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08화 (108/862)

8화. 서막 (6)

세미 랭커.

랭커에 도전하는 실력자들.

랭커(Ranker)란, 쉽게 말하면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 중 강한 순서대로 순번을 매겨 고른 이들을 뜻하는 것이었고.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50층대를 오르기 시작한 자들을 의미했다.

하지만 50층은 결코 쉽게 넘볼 수 있는 층계가 아니었다.

이전 49개의 층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난이도를 자랑했다.

강하다고 알려진 숱한 플레이어들조차도 고배를 마셔야 하거나 쓰러지고 마는 자리.

통칭, 마(魔)의 지대.

그렇기에 랭커는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의 지대를 넘보고자 하는 49층의 플레이어들을 일컬어 보통 이렇게 불렀다.

도전자, 혹은 세미 랭커.

현재까지 개척된 층계는 모두 77개.

이중에서 가장 많은 거주민과 공략자들을 보유한 곳을 꼽으라고 한다면, 딱 두 곳을 말할 수 있었다.

1층과 49층.

이유는 간단했다.

갓 튜토리얼을 통과했지만 탑의 높은 장벽에 부딪치는 첫 번째 관문이 1층이었고.

그 전까지 승승장구했지만, 그보다 더한 고난을 요구하는 마의 장벽 때문에 번번이 가로막히고 마는 곳이 49층이었기 때문이었다.

49층의 거류자들은 어떻게든 시련을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단 1개의 층계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는 천지 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대다수가 번번이 공략에 실패를 했고, 아주 운이 좋은 자들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서 50층 이후부터 걷기 시작한 랭커들은 49층의 플레이어들을 비웃으면서 이렇게 불렀다.

낙오자, 라고.

결국 마지막 하나를 넘지 못해 가로막힌 멍청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49층의 거주민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히 다음 차례를 노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위 층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

하위 층계와 중간 층계에서 봤을 때는 49층만 해도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마의 지대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해지고자 부단히 노력을 했을 테니까.

그래서 아래 층계의 플레이어들은 49층의 거주민들을 경외하는 뜻에서 전혀 다르게 불렀다.

세미 랭커.

랭커가 되고자 꿈을 꾸는 실력자들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미 랭커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힘을 품고 있었다. 몇몇은 진짜 랭커를 능가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세미 랭커가 바로 눈앞에 있다고 한다.

연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해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이런 상황에서 부딪치라니.

죽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재미있어.’

연우는 이상하게 더 큰 전의(戰意)를 느꼈다.

웃음이 나왔다. 헛웃음이 아니었다. 즐거움에서 저절로 나오는 웃음이었다.

연우는 혼자서 8대 클랜을 꺾고자 한다. 그렇다면 더 큰 힘을 얻어야 하고, 언젠가 랭커들도 발아래에 둬야만 한다.

아니, 그 이상을 넘어 하이 랭커(High Ranker)며 아홉 왕까지도 따라잡아야만 한다.

무왕 급은. 최소한 그만큼은 따라잡아야 본격적으로 복수를 제대로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런 뜻에서 세미 랭커와의 싸움은.

‘보다 빠르게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이야.’

연우는 이미 앞선 네 번의 생사 대련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었다.

군더더기는 모두 버렸다.

천익신공과 팔극권의 연결 고리를 확실하게 채웠다. 결의 사용법을 터득했고, 코어의 강약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화력의 세기나 범위 조절도 가능해졌다.

극한까지 내몰리면서,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고, 미처 보지 못했던 약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왕도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이겠지.

계속 연우를 한계까지 몰아가 부족한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고, 그것을 고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물론,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목숨이 위험해지겠지만.

‘이미 내 목숨이야 이곳에 들어 올 때부터 버려두고 왔으니까. 염두에 둘 건 전혀 없지.’

무왕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여태 연우가 본 무왕은 어느 구석에서는 아주 차가웠으니까.

연우는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검은 팔찌가 살짝 울리면서 먼저 죽은 네 플레이어의 영혼을 컬렉션에 귀속시켰다.

‘일단 챙길 건 챙기고.’

이만한 플레이어의 영혼은 쉽게 구하기 힘들다. 사귀로 만든다면 괜찮을 터였다.

‘다시 싸운다.’

우우웅-

연우는 다시 한 번 마력회로를 최대로 출력시켰다. 효율성이 좋아진 덕분에 체력은 방전될지언정, 마력이 마를 걱정은 거의 없었다.

풍부한 마력이 전신을 지배했다. 피로를 억지로 쫓아내면서 육체에 강한 힘을 실었다.

그리고 용마안과 전투 의지를 동시에 발동시키면서 자세를 갖췄다.

이제는 몸에 익숙하다시피 한 동작.

팔극권(上)은 15.2%, 천익기공은 31.2%까지 숙련도가 올랐다. 초식은 이제 본능에 단단히 각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세가 흐트러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샤논도 연우가 마지막 남은 기력을 쥐어짠다는 것을 알고 칼을 세게 움켜쥐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간에, 죽을힘을 다해 덤비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여태껏 샤논이 봤던 연우는 그런 자였다.

피에 젖은 짐승.

지쳐 있어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그러면서도 이빨을 잔뜩 드러 내면서 으르렁거리는 맹수였다.

샤논은 칼을 곧바로 세웠다. 그의 애병은 날이 톱니처럼 우둘투둘한 소드 브레이커. 상어 이빨처럼 나 있는 톱니 사이로 오러가 잔뜩 응집되었다.

대련에 들어가기 전에.

샤논은 연우를 보면서 고요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나?”

“뭐지?”

“승패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수하들은 살려 줬으면 좋겠어.”

“뭐?”

연우는 뜻밖의 부탁에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여태껏 많은 플레이어나 클랜들과 부딪쳐 봤지만, 이런 부탁을 하는 녀석은 처음이었으니까.

모두가 자기 목숨만 귀중한 줄 알 뿐, 동료를 챙기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샤논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무왕에게 끌려오는 내내 미처 수하들을 챙길 생각을 하지 못했거든. 방금 전에 생각나서 말이야. 아무리 적으로 만났다지만, 그래도 투항을 한 자들까지 전부 죽일 만큼 아량이 없는 건 아니겠지?”

연우는 샤논의 속내를 읽었다.

‘죽기를, 작정했어.’

이상한 일이었다.

누가 봐도 지금의 상황은 샤논이 훨씬 유리할 텐데도 불구하고. 왜 저런 생각을 하는 걸까.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샤논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잔뜩 드러내고 있었다.

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면서, 그를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공격을 파훼할 방법을 찾고 있는 게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절반은 놓았고, 절반은 호승심에 걸었다.

대체 그 짧은 사이 심리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연우는 오히려 더 무거워진 분위기를 느꼈다.

마치 단단한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단번에 부순다.’

연우는 화력을 잔뜩 키웠다. 체력은 바닥이 났으니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화아악-

불꽃으로 이뤄진 날개가 더 크고 높이 타올랐다. 연우는 날개를 접어 몸을 칭칭 감으면서 땅을 거세게 박찼다.

콰콰콰-

들끓는 열기가 휘몰아치면서 불로 이뤄진 해일처럼 샤논을 덮쳤다.

샤논은 소드 브레이커를 옆으로 크게 확 하고 젖혔다. 그러자 일어난 광풍이 불꽃을 옆으로 크게 떠밀어 냈다.

연우는 마력을 발바닥에 있는 코어 쪽으로 몰아넣으면서 허공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옆으로 틀면서 역수로 쥔 크라슈나의 단검으로 샤논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여기에 샤논은 오러를 흩뿌리는 것으로 응대했다.

콰르릉!

오러가 폭죽처럼 잇달아 터지면서 공세를 막아 냈다. 오히려 쓰나미처럼 덮쳐 연우를 찢어 놓으려 했고, 연우는 여기에 다시 불길을 키우는 것으로 응대하면서 밀려오는 오러를 도중에 가로막았다.

콰아앙-

연우는 허공에서 크게 튕겨 났다. 하지만 제비 돌기를 하면서 다시 접근을 시도, 팔극권의 연계 초식을 잇달아 풀어냈다.

샤논은 동작을 크게 하면서 소드 브레이커를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가시처럼 잘게 돋은 오러 파편이 퍼져 나가면서 거듭 충돌이 일어났다.

연우와 샤논. 둘은 절대 서로 밀리지 않기 위한 팽팽한 접전을 계속 이어 나갔다.

연우는 거칠었다. 마치 크기 작은 맹수가 덩치 큰 코끼리를 잡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달려들 듯, 끊임없이 발톱을 휘두르고 이빨로 내리찍었다.

자신이 이리저리 채이면서 피투성이가 되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반면에 샤논은 단단했다. 크고 강하게 오러를 뿌려 대면서 연우를 힘으로 압박하고자 했다.

연우가 샤논을 부수기 위해, 허점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여도 그때마다 단단한 장벽을 만날 수밖에 없었다.

순간, 연우는 왜 상대가 ‘세미 랭커’라고 불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자신과는 정말이지 ‘격’, 그 자체가 달랐다.

아무리 약점을 찾아내려고 탐색을 해 봐도, 녀석은 절대 허점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연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나면 밀려날수록, 36개의 코어를 쉼 없이 회전시켜 마력회로의 최대 출력을 끌어냈다.

덕분에 마력회로가 과부하되어 위험하다고 경고를 해 댔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

비그리드나 검은 팔찌, 아이기스 같은 아티팩트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자신의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싸움.

다른 변수를 넣고 싶지 않았다.

설사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하더라도.

쾅-

쾅-

칼을 휘두를 때마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불똥이 튀었다. 강한 힘으로 튕겨난 반발력 때문에 입가에서 핏물이 번져 나왔지만, 도로 삼켰다.

눈가에 핏대가 잔뜩 선 채로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용마안 사이로 결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결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키다가 한쪽 지점에 응어리졌다.

‘왼쪽 팔뚝 위!’

처음으로 드러난 약점.

연우는 혹시 응어리가 사라질까 싶어, 가차 없이 그곳에다 마장대 검을 쑤셔 넣었다.

마력을 잔뜩 실은 덕분인지, 36개의 코어가 맹렬하게 회전하는 소리가 귓가를 왱왱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쉭!

‘뭐지?’

마장대검이 작렬한 순간.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왼쪽 팔뚝이 사라졌다.

마치 허깨비처럼.

‘허깨비?’

순간 든 생각에 아차 싶어 몸을 옆으로 틀었다. 하지만 이미 샤논의 소드 브레이크가 뒤쪽에서부터 그의 목덜미로 내려쳐지고 있었다.

콰르르릉!

벼락처럼 내려친 일격. 오러가 잔뜩 실린 채로 폭발해 연우는 단번에 튕겨 나고 말았다.

가까스로 불의 날개를 키워 치명타는 어떻게 피할 수 있었지만, 반발력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몸이 실 끊어진 연처럼 튕겨 났다.

연우는 허공에서 몸을 뒤틀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 착지했다. 그러고도 반탄력을 모두 소화하지 못해 한없이 뒤로 떠밀리고 말았다.

그가 지나간 자리로 짙은 고랑이 남았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핏대가 선 두 눈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결을 찔렀을 텐데?

어떻게 갑자기 사라질 수가 있는 거지?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머리 뒤 쪽으로 던져뒀다.

자신이 잘못 판단했겠거니, 뭔가 놓친 게 있겠거니, 하고 여기면서 용마안에 비치는 결을 따라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남은 체력이 얼마 없었다.

다시 부딪쳤고, 결이 보였다. 이번에는 두 개. 다시 전력을 다해 찔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콰콰쾅!

결의 응어리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대신에 그 위로 오러 파편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큽!”

예민하게 달아오른 감각은 연우를 위험으로부터 피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등이 죄다 갈려 나갔다.

상대의 허점을 노리려다가 도리어 자신의 허점만 만들어 준 꼴. 이가 악물렸다.

‘뭐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연우는 이제 더 이상 섣불리 샤논에게 덤비지 않고 멀찍이 간격을 벌렸다.

썩은 단내가 입가와 코끝을 괴롭혔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저 바로 앞.

샤논은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장벽처럼. 꼿꼿하게.

그리고 용마안에 비치는 샤논은 좀 전과 달리 수십 개의 결 응어리에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저기에 현혹되지 말라고.

넘어가는 순간 너는 끝장난다고.

이번에 녀석에게 휘말린다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을 거란 위기감이 들었다.

‘대체 뭐지? 이건?’

여태껏 결을 노려서 실패해 본 적이 없었기에. 연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가슴 위에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갑갑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그런데.

“그렇군.”

샤논은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넌, 허초를 모르는구나.”

허초?

처음 듣는 단어에 연우는 살짝 눈살을 좁혔다. 여전히 칼을 세우고 있지만, 머릿속은 여러 계산으로 복잡하게 엉켰다.

“하지만 어떻게 허초를 모를 수가 있지? 보통 이런 건 무예에 갓 입문한 초짜들이나 겪는 실수일 텐데?”

샤논은 살짝 의문을 드러냈다.

그가 봤을 때 연우가 여태껏 보였던 공격과 투로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무술을 단련한 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솜씨였으니까.

이제 무술에 입문한 지 닷새밖에 되지 않은 초짜라고는 절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허초를 간파할 수 없다면. 결국 살아남는 건 나일 테니까.”

하지만 샤논은 의문을 바로 던져버렸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간에 그는 연우의 약점을 찾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져 목을 날려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가지.”

쐐애액-

샤논이 빠르게 움직였다. 여태껏 보였던 묵직하고 탄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

날렵했다.

그리고 매서웠다.

연우는 알 수 있었다.

여태껏 샤논이 보여 준 행동들은. 사실 그의 약점을 간파하기 위해서 탐색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눈 깜짝할 새 칼날이 나타나 목으로 치닫고 있었다. 피하기는 늦었다. 몸을 옆으로 틀면서 화력을 최대로 키워 투로를 가로막았다.

채앵!

다행히 칼날이 폭발과 함께 튕겨 났다. 하지만 칼날은 도중에 방향을 꺾으며 허리를 쓸어 왔고, 이번에는 마장대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그런데 녀석의 칼날이 달려오던 중에 갑자기 사라졌다. 마장대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아무렇게나 갈랐다.

연우의 눈이 커졌다. 위기감이 들었다. 허초. 방금 전과 똑같은 현상이었다.

찌릿.

뒤통수가 따끔해졌다. 재빨리 용마안을 그쪽으로 돌리니 칼날이 바로 미간 앞까지 닿아 있었다.

단 한 가지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죽는다.’

이대로는.

[전투 의지]

과부하가 걸린 마력회로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사고 속도는 그것보다 더 빠르게 돌아갔다.

뇌가 타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끔찍한 두통이 뒤따랐다.

그렇게.

한없이 느려진 세상 속에서. 칼날이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연우는 사고 속도를 극한까지 쥐어짰다.

어떻게든 지금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고민은 어려우니, 질문과 응답을 빠르게 오고 가야만 했다.

피할 방법은?

없다.

막을 방법은?

없다.

최소한의 피해로 끝낼 방법은?

역시…… 없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대답은 단 하나였다.

없다.

해결책 따위는 없었다. 길이 도무지 보이질 않았다.

수많은 상황을 가정하고 판단을 내려도, 결국 그 끝에 보이는 결과는 단 하나.

미간을 가르고 지나가는 칼날. 부서지는 머리와 꺼지는 의식이었다.

운이 좋게 어떻게 막아 낸다고 해도, 그 뒤를 따를 연계 공격에 몸이 수십 갈래로 찢겨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연우는 다시 한 번 절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마력회로를 변화시키고, 무공을 단련하며 더 큰 힘을 손에 넣었어도 아직 부족하다고.

자신은 약했다.

한없이.

세미 랭커와 자신의 격차는 아직도 컸고, 그 틈새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샤논이 친 덫은 그를 꽁꽁 에워싸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사고 끝에 있을 결과는, 죽음. 패배뿐.

그래서.

연우는 생각을 뒤집었다.

여기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근원으로 올라가 다른 방향으로 길을 찾아야만 했다.

무왕. 그는 자신에게 세미 랭커와 부딪치라는 새로운 시험을 냈다. 심법을 만들어 보라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힘겨운 시험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내어 준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죽으라고?

아니.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무왕이 하는 행동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있어도, 일리가 없는 행동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 시험에도 자신이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거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러다 연우는 떠올렸다.

무왕은 분명히 그에게 말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갖고 덤비라고.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그리고 연우 또한 생각했다. 무공은 결국 자신이 가지고, 가져야만 하는 여러 힘 중 하나. 수단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에서 찾으면 될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연우는 한 곳에 생각이 닿았다. 용마안, 감각 강화, 전투 의지 등 수많은 스킬들을 사용했지만, 아직까지 꺼내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 순간, 사고 가속이 거짓말처럼 끝났다.

칼날이 연우의 미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의식이 아래로 푹 꺼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남은 스킬이 발동 된 뒤였다.

[시간 예지]

남은 마력을 모두 쥐어짜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 일격을 먹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스킬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퍼어억-

연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소드 브레이커의 거친 톱니는 연우의 오른쪽 가슴을 깊숙하게 관통하고 있었다.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육체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다. 텅 비어 버린 마력회로는 너무 과열되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연우가 되돌린 시간은 불과 2초.

하지만 덕분에 의식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살 수만 있다면 반격은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샤논은 연우의 가슴에 칼날을 박은 상태에서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지, 이건? 분명히 넌 죽었을 텐데?”

“몰라도 돼.”

연우는 그런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으면서 몸을 억지로 뒤틀었다.

콰드득.

소드 브레이커도 같이 딸려오면서 샤논이 살짝 주춤거렸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라슈나의 단검을 녀석의 목에다 박았다.

쾅!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