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12화 (112/862)

12화. 신수의 계승자 (3)

[육체의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영격(靈格)이 한 단계 상승하며 중단되었든 계승 작업이 진행됩니다.]

[현재 작업량: 99.8%]

연우는 몸을 어루만지던 희열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그 순간, 바로 느낀 감정은 희열의 잔재나 뿌듯함이 아니었다.

공허함.

몸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

허기가 졌다.

‘그릇이 커졌다.’

그것은 마력이 완전히 빠져나갔거나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총량은 피닉스가 남긴 마력을 받아 부쩍 늘어난 상태였다.

하지만 전체적 총량이 늘어나도 공허함을 느낄 만큼, 그릇이 아주 크게 확장되었다.

모든 마력회로의 개방.

아직 엄두도 내지 못했던 여러 주요 회로들뿐만 아니라,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닿아 있는 작은 회로들까지.

피닉스의 불길이 한바탕 크게 휘젓고 지나가면서 회로를 가로막고 있던 노폐물과 탁기를 모두 태워 버렸던 것이다. 거기다 신성력이 작용되어 상처까지 봉합되었으니.

마력회로는 이미 이전보다 훨씬 넓어지고, 탄탄해졌다.

원래대로라면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진행했을 작업이 한 번에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연우는 마력회로 한가운데에 성화의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심장 바로 옆 부위. ‘돌’이 위치한 장소였다.

‘왜 여기로 흘러 들어간 거지?’

연우는 왼쪽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리언트가 만들려다가 실패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돌. 여태껏 아무리 건드려 봐도 단 한 번도 반응을 하지 않아 그냥 무시를 했던 것이었는데. 어째서 피닉스의 불씨가 이쪽으로 흘러 들어간 걸까?

의지를 그쪽에다 투영시켜 봤지만 돌은 여전히 꿈쩍도 않았다.

대신에 돌에 스며들었던 불씨가 밖으로 나와 마력회로를 따라 손 끝에 맺혔다.

화르륵!

연우의 손 위로 푸른색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

불길은 가지각색으로 변했다. 붉은색으로도, 황금색으로도, 보라색으로도 변하면서 다양한 빛깔을 드러냈다.

피닉스를 유지하던 불꽃. 재생과 부활을 일으킨다는 신성한 불길이었다. 연우가 매번 받던 생명의 불꽃을 일으키던 근본, 불씨이기도 했다.

피닉스는 생명 중 일부를 떼어다가, 연우를 위한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니만큼, 가지고 있는 내력은 아주 대단했다.

[성화(聖火)]

넘버링 050

숙련도: 0.0%

설명: 부활과 재생을 상징한다는 새, 피닉스를 상징하는 불길. 태초에 하늘로부터 처음으로 지상에 떨어진 불꽃이라는 말도 있다. 수많은 신들이 원할 만큼 순도 높은 불꽃이기도 하다.

* 정화(淨化)

저주와 마기를 강제로 태운다. 악 속성에 대해 강한 면역력과 저항력을 자랑한다. 이때의 힘은 스킬 숙련도에 비례해 강해지며, 상실된 체력을 일부 회복시키기도 한다.

* 불의 은총

성화는 태초에 처음으로 지상에 떨어졌다고 알려진 불씨이다. 모든 화 속성에 대해 우선권을 가지며 높은 저항력을 갖게 된다. 때에 따라서는 불에 대한 제어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넘버링 50!

바토리의 흡혈검을 얻고 난 뒤에 처음으로 얻게 된 넘버링 스킬이었다.

성화는 어둠 계통의 속성들에 있어 절대적인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어둠을 물리치고, 마기와 사기를 강제로 정화시키니까. 예전에 피닉스가 말했던 대로, 성화는 죽음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검은 팔찌와는 최악의 상성이겠지만. 그래도 특성이 생겨서 다행이야.’

연우는 이럴 때 미리 기인 특성을 얻어 놓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화와 검은 팔찌, 둘 모두 양극단에 치우쳐져 있으니 혼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인 특성이 적용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성 차에서 생기는 모든 약점이 말끔하게 사라지니까.

이런 것을 본다면, 연우는 자신이 얻은 특성과 칭호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기스’가 크게 반응합니다.]

[‘비그리드’의 정화 작업이 보다 빨라집니다.]

등에 매달아 뒀던 아이기스와 비그리드가 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자신들과 상성이 잘 맞는 스킬이 도착했으니 기쁜 것이겠지.

다만, 불에 대한 제어권을 획득했다는 말은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말 그대로 불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일까? 하지만 속성 제어권은 본래 권능의 영역.

단순한 스킬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불’에 대한 범위를 한정 짓는 것도 조금 어려웠다.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보거나 몇 차례 실험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여하튼.

연우는 피닉스에게 다시 한 번 더 감사하다는 말을 속으로 되뇄다.

그가 남긴 유산은 연우가 오랫동안 진척해야 할 성장을 몇 년 이상 앞당겨 줬다.

마력회로의 개방만 하더라도 그에게는 너무 큰 성장이었으니까.

특히 성화는 피닉스의 고유 스킬이기 때문에 어떻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리자드킹 하르간의 열풍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짹짹이를 끌어안은 손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하지만 사실 이건 연우의 생각처럼 단순한 피닉스의 배려가 아니었다.

피닉스가 남긴 유산은 사실 일정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발동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연우가 짹짹이의 위험을 감지하고도 뒤로 미뤄 뒀거나, 상황을 알고도 짹짹이를 모른 척했다면.

돌봐줄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속은 절대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짹짹이를 걱정하는 마음과 피닉스에 대한 연민, 그리고 도무신에 대한 분개가 있었기에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유일하게 남은 자식을 잘 돌봐 주었으면 하는 어미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때.

짹!

짹짹이가 조용히 눈을 떴다.

“몸은? 좀 괜찮으냐?”

짹…….

짹짹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가 계속 화기를 불어 넣어 몸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거기다 연우가 성화까지 얻으면서 기력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조금 쉬어. 이곳은 혼잡스러우니 자리부터 옮기자.”

짹짹!

그런데 갑자기 짹짹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단호한 눈빛. 여전히 지쳐 있었지만, 뭔가를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연우는 강화된 연결 고리를 통해 짹짹이가 뭘 말하고 싶은지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신수들을 구해야 한다고?”

짹!

“하지만, 너…….”

짹짹!

짹짹이는 제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어다녔다. 어떻게든 연우의 생각을 바꿔 보려 했다.

연우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도무신은 피닉스에 이어 남은 신수들도 마저 정리하기 위해서 움직일 예정이었다.

연우로서는 피닉스가 아니라면 다른 신수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다.

이제 적으로 돌릴 청화도가 그만큼 힘을 비축한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 그에게는 도무신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다른 신수들과의 직접적인 이해가 없다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짹짹이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이는 녀석이 생기면 안 된다고. 다른 신수들도 도와 달라고 말했다.

연우는 쓰게 웃으면서 짹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자기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들 텐데. 다른 존재의 걱정부터 먼저 한다.

참 따뜻하고 기특한 녀석이었다.

째액?

결국 짹짹이의 계속된 부탁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짹!

“하지만 도와주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장 내가 가진 것으로는 도무신의 발끝도 잡지 못해.”

모든 마력회로가 열리고 성화를 얻었다지만, 여전히 연우는 랭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상대가 하이 랭커인 도무신이라면 더더욱.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복수를 생각하더라도 절대 현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두 눈이 머는 순간, 도리어 복수와는 거리가 더 멀어지고 마니까.

오히려 더 냉정해지고, 차분하게 상황을 직시해야만 했다.

짹짹이도 그런 건 알고 있다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빠져나오자는 말도 함께.

연우는 의논이 끝나자 짹짹이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신수는 스테이지 동쪽에 위치한 허무룡. 그곳의 영역부터 먼저 들를 생각이었다.

그렇게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피닉스의 영역으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연우는 살짝 긴장하는 짹짹이를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동료라고 달랜 뒤에, 에도라에게로 다가갔다.

“여기는 어떻게 찾아왔지?”

“급하게 뛰어가시는 것을 봤어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

에도라는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연우를 따라가다가 도중에 저만치 사라져서 흔적을 찾느라 고생하며 방금 막 도착한 터였다.

“그런데 여기는……?”

“원래 내가 있던 곳. 아무래도 청화도에서 신수들을 사냥 중인 것 같아.”

에도라는 연우의 사정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연우의 품에 안긴 짹짹이를 발견했다.

영민한 그녀는 연우의 생각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청화도와 완전히 갈라지려 한다는 것을.

“도와 달라고 하지는 않아. 외뿔부족에서도 나를 따라 나와 달라는 억지도 부릴 생각 없고. 하지만 방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애초 연우가 이런 시궁창 같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적으로 만나게 되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에도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갖가지 생각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결론을 내리고 품에 안은 신마도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럼 저도 같이 가겠어요.”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굳이 무리하게 그럴 필요가…….”

“아뇨. 제가 돕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사실 개인적으로도 저희 부족을 끌어들인 청화도가 탐탁지 않기도 했고요.”

“스승님이 싫어할 텐데?”

“저, 아버지 말은 듣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어요. 그리고 갓 제자가 되신 오라버니가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아요?”

“그런가?”

연우는 피식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왕이라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재미있다며 크게 웃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물론, 전쟁터에서 만난다면 제자나 자식이라고 봐줄 양반은 아니지만.’

무왕은 그런 사람이었다.

“길은 내가 알고 있으니 먼저 앞장서지.”

“예.”

결정을 내린 연우와 에도라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허무룡이 있을, 동쪽으로.

* * *

피닉스가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하는 존재라면, 허무룡은 끝없이 어둠 속으로 밀고 들어가 자신을 숨기는 존재였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를 꺼려 하고, 자신의 거처에 똬리를 튼 채 깊은 잠에만 들었다. 그리고 잠을 방해받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이따금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허무’ 속에 묻어 버리기 일쑤였다.

허무룡은 신수지만 마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자기 영역에 대한 고집이 강하고 포악한 성격을 자랑했으니까. 그리고 깊은 잠에 들 때마다 ‘허무’를 뿌려 환계를 계속 침식해 나가는 특이한 존재였다.

그런 허무룡이 내리는 시험은 4대 신수의 시험 중에서 가장 어려운 편이었다.

‘지금은 별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리고 허무룡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연우는 피닉스의 영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와 똑같은 광경을 보고 말았다.

숲을 따라 결계처럼 둘러싸고 있어야 할 허무와 번개의 기운이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 수많은 마수들이 죽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허무룡의 권속들. 그를 따라 허무를 먹으며 살아간다는 존재들이 하나 같이 목덜미가 갈려 내단과 심장이 강제로 뽑혀 있었다.

‘시선도 없다. 그렇다는 건…….’

불안은 어김없이 현실이 되는 법이다.

“오라버니.”

“그래.”

에도라가 불러 바라본 곳에는 집채만 한 덩치와 끝없는 길이를 자랑하는 검은 용이 축 늘어져 있었다.

칠흑색 비늘을 따라, 허무가 작은 안개처럼 뭉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허무는 색이 많이 바랜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허무룡.

일기장 속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연우는 조금 더 허무룡의 상태를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 사체로 다가갔다.

그때.

『크크큭.』

갑자기 어디선가 들리는 탁한 웃음소리.

“뭐지?”

연우는 혹시 도무신이라도 근방에 있나 싶어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홱 하고 돌렸다.

그런 그의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허무룡의 영혼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