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천익기공 (2)
연우는 한 손에 샌드위치를, 다른 한 손에는 비급을 든 채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탐독에 열중하던 것과 다르게 지금은 에도라와 대화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여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한편으로는 의식 중 일부를 체내로 돌리기도 했다.
‘기혈이 열린 뒤로 마력회로가 보다 더 제대로 작동하고 있어.’
[지식이 확장되어 육체가 변화하였습니다. 마력이 새로운 길을 찾아 움직이며 새로운 회로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중요회로 3개가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대회로 중 6개가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중회로 중 12개가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소회로 중 36개가 성공적으로 열렸습니다.]
……
[36개의 코어가 새롭게 생성되었습니다.]
[마력회로의 1차 변화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마력이 새롭게 열린 회로를 따라 이동하며 남아있는 노폐물을 배출합니다.]
[‘마력회로’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35.1%]
[‘기공’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9.2%]
[마력 스탯이 5만큼 상승했습니다.]
[모든 속성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
[육체의 새로운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다시 재기됩니다.]
[현재 작업량: 99.7%]
혈(穴). 연우는 코어(Core)라고 명명한 장치는 원래 인체 내에 총 360여 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연우는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된 36개의 장소를 먼저 점지해 뒀다. 그리고 각각 장소에 다 마력을 잔뜩 응축시키고, 해체되지 않도록 단단한 고정시켜 코어를 생성했다.
덕분에 마력회로 내의 마력이 1/5까지 확 줄어들고 말았지만, 대신에 효율성은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상승을 이뤘다.
코어를 통해 운용되는 마력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세세한 제어도 가능해졌으니.
더구나 뜻하지 않게 추가적으로 발견된 효과도 있었다.
그 많던 마력량이 확 줄어들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숨겨진’ 마력회로의 위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아 개통되지 않았던 회로들. 그리고 그 양은 연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방대했다.
크고 작은 회로들이 거미줄처럼 세세하게 얽혀 있었다. 어떤 회로는 너무 세밀해서 집중하지 않으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중에서 연우가 그동안 사용하고 있던 양은 불과 20%.
남은 80%를 모두 개척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훨씬 방대한 양의 마력을 운용하고 훨씬 효율적인 유동이 가능해질 터였다.
연우는 바로 여기서 착안해 남은 회로를 개척하고자 했다.
코어를 쉴 새 없이 맹렬하게 돌렸다. 마력은 끝없이 숨겨진 회로의 문을 두들겼고, 그러다 조금씩 길을 개척해 나갔다.
장애물을 부수고, 도로를 말끔하게 깔고, 너비를 확장시켰다.
처음에는 아주 까다로웠다.
없는 길을 개척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연우의 다른 의식은 줄곧 책자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길이 점차 닦이면서 진척 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여기에 새로운 지식이 축적되면서 마력 유동도 좀 더 강렬해져 회로 확장이 수월해졌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갑작스런 폭발이 일어났으니.
외뿔부족에서는 기경팔맥이라고 부르는 여덟 개의 중요회로 중 세 개가 열렸다. 십이경락으로 통 하는 대회로는 여섯 개, 나머지 기맥과 세맥으로 통하는 중회로와 소회로도 마찬가지로 차례대로 개통되었다.
그렇게 열린 마력회로는 전체 총량의 45%.
그러자 벌모세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면서 여태껏 방출시키지 못했던 남은 노폐물도 밖으로 배출되었다.
덕분에 두 시간 가까이 몸을 씻어야 했지만.
하지만 다시 무서고로 돌아왔을 때, 연우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육체를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사고 판단력도 좋아져 책자를 읽는 게 좀 더 수월해졌다. 마력의 운용도 편했으며, 스킬과의 연계도 보다 자연스러워졌다.
단순히 마력회로를 개통시킨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육체도 여기에 맞춰 전반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연우는 갑작스런 육체 변화로 생긴 허기를 샌드위치로 때우면서 남은 책자들을 마저 살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우를 살폈던 호위병들은 질린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에도라는 연우의 그런 옆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여전히 책에 고정 된 시선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리는, 끝나셨어요?”
“얼추.”
연우는 여전히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대답했다.
“얼추라면……?”
“95% 정도. 아직 5%가 모자라.”
“5%요?”
에도라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무리 기초 심법이라지만, 그래도 무공을 새롭게 제작하는 일이다.
그런데 단 3일 만에 거의 다 진척시켰다고?
그것도 그전까지 무공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없었던 사람이?
사실 에도라는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연우가 기초 개념에 대한 이해만 제대로 끝낸다면 다행이라고 여겼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게 무공이었으니까.
그래서 연우가 아버지의 숙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해도, 개념만 잡힌다면 추후에 얼마든지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아버지의 퀘스트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그저 동급 무서고를 열어 주기 위해서 꺼낸 배려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러다 도중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연우가 서적에 몰두를 하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연우에게서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을 더 크게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야 아버지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거의 완성되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연우는 이런 일에 되도 않는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뭐가 부족하신 건가요?”
“색깔.”
“……네?”
“보아하니 모든 무공에는 저마다 다른 특징이 있더군. 삼류든, 이류든 간에. 각자가 추구하는 목표가 있었어.”
에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의 말마따나, 무공은 종류만큼이나 성격도 천차만별이었으니까.
역근경은 그릇을 완성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삼재심법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들이려 하며, 천룡공은 용을 모방하여 내공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면 신공, 마공, 독공과 같은 것들이 나타나게 된다.
“현재까지 내가 만든 건, 아주 기초적인 것밖에 되지 않아.”
정확하게는 마력회로에 알맞은 심법이었지만. 굳이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 그래서.”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무공으로서 기능을 하려면 그만한 특징을 지녀야 하니까. 아직 그런 게 잡히질 않았어.”
에도라는 아주 잠깐 고민에 잠겼다.
심법은 시전자로 하여금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다. 그렇다면 과연 연우에게 어울릴 만한 특징은 뭐가 있을까?
“따로 생각해 둔 건 있으세요?”
“아직.”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제부터 다시 찾아봐야지.”
연우는 샌드위치를 마저 다 먹고, 읽던 책을 도로 제자리에 꽂아 넣으면서 말했다.
“동급 무서고에서.”
* * *
연우는 곧바로 동급 무서고로 향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단 하루.
그 안에 원하는 것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되도록이면 마력의 위력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종목이 좋겠지. 당장 나에게 유리한 속성을 생각해 본다면 화공이나 마공 계열일까?’
그동안 연우는 심법을 정립하면서 많은 부분에 대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여태껏 마력을 그저 단순한 ‘에너지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편견이 깨졌다.
단순히 스킬의 위력 증폭이나, 신체 강화에만 사용할 게 아니라 더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연우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로 다가왔다.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에게 있어 ‘마력’이라는 개념은 너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을 깨면서, 이제 새롭고 다양한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공뿐만이 아니야. 마법, 주술, 초능력, 정령술, 신성력…… 마력의 사용법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해.’
무공은 그저 마력을 이용한 수십 수백 가지 분야 중 단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들을 모두 다룰 수 있게 된다면. 그래서 마력의 근본, 그 자체를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가면 아래, 연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게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보통 플레이어라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나, 연우는 마력회로를 가지고 있다.
모든 종류의 마력을 품을 수 있는 용종의 맥(脈).
‘용종은…… 그래서 대단했던 거였어.’
연우는 새삼스레 마나의 축복을 타고 태어난 용종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 많은 분야들을 통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단지 의지만으로 법칙을 뒤틀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종족이 대체 어째서 멸망하게 된 걸까?’
연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기장에도 자세한 내용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자신도 마력회로를 갖고 있는 한, 언젠가 그 많은 업적들을 전부 다룰 수 있을 거란 것.
물론, 그만큼 마력회로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야 하고, 거기에 맞춰 수련도 꾸준히 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지식을 확장해 나가야겠지만.
그리고 남은 회로들도 마저 개척해야겠지만.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뭔들 못 할까?’
그리고 이건 그런 길로 나가기 위한 첫 단계의 열쇠.
그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동급 무서고를 크게 한 바퀴 돌며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 괜찮다 싶은 것들로만 뽑아서 갖고 왔다.
현재 연우의 보유 속성 중에서 가장 성취도가 높은 분야는 화 속성과 암 속성.
특히 화 속성은 피닉스와의 계약으로 더 깊어졌기 때문에 중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군.’
그렇게 연우가 간추린 무공은 의외로 아주 적었다.
총 네 가지.
〈육양공〉
〈역혈마공〉
〈뇌벽세〉
〈환야심법〉
육양공은 양기(陽氣)를 키우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1양에서 6양까지, 총 6단계에 걸쳐 마력의 열기를 높여 주변을 모두 불사를 수 있었다.
역혈마공은 마공(魔功)이라는 이름처럼 파괴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한 번 펼치고 나면 패널티로 잠시 마력이 텅 비는 허탈감을 가질 수 있지만, 그만큼 강한 힘이 매력적이었다.
뇌벽세도 마찬가지. 뇌 속성은 여러 속성 중에서 가장 파괴력이 있기로 유명했다. 화 속성과 상성도 잘 맞기 때문에 뽑았다.
연우는 육양공에서 역혈마공으로, 역혈마공에서 뇌벽세로 이어지는 순환 고리를 생각했다.
그 정도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과 얼추 맞아떨어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고른 환야심법은 기존 세 가지 심법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환야심법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성질도 음유(陰柔)한 편이라 부드럽고, 펼치더라도 크게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연우가 뽑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너무 강(强)·강·강으로 이어져 폭발할 위험이 있는 순환 고리를 부드럽게 이어 줄 만한 냉각 장치로서의 역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칠흑왕의 절망과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특히 사귀들과.’
음습한 기운을 풍겨 대는 사귀들에게 따로 망령의 구슬을 제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아할 만한 성질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연우는 다시 한 번 전투 의지를 통해 한없이 빨라진 사고 체계 속에서.
4개의 무공을 뜯고 조립하면서 마력회로에 녹여내고자 했다.
다행히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심법의 체계를 거의 갖춰둔 데다가, 확실하게 잡아 놓은 기준점과 목표도 있었으니까.
‘무왕.’
무왕의 눈가에서 봤던 짐승.
그것을 그대로 구현하고자 했다. 거기서 엿봤던 것만 따라가더라도 충분히 좋은 물건이 나올 것 같았다.
[‘기공’의 스킬 숙련도가 빠른 속도로 오릅니다. 11, 12…… 16, 17…… 20%…….]
[새로운 심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뤘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마력이 5만큼 올랐습니다.]
[‘마력회로’의 스킬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40.1%]
……
[마력이…….]
……
[새로운 심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름을 지정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됐다.’
드디어 약속했던 4일째의 날이 찾아왔다.
연우는 이름 지정을 묻는 메시지를 보면서.
여태껏 생각만 해 두고 가슴 속에 묻어 뒀던 이름을 붙였다.
‘천익기공.’
[‘기공’ 스킬의 이름이 ‘천익기공’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천익(天翼). 헤븐윙.
동생을 가리키던 옛 별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