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04화 (104/862)

4화. 서막 (2)

“내 힘?”

동생의 일기장 속에도 하이 랭커들의 실력에 대해서 적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연우는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가장 정점에 서 있다는 아홉 왕이 가진 실력을.

“거 참. 스승 노릇 한 번 하기 되게 힘들구만. 으음. 뭘 보여 줘야 좋을까?”

무왕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연우를 보면서도 짜증보다는 참 당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정도 열의는 있어야 가르칠 맛이 나겠지.

무왕은 이왕에 보여 줄 것, 아주 화려하고 강렬한 걸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는 한때 ‘걸어 다니는 무서고’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무공을 머릿속에 담고 있었고, 그중 대다수를 높은 수준까지 익혀 두고 있었다.

그러다 무왕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연우에게 전수할 무공이 팔극권이라면, 그중 한 가지를 보여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이런 거 잘 안 보여 주지만. 오늘은 특별히 싸게 내놓으니까 잘 봐 두라고. 팔극권의 비기 중 하나, ‘단천(天)’이다.”

무왕은 조금씩 자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순간, 그를 따라 흐르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가볍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면서 지면이 위아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쿠쿠-

연우의 시선이 단단히 고정되었다. 용마안으로 무왕의 모든 것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의 호흡, 마력 순환, 근육의 움직임, 동작의 각도까지. 자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게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때, 무왕에게 잠재되어 있던 짐승이 조금씩 밖으로 비집고 나왔다.

맹렬한 투기와 패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세상 한가운데.

무왕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그의 존재감이 거인처럼 커져 세상을 뒤덮었다.

에도라는 사색이 되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신마도를 뽑아 땅에다 꽂으면서 어떻게든 신체를 보호하고자 했다.

연우 역시 기세에 휘말려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마력회로가 맹렬하게 돌아갔지만, 균형을 잡는 게 고작이었다.

그사이에도 그의 시선은 무왕에게만 단단히 고정되었다. 무왕이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현상으로만 다가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여태껏 그냥 무왕을 보면서 느꼈던 것들 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신세계였다.

머릿속에 정립했던 개념들이 다시 한 번 폭죽처럼 터져 나가고, 새롭게 쌓이다가 다시 우르르 무너졌다.

무공, 그 자체를 넘어서는 힘. 무공의 완성을 이루고, 마력을 극한까지 단련한 자의 힘이 바로 저 앞에 있었다.

자신이 언젠가 다다라야만 하는 경지가 그곳에 있었다!

무왕은 손날을 바짝 세웠다. 마력이 잔뜩 응집되어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손날이 그대로 사선으로 그어져, 저 하늘 위에 걸린 태양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스걱!

하늘을 따라 길쭉한 단층이 생겨난다 싶더니 위와 아래가 그대로 어긋났다.

태양이…… 두 개로 갈라졌다.

“……!”

연우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현상에 두 눈을 부릅떴다. 에도라도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 없는 비명이 이어졌다.

쪼개진 태양은 곧 수십 개로 분열되어 아래로 우수수 쏟아지고, 밝았던 하늘에는 갑작스레 어둠이 내려앉았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잠겼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잠깐 이어졌다.

그러다 곧 거짓말처럼 하늘에 맺혔던 단층이 사라지고, 태양이 그 자리 그대로 나타나 세상은 다시 빛을 되찾았다.

불과 몇 초에 불과했던 어둠. 침묵과 적막.

순간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잠깐 빚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겪는 동안, 연우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저런 게…… 가능하다고?’

4일 만에 기공을 만들어 내면서 이제 어느 정도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도무지 따라잡을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실력 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격차가 너무 커서, 용마안으로도 어떻게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후우! 간만에 힘 좀 썼더니 어깨가 좀 뻐근하네. 하여간 잘 봤지?”

무왕은 오른쪽 어깨를 뱅글뱅글 돌리면서 씩 웃었다.

“출정은 오늘 밤에 있을 예정이니까 시간 늦지 않게 잘 맞춰서 오고. 에도라, 너는 얘 밥 좀 먹여라. 저래서는 비실비실해 보여서 남들한테 무시당하기 십상이라고. 알겠지? 그럼 난 바빠서 먼저 간다.”

무왕은 두 사람에게 충격적인 모습만 던져 준 채,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연우가 정신을 차린 건 한참 뒤였다.

‘언젠간.’

꽉 쥔 주먹에 힘이 잔뜩 실렸다. 핏대가 서면서 새로운 열망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언젠가는 넘어서고 만다.’

연우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넘어야 하는 목표점이 생겼다.

* * *

“으윽. 골로 갈 뻔했네.”

연우와 에도라가 보이지 않는 자리.

무왕은 혼자만 남았다 싶자,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주물럭거렸다.

간만에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려서 그런지 근육 손상이 꽤 심했다.

『그러게, 누가 잘난 척하래? 괜히 똥폼 잡는답시고 무리하니까 그러지. 지금 장로님들, 당신 찾는다고 난리도 아냐. 다른 클랜들에게서 항의가 곧 쏟아질 건데, 제정신이냐는데?』

영매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에이. 그래도 마누라, 자식이 보는 앞인데. 약한 모습 보여 주면 안 되잖아?”

그러면서 피식 웃었다.

“게다가 원래 스승이라는 존재는 도저히 넘볼 수 없을 것 같은 장벽이자 목표가 되어야, 제자가 그만큼 열의를 가진다고.”

『그러다 의욕이 꺾여 버리면?』

“뭐, 그럼 그것밖에 그릇이 안 되는 놈인 거지.”

어딘지 모르게 차갑게도 느껴지는 말투였다.

『하여간. 그래서 어때? 만족해? 원래 이런 것까지는 안 하려고 했잖아?』

“만족은 처음부터 했지.”

『그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굴려 볼까 봐. 검무신, 그 녀석도 30일이나 걸렸던 시험을 단 4일 만에 통과한 놈이야. 당연히 그만큼 더 열과 성을 다해서 가르쳐야 형평성이 맞지 않겠어?”

실실 웃는 무왕의 모습에서는 벌써부터 들뜬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제자 출신 두 명이 한데 만나게 된다면, 그것도 재미난 그림이 될 것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이번 전쟁 동안에는 참 재미난 일이 많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리고, 밤이 되었다.

무왕이 선언했던 참전의 밤.

이미 외뿔부족 마을의 중앙 공터에는 전투에 참여하기로 한 부족원들이 나와 있었다.

무왕을 따라 참전을 선언한 가문은 총 21개. 각 가문은 적게는 열 명에서, 많게는 백 명까지 보낸 상태였다.

그렇게 해서 모인 인력이 총 500여 명.

애초 이번 출전은 강제 사항이 아닌 자원자들만 받았기 때문에 인원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전사’의 호칭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들.

덕분에 인원은 적어도 풍기는 위세는 수만 명이 모여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벌했다.

연우는 그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는 다른 아홉 명의 식객들 틈에 섞여 무왕의 연설을 가만히 지켜봤다.

“간만에 밖에 나서려니 살 떨리지? 다들 쫄아서 바지 지리지 마라. 내가 그런 놈 있나 없나 제대로 확인할 거야. 알겠냐?”

무왕은 경망스런 태도만큼이나, 출정식이랍시고 내뱉는 말들도 전부 농담으로 가득했다.

“하! 왕이나 쪽팔리게 어디 얻어 맞고 굴러다니지 마십쇼. 그랬다 가는 확 왕 바꿔 버릴 거니까.”

“으흐흐. 그것도 참 볼 만하겠는데?”

“잠깐. 그럼 더 좋은 거 아냐? 저 뻔뻔한 낯짝이 구겨지는 거 볼 수 있는데?”

전사들도 덩달아 유쾌하게 낄낄거리기 바빴다.

연우는 그 모습들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뿔부족이 여태껏 최강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여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그들은 절대 자신들이 질 거라고 생각지 않고 있었고, 눈빛에는 지도자인 무왕에 대한 신뢰가 가득했다.

“하여간. 아무도 죽지 마라. 죽는 놈은, 쪽팔리게 내가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멱살 잡아다가 끄집어 올릴 테니까. 알아들었냐?”

“예!”

“예!”

“그럼 가자. 맘껏 놀 시간이다.”

무왕의 외침에 따라, 전사들은 일제히 자신들에게 미리 주어졌던 티켓을 찢었다.

11층으로 이동하는 티켓. 푸른 포탈을 따라 사라지는 그들을 보면서.

연우도 자신의 티켓을 힘껏 찢었다. 가면 아래로 두 개의 안광이 도깨비불처럼 타올랐다.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

두 곳의 전쟁이 서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 * *

[이곳은 11층, 꿈 속 세계의 관입니다.]

메시지가 떠오르기 무섭게 연우와 외뿔부족은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타트존에서부터 도시 쿠람까지. 쉬지 않고 일직선으로 관통할 예정이었다.

주변은 해가 져서 캄캄했다.

달빛만이 그들의 앞길을 비출 따름이었다.

“이렇게 같이 다니게 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나누는 건 어떻겠나? 나, 사일론일세.”

그때, 묵묵히 외뿔부족을 따라 달리던 연우 옆으로 큼지막한 뭔가가 다가왔다.

미성(美聲)에 어울리지 않게 연우의 머리보다도 높게 치솟은 망치.

그 아래에는 드워프 헤노바보다도 더 작은 키를 가진 하플링이 씩 웃고 있었다.

사일론.

노래하는 망치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랭커였다.

한때 작은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무지막지한 완력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자.

갑자기 실종되어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샀던 그는 외뿔부족의 식객으로 앉아, 식객들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생긴 건 정말 아이처럼 생겼군.’

하플링과 드워프는 비슷한 체구를 가졌지만, 흔히 얼굴 생김새를 보고 구분을 짓는 편이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져 힘을 잘 쓰는 드워프와 다르게 하플링은 앳된 아이 같은 모습을 가진다.

가녀린 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래로 유명하기도 했다.

사일론도 마찬가지.

겉으로는 순진무구한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속내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익장이었다.

“카인.”

연우는 사일론을 슬쩍 보고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

사일론은 그런 연우를 보면서 살짝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 되었다.

새로운 식객으로 온 사람이 최근에 한창 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독식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사일론은 이미 탑에 대해 관심을 거둔 지 아주 오래되었으니까.

하지만 연우가 무왕의 새로운 제자가 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달랐다.

‘저 시건방진 무왕이, 새로운 녀석을 제자로?’

사일론이 여태껏 식객으로 머물며 본 무왕의 제자는 둘.

하나는 아홉 왕에 오른 검무신이었고, 다른 하나도 그에 못지않은 실력자였다.

무왕이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의 눈에 띈 자들은 뭔가 범상치 않은 자질을 가졌단 뜻이었다.

그래서 사일론은 무왕이 대체 무엇을 본 건지 궁금했다.

‘이깟 애송이가 나보다 나은 점. 분명 뭔가가 있을 테지.’

그리고 그 호기심 속에는 질투심도 섞여 있었다.

사일론은 무왕의 무위에 반해 외뿔부족의 식객으로 들어온 케이스. 당연히 무왕의 힘을 배우고자 했지만, 여태껏 그런 행운을 얻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이름만 덜렁 말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건방진 태도. 사일론의 한쪽 눈썹이 크게 들썩거렸다. 무왕과는 다른 방면으로 자신의 속을 긁는 녀석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검무신이나 다른 제자도 이와 비슷했으니. 싸가지가 없는 건 유유상종인 걸까.

랭커가 된 이후로는 이런 태도를 겪어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사일론은 치미는 화를 꾹 눌렀다.

이제 갓 탑을 오르기 시작한 녀석이니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 웃었다.

“음. 이거 아무래도 젊은 친구가 너무 말도 없고 무뚝뚝하구만. 아직 다른 식객들과도 인사 덜 나눴나? 사실 자네를 위해서 축하 인사라도 해 주려 했는데, 자네가 나흘 넘게 들어오질 않아서 말이야.”

사일론은 같은 식객으로서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할 생각이었다. 연우를 옆에 계속 두다 보면 뭔가가 보일 거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카인! 앞으로 와 봐!”

저 앞에서 먼저 달리고 있던 무왕이 연우를 불렀다.

연우는 사일론에게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인사를 마무리하고, 획 하고 무왕에게로 달려 나갔다.

사일론은 도중에 멈춰서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걸음이 멎은 것이다.

“괜찮습니까?”

뒤에 조용히 따라오던 트라비아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 생김새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언뜻 보이는 거뭇거뭇한 검버섯과 주름이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사일론과 마찬가지로 식객으로 머무는 중인 랭커. 전격술사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다.

“괜찮긴. 무왕 같은 놈들은 죄다 저 모양인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애초 다들 사회성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아 볼 수 없는 작자들이었잖습니까?”

트라비아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용병 기간 내내 옆에서 무왕이 가르친다고 합디다. 그럼 뭔가라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간.”

사일론의 눈이 짜증으로 번들거렸다.

“이번에 활약하는 걸 한 번 보자고. 저딴 시건방진 태도를 가질 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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