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신수의 계승자 (1)
연우는 밤새 부족원들에게 내내 시달려야만 했다.
세미 랭커를 꺾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호승심을 드러낸 사람들이 많아진 덕분이었다.
그럴 때마다 아직 몸이 다 낫질 않았다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을 하거나, 에도라가 나서서 도중에 끊어 내기는 했지만.
“안 되면 나라도! 나라도 한 판 붙어 보면 안 되겠수?”
이번에는 판트가 나서서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같은 부족원들이 열심히 활개를 치고 연우도 대련하는 모습을 보고 몸이 잔뜩 달아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판트.”
“왜 그러우?”
“뒤집혀서 나무에 내걸리기 싫으면. 닥쳐.”
“……그것참, 야박한 형님이란 말이지.”
연우는 더 이상 상대하기 싫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사실 그는 부족원들이며 판트가 옆에서 떠들어 댈 때마다 골이 자꾸 울리는 느낌이었다.
무왕이 건네준 포션을 마시고 어느 정도 회복은 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몸에 누적된 데미지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부상을 입은 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마력이 필수적이다. 찢어진 근육과 골격, 마력회로에 성장 세포를 촉진시키기 위해서는 마력을 불어 넣어야만 했으니.
때문에 연우는 마력을 쉴 새 없이 돌렸다.
천익기공을 운용하면서 체내 구석구석까지 마력을 밀어 넣었고, 여태껏 파악하지 못했던 세밀한 부분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노폐물이 배출되고, 새로운 회로가 열렸다. 기존 회로는 더더욱 탄탄해지고 굵어졌다.
새롭게 추가된 코어는 마력의 흐름에 좀 더 힘을 실어 주기까지 했으니.
연우는 빠르게 회복하는 몸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샤논과 벌였던 싸움을 복기했다.
시간 예지를 사용해서 겨우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지만, 사실상 대련은 연우의 패배였다.
연우는 자신의 실력으로 샤논을 이겨 보고 싶었다.
허초.
그리고 육감.
무왕이 던져 준 두 가지 숙제를 되짚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팔극권과 천익기공을 완전히 숙달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사이.
판트와 에도라는 연우가 깊은 고찰에 잠겼다는 것을 알고, 조용히 그의 방을 나섰다.
무인에게 있어 지금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 궁리를 잘 극복해 낸다면 이전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을 것이다.
“진짜. 나도 독종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지만. 저 양반은 어떻게 따라잡을 엄두도 못 내겠다니까.”
판트는 복도를 가로지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연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가 저렇게 빠른 성장을 할 수 있는 건 그만한 끈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그런 모습이 조금 위험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자신의 안위 따윈 돌보지 않고, 계속 극한까지 몸을 던져 가면서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했으니까.
저렇게 하는데도 몸이 망가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마치 뭔가에 쫓기고 있는 것처럼. 아니다. 뭔가를 다급하게 쫓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연우가 보고 있는 곳은 어디인 걸까?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플랑 숙부님이 오신댔었나?”
“어. 오늘 아침에 사람을 보냈었어. 곧 사람들을 이끌고 합류하겠다고 하시더라.”
에도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판트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것참. 오셔 봤자 좋은 소리 못 들으실 텐데. 쩝.”
플랑은 무왕의 동생이었다.
단순히 수십 명도 넘는 선대왕의 자식 중 한 명이 아니라, 같은 어머니의 배를 빌어 태어난 친동생.
그리고 세간에는 다른 이름으로 유명했다.
창무신.
청화도를 다스린다는 무신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또한, 은거에 들었던 외뿔부족으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나오게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런 창무신이 날이 밝자마자 사람을 보내어, 오늘 중에 부족을 방문하겠다고 통보를 해 왔다.
외뿔부족은 현재 점령한 도시 쿠람에 머물고 있는 상태.
무왕의 악의적인 활약 덕분에 절반가량이 날아갔다지만, 워낙에 도시가 크기 때문에 부족원들이 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밤새 거주민들이 모두 달아났다는 이유도 한 몫 단단히 했지만.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쿠람에 시비를 거는 곳은 없었다.
바깥은 한창 청화도와 레드 드래곤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어 소란스럽다지만, 쿠람만은 예외로 빗겨 난 것이다.
레드 드래곤으로서는 괜히 쉬고 있는 외뿔부족을 다시 끌어들여 전선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한, 외뿔부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자 하려는 속셈도 있었다.
이번 한 번만 돕는 것인지.
아니면 청화도의 우군으로서 계속 전쟁 기간 내내 참전을 할 것인지.
외뿔부족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고 난 뒤에 대처 방안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레드 드래곤이니 평소라면, 원래 뒤도 안 돌아보고 나서서 짓밟아야 했겠지만.
그러지 않을 정도로, 외뿔부족은 예외로 통했다.
그것이 외뿔부족이 가진 힘이었다.
그리고.
무왕이 가진 무게였다.
창무신 플랑도 바로 이 점을 이용하고자 했다.
외뿔부족이 점령한 쿠람을 방문하여 대외적으로 청화도와 외뿔부족의 관계를 과시한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에게도 경고하면서 자신의 존재감도 입증한다.
여러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는 행보인 것이다.
무왕은 대놓고 그런 창무신의 생각을 비웃었지만, 그래도 혈육의 ‘마지막’ 부탁이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창무신과 좋은 추억만 있던 판트와 에도라로서는 어떻게 반응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넌 여기서 형님 병수발이나 잘해 줘라. 청화도에서도 형님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니까. 오시겠다면 같이 오고.”
“알았어. 오라버니 성격상 그런 곳에 가시지는 않을 것 같지만.”
“아니면 이 기회에 확 자빠뜨리던가. 모른 척해 줄게.”
에도라가 도끼눈을 떴다.
“뒈질래?”
“흐흐. 그럼 난 간다.”
에도라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떠나는 판트를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정말이지. 저런 면만 보면 아버 지와 똑같았다.
에휴!
에도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연우가 있는 방을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때.
쾅!
갑자기 방문이 세게 열리더니 연우가 뛰쳐나왔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도라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쉭!
연우는 질문을 들을 새도 없이 복도에 있던 창문을 타고 반대쪽으로 넘어가 사라졌다.
에도라는 뭔가 큰일이 닥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아버지와 판트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싶었지만, 곧 이를 악물며 연우가 사라진 방향으로 같이 뛰어갔다.
* * *
쐐애액-
연우는 무너진 도시를 지나, 11층의 스테이지를 크게 가로 질렀다.
최대한 있는 힘껏 순보를 펼쳤다. 마력회로가 다시 뜨겁게 달아 올랐다. 코어가 과열되었다.
이제 겨우 진정되다가 다시 삐걱대기 시작한 몸이 왜 쉬지 않느냐며 거칠게 항의를 해 댔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정신은 온통 남쪽을 향해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연우에게는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는 몇 개의 연결 고리가 있었다.
하나는 지금쯤 외뿔부족의 마을에 있을 환수의 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이름을 지어 주면서 계약을 맺었던 짹짹이였다.
연우는 연결 고리를 통해 환수의 알과 짹짹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연결 고리도 더 강해졌다.
11층에 올라온 지금은 환수 알과의 연결이 옅어지고, 짹짹이와의 연결이 짙어진 상태였다.
다만, 지금은 전쟁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미처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
나중에 짬을 내서 따로 찾아가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은 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방금 전에 연결 고리를 통해 짹짹이의 강렬한 사념이 전해졌다.
어떻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생각들.
공포.
두려움.
언제나 해맑게 웃던 짹짹이의 사념과는 상반된 사념이었다.
연우는 그 순간 짹짹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닉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대체 누가 피닉스에게?
신수는 저층 구간에 있는 모든 존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존재다. 하이 랭커조차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들이기에, 아무도 그들을 쉽게 건드리지 못한다.
아니,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11층에는 본격적으로 전쟁이 발발하면서 밤새 수많은 랭커와 전투 부대가 들어왔다고 했다.
쿠람만 조용할 뿐. 이미 곳곳에서 두 세력 간의 유혈 충돌이 벌어지는 중이라고.
특히 레드 드래곤은 아예 ‘군’의 규모로 움직이면서 청화도의 영역을 천천히 쑥대밭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무력 부대와 랭커들 중에 일부가 나와서 피닉스에게 움직인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신수가 위험한 존재라지만,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그들이 품은 내단은 아주 값진 보물이 될 테니까.
‘왜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
연우는 생각이 짧았던 스스로를 탓했다.
전쟁이 크게 벌어질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판세를 깊게 들여다봤다면. 아니, 조금만 더 생각을 해 봤었다면. 얼마든지 여기에 생각이 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데에만 몰두하고, 무공을 단련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피닉스와 짹짹이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불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늦게 후회를 해 본다고 한들, 시간이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절대자인 올포원도 그런 건 불가능했다.
시간 예지 스킬도 마찬가지. 그것은 미래를 계산하는 것일 뿐이지, 정말 시간을 되돌리는 스킬은 아니었다.
‘부다. 아무 일도 없기를.’
연우는 그렇게 무왕과 판트 등에게 말을 남길 새도 없이, 스테이지를 한없이 가로질렀다.
이동하는 내내 여러 광경이 눈에 밟혔다.
곳곳에서 전투 부대며 여러 클랜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이고, 전쟁을 피해 도망치는 플레이어들도 보였다.
개중에 몇 곳은 도로를 점거하여 통행자들의 신분을 점검하는 곳도 있었지만, 연우는 그냥 무시하고 힘으로 뚫고 지나갔다.
그렇게 남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짹짹이와의 연결도 점점 강해졌다.
연결 고리 너머로 두려움에 젖어 덜덜 떨고 있는 불안한 심리 상태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닉스의 기척도, 없다.’
연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불안감은 점점 커져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피닉스의 영역’에 입장했습니다.]
곧 연우 앞으로 익숙한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영역에 들어왔으면 당장 따라와야 할 피닉스의 기척이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파고들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피닉스의 영역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미 한 차례 광풍이 불고 지나간 듯.
빽빽한 밀림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은 줄줄이 쓰러졌고, 곳곳에 죽은 환수들의 사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연우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 불안감은 확신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것도 아주 강한 누군가가. 하이 랭커 급 이상의. 당장 연우로서는 어떻게 상대하기 힘들 실력자가 분명했다.
‘최소 바할 급의…….’
연우는 생각을 도중에 멈췄다. 피닉스의 둥지가 있는 절벽이 나타났다.
저 위쪽에서 짹짹이의 사념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둥지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팟-
그리고 들어선 피닉스의 둥지는 이미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다.
입구는 낙석으로 완전히 가려졌고 곳곳에 커다란 칼자국이며 불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다. 피닉스와 하이 랭커 간에 거친 격전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연우는 등에서 비그리드를 뽑았다.
더 이상 인정사정 볼 것이 없었다. 짹짹이와의 연결 고리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빨리 서둘러야만 했다.
콰앙!
마력을 최대로 출력시켜 광풍을 잇달아 쏟아 냈다.
비그리드를 몇 번 내긋자 바위들이 부서져 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파고들었다.
그러다 연우는 무너진 낙석 사이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불그스름한 광채가 감도는 방어막이 바위를 겨우겨우 막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웠다.
그리고 그 안쪽에.
짹짹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쌔액. 쌔액.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얕은 숨결이 연우의 손끝에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