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화. 천익기공 (1)
연우는 별안간 눈이 커졌다.
‘198층의 신과 악마들이 관심을 가진다고?’
98층은 플레이어들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숱하게 탑을 공략했지만 다다를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
77층에 올포원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리를 잡은 뒤, 어느 누구도 그 위의 층계를 밟은 적이 없었다.
레드 드래곤이 76층에 웅거하며 올포원을 끄집어 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한다지만, 올포원은 단 한 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물론, 78층 이후의 층계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무엇이 있을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들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98층이었다.
랭커의 한 축을 이루는 사도들의 주인. 신과 악마들이 머문다는 터전.
신과 악마들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98층에서 77층의 아래 세계들을 굽어다본다.
그리고 이따금 마음에 드는 플레이어들이 있으면 권능을 선물하기도 하고, 사도의 좌를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98층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경우는 없었으니.
플레이어들은 그저 층계의 차이가 너무 커서 그들이 내려오면 어마무시한 영압(靈壓) 때문에 아래층이 붕괴될 걸 두려워해서는 아닐까 하고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다만, 신과 악마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아래층에 힘을 투시하여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연우에게 관심을 보였던 헤르메스가 대표적인 예.
그리고 이렇게 메시지를 통해 관심을 표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아야 한 두 명이 고작이야. 정우조차도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는 경우는 없었는데.’
그만큼 코어라는 개념이 독특한 걸까?
그저 기존에 있는 마력회로에, 단순히 외뿔부족이 가진 지식을 덧댄 것에 지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메시지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고, 연우가 더 이상 유추할 수 있는 단서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내가 찾은 길이…… 정답이다.’
신들조차도 놀랄 정도로.
코어를 이용한 마력의 자연스러운 조절.
애초 마력회로가 원래 인간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가정이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연우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길을 찾았다면 바로 여기에 맞춰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연우는 코어를 메인 주제로 두고, 여기에 맞춰서 머릿속에 뒤죽박죽 섞인 정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부분은 해석을 마친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무엇을 따로 더 찾아야 할지 따로 정리를 해 두고, 필요 없다 싶은 부분들은 과감하게 폐기시켰다.
연산.
용종은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
당연히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막대한 지식이 있었고, 뇌를 쓰는 방식은 인간이 따라잡을 길이 없었다.
연우는 용마안에 구성되어 있는 용종의 이러한 특성을 가져와 오로지 연산에만 몰두했다.
머리에 열이 잔뜩 올랐다.
뇌가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전투 의지’의 숙련도가 빠른 속도로 오릅니다. 27, 28…… 35, 36%…….]
[새로운 지식이 확장됩니다. 마력회로에 대한 응용도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그릇이 넓어졌습니다.]
[지식의 확장과 영혼의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다시 재기됩니다. 99.5%, 99.6%…….]
연우는 마치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모든 정신과 의념을 오로지 생각에만 집중시켰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연우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면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외부는 이미 해가 진 상태였다.
“오라, 버니……?”
에도라는 연우에게 방해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고 같이 따라 섰다.
그녀의 눈에 연우는 어딘지 모르게 많이 위태로워 보였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빛이…….’
에도라는 깊게 가라앉은 연우의 두 눈을 본 순간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 연우는 연우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왠지 가까이 다가가면 내쳐질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에도라는 왜 자신이 그런 느낌을 받았나 싶다가, 뒤늦게 저런 눈빛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적들을 만났을 때. 그때 눈이 저랬었어.’
에도라는 어린 시절 외뿔부족의 적들로부터 납치를 당할 뻔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뒤늦게 사실을 알고 자신을 구하러 오셨던 아버지. 무왕이 적들에게 보였던 눈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성인이 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눈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연우는 에도라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다음 구역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여태껏 연우가 있었던 곳은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무서고 내에서도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을 뿐.
연우는 이번에도 구역 곳곳에 있던 책들을 마구잡이로 골라 심법만 읽어 내려갔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두 눈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연우가 정신적 확장과 함께 얻은 건, 총 세 가지였다.
특성, 기인.
칭호, 마력의 축복을 받은.
스킬, 기공.
기(氣)는 마나를 뜻하는 다른 단어이기도 하니, 결국 세 가지 전부 같은 의미 선상에서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성: 기인(氣人)]
대기 중에 흐르는 원기(元氣)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심법으로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양이 월등히 많아지며, 재충전의 속도가 월등히 빨라진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더 많은 양의 마력을 체내에 축적하기를 원한다.
마력량에 따라 스킬의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데다가, 신체적인 능력도 그만큼 강화시킬 수 있었으니.
그런데 연우는 새롭게 추가된 특성 덕분에 단번에 수용할 수 있는 마력량이 대폭 증가했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모자라, 마력이 소진한 뒤에 재충전되는 속도도 빨라졌다.
소모와 충전의 순환이 빠르면 빠를수록, 마력의 사용 효율 또한 높아지는 게 당연했다.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꿈에 그릴 특성에 손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칭호도 마찬가지.
[칭호: 마력의 축복을 받은]
마력회로의 새로운 사용법을 터득하면서 얻게 된 칭호.
마력회로의 ‘격’이 상승하게 되면서 그동안 단절되어 있던 마나 스트림과의 접촉이 이뤄지게 되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한계가 있어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용종의 수준만큼은 되지 않는다.
효과: 마력 +15. 마력회로 스킬 숙련도 +9%. 단번에 출력할 수 있는 마력량이 월등히 증가한다. 다양한 속성의 마력을 차별 없이 다룰 수 있게 된다.
특성에서부터 비롯된 칭호는 사실상 연우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력 계수가 15만큼이나 올라갈 뿐만 아니라, 스킬 숙련도도 대폭 상승했다.
하지만 연우의 눈길을 사로잡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다양한 속성의 마력을 차별 없이 다룬다는 점.
‘이 말은 서로 상반된 속성도 같이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야.’
원래 속성에는 상극이 존재한다.
불에는 물이, 물에는 나무가, 나무는 대지에 약하듯이. 신성력과 마기가 서로 부딪치듯이.
때문에 플레이어는 속성을 다루는 데 있어 주력으로 삼는 속성을 한 가지 두고, 이것에 방해가 되지 선에서 두세 가지를 추가하곤 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상성 충돌이 벌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그래서 연우도 전술을 짤 때 아이기스를 쓸 때와 검은 팔찌를 쓸 때를 따로 분리시켰다.
아이기스에 깃든 신성력이 사귀들에게는 너무 쥐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칭호가 생긴 순간, 그러한 제약이 완전히 사라졌다.
물론, 어느 정도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연우는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했다.
마력의 축복이란 게 그런 거였으니까.
용종이 그랬다. 그들은 속성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법칙을 마음껏 비틀었다. 용언은 진리에 닿아서 세상을 직접 움직였다.
비록 연우는 거기에 미치지는 못할 테지만, 최소한 마나로부터 ‘차별’을 받지 않는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스킬.
[기공(氣功)]
등급: DDD-~SSS+
숙련도: 0.0%
설명: 대기 중의 마나를 끌어와 마력으로 가공한다. 숙련도가 높을수록 가공의 효율 속도도 비례해서 빨라진다. 이때 가공된 마력은 맑은 순도를 자랑한다.
* 운기조식
명상과 호흡법을 통해 순도 높은 마나를 받아들이고, 마력으로 치환하여 축적한다.
* 내공 발현
치환된 마력의 출력을 높인다. 이때의 출력 효율은 스킬 숙련도와 사용하는 심법의 등급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현재 책정된 스킬의 등급은 DDD-입니다. 심법을 얻어 등급을 조정하세요.
기공은 마력회로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게 만들어진 스킬이었다.
당장 등급은 최하위로 책정되어 있지만, 코어의 생성과 새로 창안할 심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연우는 자신이 얻은 것들을 계속 되짚어 보면서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을지를 궁리했다.
일단 기본 토대는 얼추 갖춰졌다. 그렇다면 그 위에 쌓아 올릴 재료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런 재료들은.
‘여기에 가득해. 참고할 만한 건 얼마든지 있어.’
무서고 내에 아주 많았다.
비록 철급밖에 되지 않는 기본 무공 서적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좋았다.
탄탄한 기초 심법일수록, 더 좋은 재료거리가 되어 줄 테니까.
연우가 신경 쓰는 건 딱 한 가지였다.
‘마력회로에 가장 알맞을 것.’
용마안으로 읽어 낸 정보들을 해석하고, 외뿔부족이 아닌 자신에게 맞게끔 개량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역근경은 마력회로와 너무 잘 맞아. 마치 처음부터 세트였던 것처럼.’
가장 먼저 집었던 역근경은 연우가 만드는 심법의 주요 뼈대가 되어 주었다.
아마 여러 심법 중에서도 가장 순도 높은 마력을 쌓으려는 역근경의 목표와, 마력을 순수하게 다루는 데 특화된 마력회로의 특징이 잘 맞아떨어진 게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파악한 심법은 총 312종입니다. 이중 ‘역근경’을 중심으로 새로운 심법을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숨겨진 용종의 특성인 ‘용의 지식’이 일부 적용되어, 제작 속도가 훨씬 빨라집니다.]
여하튼.
연우는 그렇게 날밤이 새도록 무서고에서 나오지 않으면서 오로지 심법 서적만을 탐독하는 데 열중했다.
그리고 그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며, 사흘째가 되었다.
그동안 연우는 일절 무서고 밖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탐독에만 매달렸다.
에도라는 그런 연우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다녔다.
식음을 전폐하고, 외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연우를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저건 몸을 혹사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들었지만, 여전히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우의 눈가가 퀭하게 내려앉는 만큼 눈빛은 더더욱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에도라는 자신도 같이 불길에 휩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들 정도였다.
그러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건, 3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 넓은 철급 무서고를 크게 한 바퀴 다 돈 상태.
그동안 읽은 책자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았고, 하나하나가 에도라도 인정할 만큼 탄탄한 것들이었다.
화아악-
갑자기 연우를 따라 흐르던 공기가 바뀌었다.
무거우면서도 텁텁한 공기.
에도라는 순간 연우에게서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물론, 판트나 다른 주변 부족원들도 저것과 비슷한 일을 겪을 때가 많았으니까.
깨달음.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어렴풋하게 잡혔던 뭔가를 확실하게 잡았을 때. 무공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간, 연우를 따라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풍속이 점차 강해지면서 주변에 있던 책장을 크게 흔들고, 책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다 철급 무서고가 위아래로 요동을 쳤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바람 세기.
무슨 일인가 싶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들이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방해하지 말라는 에도라의 눈빛을 받고 조용히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연우를 보는 그들 사이에 소리 없는 경악이 퍼졌다.
30층을 극복한 장을 한 번에 꺾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만한 기세라면 외뿔부족 내에서도 랭커를 제외한 자들 중에서는 상위권이라고 꼽힐 만했으니까.
아니, 그런 것을 제외하더라도, 연우가 이제 갓 무공에 입문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세에 담긴 깊이를 읽고 놀라기도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양광이현 급의 성취 아냐?’
‘미쳤어……!’
그러다.
번쩍!
연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날카로운 광망이 눈가 위로 번뜩이면서 사위를 갈랐다.
휘몰아치던 바람도 금세 착 가라앉았다.
그리고 짙은 악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연우가 입고 있던 옷도 마치 먹물에 담근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다.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육체가 거기에 맞춰 변하면서 체내 구석구석에 쌓여 있던 마지막 노폐물이 밖으로 배출된 것이다.
‘기경팔맥과 십이경락이 열렸다……!’
‘벌모세수라니. 허! 단 나흘 만에 저런 게 가능하다고?’
그렇게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 가는 가운데.
연우의 눈빛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세를 천천히 갈무리한 그는 어딘지 모르게 후련해 보였다.
비록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두 눈은 언제 뜨거운 불길을 품었냐는 듯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도라.”
“네?”
너무 오랜만에 입을 열었더니 목소리가 많이 탁했다.
에도라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연우를 빤히 쳐다봤다. 사흘 동안 봤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비록 악취가 진동하고 주변은 널브러진 책자들로 엉망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유독 그만 보였다.
왠지 모르게 공기가 뜨거웠다.
콧잔등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 묘한 분위기 속에서. 연우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배가 많이 고픈데. 뭐 먹을 거 없나?”
“…….”
꼬르륵-
연우의 뱃속에 든 거지가 밥 달라면서 에도라의 소녀 감성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