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09화 (109/862)

9화. 서막 (7)

쿨럭!

샤논의 입가를 따라 핏물이 잔뜩 배어 나왔다.

아무리 뛰어난 플레이어라고 해도, 언데드가 아닌 이상에는 목이 찢어지고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웃어?’

샤논은 웃고 있었다.

힘이 쭉 빠져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지만, 녀석은 분명히 연우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수…… 하들은 살았……!”

눈가로 안도감이 스친다.

연우는 그런 샤논을 보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거북함을 느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죽는 게 두렵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여기 오기 전…… 에 살고 싶어서 발버둥을 쳤었…… 는데.”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생각…… 이 들더라고. 너……를 챙기는 무왕을 보니…… 버려두고…… 온 녀석들…… 이 눈…… 에 밟혀서. 부…… 끄러워지더라고. 그래도 명색이…… 리더인데.”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거북함이 들었던 이유.

샤논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남은 수하들이라도 살리고 싶어 했다.

이긴다면 자신이 살아남아 수하들을 이끌면 된다. 죽더라도 했던 약속이 있으니 수하들은 살릴 수 있다.

애초 자신의 목숨에는 크게 애착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니, 그의 말이 맞는다면 처음에는 미련을 가졌지만, 뒤늦게 남아 있을 수하들에게 생각이 미쳐 생각을 바꿨다는 뜻이었다.

아마 자신만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게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진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습은 동생이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동생은 애초 서로 살겠다면서 배신했던 자들 때문에 그런 고초를 겪어야만 했으니까.

만약 동생에게도 샤논 같은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샤논은 그렇게 웃는 낯을 하면서 쓰러졌다. 살짝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어뜨린다.

바닥에 쏟아진 핏물이 웅덩이를 그리면서 잔뜩 퍼져 나갔다.

연우는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천천히 샤논에게서 떨어졌다.

긴장이 탁 하고 풀리면서 피로가 잔뜩 몰려왔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육체 전체로 퍼져 나갔다.

과열된 코어와 텅 비어 버린 마력회로. 딱딱해지다 못해 비틀어진 근육까지.

평범한 마력 통로였다면 일찌감치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용종이

남긴 마력회로였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거였다.

“오라버니.”

에도라가 다급하게 달려와 연우를 부축했다. 그녀는 노심초사한 얼굴로 연우의 싸움을 내내 지켜보다가, 이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뒤따라온 판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또 괴물이 더 큰 괴물이 되었어’라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럴 만도 했다.

세미 랭커를 이겼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판트는 알고 있었다.

사실 연우가 정작 가장 중요한 패는 숨겨 두고 있었다는 것을.

튜토리얼의 G구획과 1층에서 선보였던 검은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게다가 초심자 구획을 통과하면서 얻었을 아티팩트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고도 세미 랭커와 대등한 싸움을 보인 것이다.

“수고했다. 제법 볼만했어. 보기보다 제법 싸울 줄도 알고?”

연우는 무왕이 던진 병을 받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따라 시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곧 몸이 따뜻해지면서 고통이 빠르게 가셨다. 마력회로에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마력이 차올랐다. 포션인 것 같았다.

연우는 조금 움직일 만해지자 무왕을 돌아봤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허초가 무엇입니까?”

연우는 분명히 결을 찔렀다.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찔렀던 지점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대신에 다른 곳에서 실물이 나타났다.

때문에 샤논을 상대하는 데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어떤 게 진짜고 거짓인지, 도무지 분간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페이크(Fake).”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페이크 모션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아니. 본질적으로는 같다. 다만, 그게 ‘실’이 되느냐, ‘허’가 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

연우의 눈빛에 의문이 담겼다.

무왕은 뭐라고 설명을 해 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훨씬 편하겠군. 죽은 이 녀석의 칼이 너에게 닿으려 할 때. 그때, 칼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지. 바로 공격용으로 쓸 건지, 아니면 반격용으로 쓸 건지, 방어용도 될 수 있을 테고. 그중에서도 다른 연계기로도 이어질 수 있고, 칼을 완전히 거둘 수도 있어. 그렇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때의 여러 ‘가능성’ 중에서.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하지? 기준이 따로 있나?”

“그거야 상황에 맞는…….”

“그렇지. 상황에 맞게. 본능, 혹은, 빠른 판단을 통해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를 택하지. 그런데 허초는 여기에다 한 가지 내지 두 가지의 가능성을 더 추가한다.”

연우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덫.”

“그렇게 봐도 무방해. 걸린다면 취소하고 다른 가능성을 선택해서 공격하면 되고. 걸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직행하면 되지. 허초란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이다.”

“……가능성.”

연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 예지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시간 예지는 빠른 연산 능력을 통해 상대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미리 예측을 한다.

하지만 허초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패를 꺼내 놓고서 상황에 맞게 원하는 것을 꺼내는 방식이다.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가능하니 하겠지?”

“…….”

“뭐, 웃자고 한 소리고. 사실 쉬운 일은 아니지. 칼 한 번 휘두를 때에도 여러 투로를 사전에 그렸다가 버리고, 또 다른 공격으로 이어질 때에도 여러 투로를 그렸다가 버리기를 반복해야 하니까. 잘못하면 뇌가 엉켜 버릴걸? 그래서 쉽게 할 수 있는 짓은 못 돼.”

무왕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공격 방법도 없지. 하지만 이건 기(技)를 극한까지 단련한 자들만 해낼 수 있는 것. 이제 팔극권에 갓 입문한 너는 힘들어. 그리고 사실 허초가 완벽한 것도 아니야.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 ‘육감’이 발달한다면 어느 정도 간파도 쉬워지고.”

연우는 샤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째서 허초를 모르는지 모르겠다던 투.

그건 연우가 보였던 숙련도에 비해 무술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대련 덕분에 연우는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두 가지 찾을 수가 있었다.

허초와 육감.

‘허초는 가능성을 여럿 품는 힘이다. 기를 극한까지 단련해서 나도 손에 넣어야 해. 그리고 반대로…… 육감도 터득해야만 한다. 그래야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바로 간파해서 대처할 수가 있어.’

보아하니 두 가지 모두 단순히 스킬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극한까지 육체적 기량을 단련하여야만 겨우 얻을 수 있는 것들. 용마안과 감각 강화로도 소화할 수 없는 영역의 것들이었다.

‘결국 단련에 단련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는 거군.’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샤논이 보였던 예리한 감각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리 좋은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육체적 기량이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에 불과하다.

최대한 육체를 극한까지 내몰아 한계를 몇 번이고 뛰어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얼마 남지 않은 계승 작업도 끝내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버거울 만도 했지만 당장 눈앞에 주어진 이정표가 확실하고,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사실이 기분을 흡족케 했다.

‘재능이 없다면. 노력이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겠지.’

연우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손을 살짝 뻗어 흩어지려던 샤논의 영혼을 컬렉션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따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저, 그리고 스승님.”

연우는 에도라의 부축을 받으면서 무왕을 돌아봤다.

무왕은 안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나도 얼빠진 놈들 때릴 정도로 악랄한 놈은 아니거든? 걱정 마라.”

죽는 샤논의 수하들은 내버려 두겠다는 의미였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만에 힘을 너무 많이 빼서 그런지 빨리 쉬고 싶었다.

그렇게.

쿠람에서의 공방전,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첫 전투가 끝났다.

* * *

도시 쿠람에서의 소식은 탑 전체로 퍼져 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생각지 못한 외뿔부족의 참전.

특히 무왕이 주먹 한 번이 도시의 절반을 쓸어버렸다는 소식은 듣는 이로 하여금 기함을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 소문이 퍼지는 것에 맞춰 청화도가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레드 드래곤이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에 11층을 석권하겠다는 듯, 전투 부대를 아낌없이 밀어 넣어 단번에 여러 도시들을 빠르게 함락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레드 드래곤이 파견했거나, 산하에 있던 클랜들은 연신 패퇴를 겪으면서 구석까지 내몰리고 말았으니.

이에 레드 드래곤도 더 이상 이렇게 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11층 따위야 버리려면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너무 허망하게 물러나는 건 그들의 자존심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다른 소식도 퍼져 나갔다.

세미 랭커였던 샤논을 비롯해 조장급 인사 5명이 독식자와 칼을 겨루다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

상층부에서는 별반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일반 플레이어들에게는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소문만 무성하던 독식자가 사실은 너무 말도 안 되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외뿔부족의 식객으로 있다는 것도 촉각을 곤두세우기 충분한 소식이었다.

그렇게.

11층에서 시작된 전화는 빠르게 퍼져 나갔다.

* * *

“청화도 녀석들. 지금쯤 아주 좋아 죽으려 할 것 같은데.”

바할은 플레임 비스트의 단장이 건넨 보고서를 보고 쓰게 웃었다.

외뿔부족을 등에 업고 단 하루 사이에 청화도가 차지한 11층의 구획은 전체의 80%.

이만하면 11층이 통째로 청화도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상층부에서는 그런 꼴을 보지 못했다.

드래곤은 포악하다. 욕심이 많으며, 절대 패배를 모른다.

그런 이름을 가진 레드 드래곤으로서는 한낱 청화도에게 조금이라도 밀리는 게 자존심이 상해 미칠 지경인 것이다.

특히 클랜장인 여름여왕이 가장 크게 화를 냈으니.

이해득실을 따져서 이익이 되는 쪽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바할로서는, 도저히 납득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여왕이 까라면 그냥 까야겠지.’

바할은 쓰게 웃었다. 리언트를 사냥하려던 것에 이어 그는 이번에는 11층에서의 총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리언트를 놓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마무리를 지으라는 이유에서였다.

그에게 떨어진 임무는 아주 당연하고, 간단했다.

11층의 ‘완벽한’ 탈환.

그냥 탈환하는 걸로는 부족했다. 압승을 거두어서 청화도와 외뿔부족이 11층에 두 번 다시는 발도 못 붙이게 하라는 명령이었다.

저곳에 무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딴 미친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래도.

바할은 군말하지 않고 움직였다.

플레임 비스트가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로 ‘브레이즈’가, 또 그 뒤로 ‘코로나 아나콘다’가, ‘적랑단’과 ‘이리 부대’ 등 레드 드래곤이 자랑한다는 여러 전투 부대가 줄지어 붙었다.

그렇게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 났다.

어느새 군(軍)의 규모가 된 그들은 11층에 올라서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드넓은 지상 위로 청화도가 차지했다는 도시가 보였다.

목표는 단 하나.

도시 내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말살.

파앗-

그렇게 도시 위로 레드 드래곤이 강림했다.

* * *

도무신은 길을 걸었다.

지금쯤이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발발했지만, 레드 드래곤에게 더 이상 질질 끌려 다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를 찔린 데다가 외뿔부족까지 참전했으니. 아마 레드 드래곤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도무신은 바로 이때를 틈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빠르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신수는 오랫동안 탑을 상징해 왔던 존재들. 그들이 모두 죽어 버린다면?

어떻게든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파란은 가뜩이나 우세를 점하기 시작한 청화도에 확실한 승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움직여라.”

도무신의 명령에 따라, 그림자가 갑자기 사방으로 넓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로 백여 개가 넘는 새로운 그림자들이 촉수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은 숲길을 빠르게 가로지르면서 숲 속 곳곳에 숨어 있던 환수들을 차례대로 사냥해 댔다.

방해꾼을 없애기 위한 작업. 또한, 훨씬 더 많은 내단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도무신은 피비린내가 자욱하게 퍼지는 숲길을 천천히 지났다.

나무가 잔뜩 우거진 밀림의 영역 저 너머로. 피닉스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도무신의 입술이 비틀렸다.

* * *

『……뭔가 왔군.』

피닉스는 영역에서 벌어지는 소란을 듣고 살짝 눈살을 좁혔다.

인간들이 다니는 구획에 최근에 시끄러운 소란이 벌어지더니. 결국 여기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피닉스는 얇아진 황금색 눈동자를 아래로 돌렸다. 어미의 마음도 모른 채 아이들이 열심히 뛰어놀고 있었다.

째액?

그때, 시선을 받은 짹짹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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