끼는 자식 중 하나. 그런 자식이 패배했는데도 불구하고 안타까워하거나 걱정스러워하기보다는 아주 즐거워하고 있었다.

연우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장의 머리를 더 깊숙하게 밀어 넣었다.

쿠쿵!

대리석으로 말끔하게 닦아 놨던 바닥이 더 크게 갈라졌다.

“크윽……!”

마치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이 된 장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팔에 잔뜩 힘을 줬지만, 위에서 가해지는 압박 때문에 도저히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녀석을 내려다보면서 연우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든지 나와는 상관없어. 어차피 실력을 검증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거였으니까.”

까만 가면 아래로 도깨비불이 켜졌다.

“하지만 네 목적에 최소한 날 귀찮게 하지는 마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지 않나? 아, 그리고 저 아이들도 마찬가지고.”

“큭!”

장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11층에서 버벅대는 녀석 따위에게 이렇게 당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꿈쩍도 하질 않았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아니, 그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딴 망신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치욕스럽기만 했다.

“알았나?”

“이이……!”

“귀는 열려 있으니 알아들은 걸로 생각하지.”

연우는 그제야 장에게서 손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무왕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다.

“혹시 이래도 자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몇은 감탄을 터뜨리는 반면, 몇몇은 연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도 했다.

장은 외뿔부족에서도 제법 촉망받는 전사였다. 연우의 실력은 이미 검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다시 무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객으로 받아 달라는 눈빛.

무왕도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아…… 직! 안 끝났어!”

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우의 시선이 다시 뒤쪽으로 향했다.

장이 ‘퉤’하고 먼지 섞인 가래침을 바닥에 뱉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방금 전에! 네가 이상한 술수를 썼다는 걸 모를 것 같아?”

연우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가 무슨 술수를 썼다고?”

“그럼 이딴 게 말이 될 것 같나! 정정당당하게 다시 붙어 보자. 다시는 술수를 쓰지 못하게 해 줄 테니까.”

피식.

연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웃음을 던졌다.

간혹 저런 놈들이 있었다.

꼭 앞뒤 분간도 못하고 날뛰다가 크게 당해 봐야만 정신을 차리는 놈들이.

그래서 검지를 까닥거렸다.

“그럼 다시 덤벼 봐.”

“감히!”

장은 인상을 와락 구기면서 지면을 박찼다. 하지만 분노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그는 전력을 다해 마력을 검에 실어 넣고 있었다.

츠츠츠-

칼날을 따라 희뿌연 기체가 일렁이더니, 한데 뒤섞이면서 단단한 고체의 형상을 떴다.

“검기(劍氣)……? 미쳤어!”

“아버지!”

에도라가 비명을 지르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트도 홱 하고 무왕을 돌아봤다. 어서 말리지 않고 뭐하시느냐는 어조로.

검기.

탑 내의 용어로 ‘오러 블레이드’라고도 불리는 상위 기술이었다.

마력을 단단히 밀집시켜 체외로 발현시키고, 여기에 의념을 잔뜩 실어 무쇠도 무처럼 잘라 버린다는 기예.

외뿔부족에서도 일류 전사급 이상, 탑 내에서도 랭커의 자리를 노리기 시작한다는 실력자들이 쓸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이런 자리에서 꺼낸다고?

무왕은 분명 이 자리는 검증이 목적이니 살상을 금지한다고 말했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그것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거기다 펼치고 있는 무공도 선검가의 절기, 〈주선검격(誅仙劍擊)〉이었다.

상대를 쉴 새 없이 휘몰아치다가 단번에 급소를 끊어 놓아야만 끝나는 무공.

웬만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도중에 흐름을 끊는 것도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저거 위험하지 않겠느냐면서 걱정 섞인 소리를 내뱉었지만.

무왕은 별다른 제지 없이 여전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연우도 마찬가지.

그는 오러 블레이드가 목덜미까지 달려오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허리를 뒤로 바짝 낮춰서 공격을 피했다.

검이 도중에 방향을 꺾으면서 허리를 갈라 오자, 지면을 박차 단번에 장과의 거리를 바싹 좁혔다.

장이 뒤로 슬쩍 빠지려는 것을, 녀석의 팔뚝을 재빨리 낚아채 그대로 반대로 꺾어 버리고, 팔꿈치를 뾰족하게 세워 그대로 복부를 후려쳤다.

콰앙!

“컥!”

팔뚝이 꺾이면서 검이 위로 튀었다. 장이 입고 있던 상의 갑옷은 그대로 박살이 나면서 안쪽으로 깊게 함몰되어 핏자국이 잔뜩 번져 나왔다.

연우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타격기를 연거푸 날렸다. 주먹이 작렬할 때마다 팡, 팡, 하고 공기가 터져 나갔다.

장은 피를 잔뜩 토하면서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어야만 했다.

“쿠르륵…… 쿠륵!”

장은 피를 토하면서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자신은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자랑스러운 외뿔부족의 차기 왕이 될 사람이었지, 사람 같지도 않은 저층의 플레이어에게 참혹하게 당할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너덜너덜해진 몸을 이끌고 상체를 일으켰다. 저 멀리 떨어진 검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지만.

퍼억!

어느새 장의 앞까지 다가온 연우가 발로 세게 걷어차 녀석을 날려 버렸다.

장은 결국 한참이나 땅바닥을 뒹굴다가 기절했다.

“…….”

연우도 그제야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그때, 관객석에서 백선가의 사람들이 다급히 달려와 장을 등에 업고 후다닥 연무장을 벗어났다.

원수 보듯이 연우를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외뿔부족 사람들은 일제히 감탄을 터뜨렸다.

“이야!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봤어? 방금 전 동작? 무공이 아닌데도 되게 깔끔하던데?”

“오로지 실전적인 용도로 만들어진 것 같던데. 꽤 좋았어. 나중에 한 번 배워 보고 싶던걸.”

“장 왕자를 저렇게 찍어 누를 정도면. 뭐, 더 이상 따로 볼 필요는 없겠네. 오히려 이번에는 내가 겨뤄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나?”

백선가를 제외한 부족원들은 연우가 장을 쓰러뜨린 데에 대해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단련하기 위해 어려운 훈련을 많이 하다 보니, 저 정도로 다치는 건 넘어져서 무릎까지는 상처 정도로만 보이는 것이다.

아니, 그런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단순한 대련 자리에서 오러 블레이드까지 꺼낸 건 어디까지나 장의 실책.

오히려 그런 기술을 두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깔끔하게 제압하는 연우의 솜씨에 감탄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제대로 납득하고 말았다.

왜 무왕이 그를 식객으로 받아들이려 했는지를.

외뿔부족은 외부와의 교류를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부족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공을 공유하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연우가 보인 동작들은 무공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면서도, 그들이 배울 만한 것들이 많이 보였으니.

식객으로 머물면서 그의 많은 것들을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연우도 이런 점을 대강 눈치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장을 제압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외뿔부족은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는 곳이었다.

전사의 명예를 걸고 시작된 대련에서 승리자에게 더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우는 무왕을 돌아봤다. 이제 끝났냐는 눈빛.

무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외뿔부족의 식객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사람들이 연무장을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판트와 에도라가 연우에게 다가왔다.

에도라는 다친 데 없냐는 눈빛으로 연우를 꼼꼼하게 살폈고, 판트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 거렸다.

“그새 또 얼마나 강해진 거요? 나 참, 괴물이 따로 없다니까.”

그러면서도 판트의 입가는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평소 눈엣가시 같았던 장이 실컷 두들겨 맞았으니 속이 다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연우가 했던 말이 가슴에 와 닿기도 했다.

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말.

에도라 외에는 다른 형제들로부터 이렇다 할 형제애를 느끼지 못했었기에,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우는 피식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다 뒤쪽에서 무왕이 장로들과 함께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연우는 재빨리 무왕에게 다가갔다.

무왕은 장로들과 함께 자리를 뜨려다가 말고, 연우를 발견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장로들에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 전한 뒤, 연우와 단둘만 남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친데?”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뭘?”

능청스런 대답.

가면 아래, 연우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실 연우는 자신과 아랑단 사이에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처럼 모른 척 잡아떨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었다.

하지만 무왕이나 되는 사람이 꺼낸 말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모른 척 잡아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피식.

무왕은 살짝 웃음을 터뜨리면서 대답했다.

“알았다. 알았어. 이거 참, 농담이 안 통하는 친구구만.”

무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어떻게 아랑단을 쓰러뜨린 걸 알고 있었나, 그걸 묻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우연찮게라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는 마력 속에 의념을 실어 말을 걸었다.

“그렇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건 내가 알고 있던 게 아냐. 난 그냥 전해 들었을 뿐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누가, 말입니까?”

무왕이 익살맞게 미소 지었다.

『영매.』

“……!”

『영매가 말하더라고. 별자리를 봤는데, 아무래도 조만간에 크게 사고를 치는 놈이 나타날 것 같다고. 그리고 우리와도 깊은 관련이 생길 것 같다고 말이야.』

“…….”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지. 과연 큰 사고라 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전쟁은 ‘사고’가 아니니, 딱 하나밖에 더 있나? 튜토리얼에서 아랑단이 전멸한 것.』

“…….”

『그리고 우리와 관련이 있다 하니 자네일 테고. 그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보이는 것이지.』

연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매라는 존재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위험한 존재였었나?

가만히 앉아서 수많은 일들을 엿보고 추측해 내는 존재라니. 그런 게 가능이나 한 걸까?

아무리 갖가지 기현상이 벌어지는 탑이라지만, 영매라는 존재는 그의 예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래도 걱정 마라. 어디 가서 이 이야기를 떠벌리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우리가 청화도 쪽에 선다고 해도, 필요에 의한 전략적인 제휴일 뿐이고. 우리에게 아무 득도 없어. 무엇보다.』

무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자식들이 따르는 사람을, 굳이 해코지할 만큼 내가 나약하지는 않잖아?』

연우는 무왕의 모습에서 오만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절대적인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이 사람에게는 연우의 일조차도 그저 탑 곳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른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최소한 내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아랑단과 적대 관계에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그 원인을 단순히 칸, 도일과 관련이 있다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의 정체를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반응하지 않았을 테니까.

‘정우에 대한 것만 확실히 들키지 않는다면, 다른 건 얼마든지 덮을 수 있어.’

그런 연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왕은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드러낸 이유는 딱 하나. 네가 어떤 됨됨이를 갖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였을 뿐. 다른 이유는 없어.』

‘용마안이 보여 주는 모습은…… 진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거짓말은 없어. 하지만 정말 이게 전부일까?’

더 깊이 속내를 파내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무왕이 자신에게서 뭔가를 보고자 한다는 것.

그게 무엇인지는 앞으로 같이 다니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의 화살을 다른 방 향으로 돌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잘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세 명 중에서 다른 한 사람은 누굽니까?”

『올포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

77층에 있을 그가 여기서 왜 거론되는 걸까?

『그 작자는 현재 플레이어들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최고층에 가만히 앉아서, 모든 걸 관망하며 신의 흉내를 내는 놈이야. 나도, 영매도, 그 빌어먹을 작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너라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

연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지와 함께 밝혀진 올포원의 다른 스킬이 떠올랐다.

〈천리안〉.

인과율을 관조할 수 있는 스킬이라면. 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자기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내려다’ 볼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연우는 모든 의문을 그렇게 접으면서,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졌다.

“외뿔부족이 청화도에 합류하는 건 언제쯤으로 예정하고 계십니까?”

전쟁의 시기.

용병으로의 참전이 확정되었다면 그때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했다.

하지만 무왕은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고, 시간이 빠듯할 거라는 눈빛을 보냈다.

“얼마 안 남았어.”

무왕의 미소 사이로 송곳니가 훤하게 드러났다.

“닷새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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