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13화 (113/862)

13화. 신수의 계승자 (4)

“……뭐?”

허무룡은 죽지 않았었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방금 전과 똑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피닉스와 똑같은 방식의 의사 전달.

허무룡이 분명했다.

『크하핫! 피닉스의 가호를 받고 있어서 뭐하는 놈인가 싶었지만. 여길 왔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서도 찾아왔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건 제법 의기가 있는 놈인 것 같군그래?』

연우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허무룡이 맞으십니까?”

『날 깨운 놈이 그딴 말을 하니 좀 이상한데? 키키킥.』

“무슨……?”

연우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가 짚이는 게 있어 말꼬리를 흘렸다.

그에게는 자신이 죽이지 않은 영혼을 소환하거나 수집할 자격은 없다. 아니, 있다고 해도 허무룡의 격이 너무 높아 과연 가능할까도 싶었다.

그렇다면 이건 정확하게 영혼은 아닌 것 같았다.

잔재.

잔류 사념이라면?

째액!

그때, 짹짹이가 날개를 크게 펼치면서 소리를 냈다. 짹짹이는 당당하게 허무룡의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렇군. 네가 이번에 그 도도한 척하는 년을 대신해서 남방을 맡게 된 녀석이냐? 자식인 것 같군. 재미있어. 신수를 품은 플레이어라. 여태껏 그런 전적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야. 하긴. 이러니 내가 깨어난 것이겠지만.』

허무룡은 연우를 보면서 키득거리기 바빴다. 어느새 자신에게 맺힌 피닉스의 기운도 읽은 걸까.

그러나 연우는 헛웃음이 나왔다.

단순한 사념이 이만한 의지를 가질 정도라니.

역시 신수는 다르다는 걸까.

영혼과 사념은 개념이 많이 다르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존재를 이루는 구성 요소이고, 사념은 존재가 남긴 잔재였다.

쉽게 말하자면, 태양과 그림자의 차이랄까.

그만큼 큰 격차가 있었지만.

『나 같은 위대한 존재쯤 되면 그런 구분도 크게 필요 없는 법이지.』

“…….”

연우는 잘난 척 으스대는 허무룡을 보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었나? 일기장에는 분명히 말이 없고 귀찮은 걸 질색해하는 성격이라고 했었는데.’

어쩌면 곤히 잘 자고 있다가 도무신의 공격을 받아서 생긴 변화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건 간에, 연우로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허무룡은 도무신과 직접 싸우기까지 했으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연우보다 허무룡의 말이 더 빨랐다.

『여하튼 난 네가 날 깨웠을 때부터 계속 널 지켜봤다. 죽음을 다루는 놈이 피닉스의 사랑을 받는 것도 신기한데, 뭔가 다급해 보이는 것 같아서. 구경하는 게 아주 재미있었지.』

연우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신수는 꿈을 먹고 사는 환수의 정점에 다다른 존재. 당연히 플레이어가 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내 잠을 더럽게 깨운 놈과 싸울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던데. 맞지?』

숨길 필요가 딱히 없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 그렇습니다.”

『잘못하면 네 놈이 비명횡사할지도 모르는데? 나야 죽었어도 허무 속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으니 괜찮지만. 너는 목숨이 하나 밖에 없을 텐데?』

“친구의 부탁이니까요.”

연우는 짹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째액!

짹짹이도 으스대면서 다시 지저귀었다. 마치 자신의 친구가 이 정도라는 듯.

에도라는 가만히 뒤로 물러서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거 만용인데?』

허무룡이 살짝 비꼬듯이 말을 던졌지만.

“그래도 일단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에나 변수는 있는 법이니까요.”

허무룡이 웃음을 흘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래서? 너에겐 그 길이 있나?』

“예.”

하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지금, 제 앞에 허무룡이 계시지 않습니까?”

연우는 어느새 활짝 열린 용마안을 통해 자신의 눈앞에서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으로 앉아 있는 존재를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7세 전후의 어린아이로 보였지만, 녀석을 따라 짙고 까만 허무가 아지랑이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허무룡의 사념이 뭉치면서 만들어진 허상이었다.

허무룡의 사념이 팔짱을 끼면서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그 순간.

화아악-

허무가 갑자기 촉수처럼 사방으로 길게 뻗어 나오더니 주변의 모든 공간을 새카맣게 물들였다.

연우는 어느새 칠흑색으로 가득한 어둠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만 같은 어둠.

삶도, 죽음도, 영혼도 모두 덧없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곳이었다.

연우는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영혼을 가진 존재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아니, 존재 자체를 지울 수 있는 무(無)의 영역이었다.

허무.

혹은 심연.

그 까마득한 공간에서 연우는 정신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뭐지? 이 기분은……?’

연우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렴풋하게나마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러나 확실한 건, 이 허무는 당장이라도 자신을 지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당장은 죽었어도, 허무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었다.

『그 말은. 네가 날 이용하겠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렷다?』

연우가 말한 길. 혹은 변수. 그걸 허무룡이라고 한 데에 그는 포악하게 웃었다.

신수는 고고한 존재.

가뜩이나 살해를 당한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대놓고 면전에서 자신을 이용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말을 잘못하면 바로 죽여 버리겠다는 의지까지 드러냈지만.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다면 제게 먼저 말을 걸지 않으셨겠지요. 허무룡은 허무를 먹고 사는 존재. 모든 걸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당신이 저 같은 인간에게 관심을 먼저 가질 이유가 없잖습니까?”

귀찮은 걸 질색해하는 허무룡이 이렇게까지 말이 많아진 이유.

연우는 그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협박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인함을 지녔는지.

주르륵.

연우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공포심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면서 육체가 미칠 것 같다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식은땀이 똑 하고 떨어져 허무 속에 묻혀 사라졌을 때.

『푸하하핫!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물건인 것 같은데.』

허무룡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의 생각은 옳았던 것이다.

파앗!

연우를 둘러싸던 허무가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폐허가 된 숲이 다시 드러났다.

연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폐부를 짓누르던 허무가 주는 압박감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짹짹!

짹짹이는 허무룡의 사념이 연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채고 크게 항의했다.

물론, 그런 걸 들을 허무룡이 아니었지만.

그는 콧방귀를 뀌면서 연우에게 말했다.

『그래. 좋다.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 뭘 맡길 만하지. 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도망치는 놈들을 아주 싫어하거든.』

허무룡의 사념은 입술 끝을 비틀면서 말을 이었다.

『난 잠에서 깨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죽는 것보다도 더. 그런데 그 빌어먹을 놈은 날 강제로 깨웠을 뿐만 아니라, 내가 만든 내단과 심장을 가져가기까지 했다.』

억누른 목소리에서는 분노가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당장 이 꼴로는 권역을 몇 발자국 벗어나지도 못할 테고, 허무에서 깨어나 다음을 준비하려고 해도 그때까지는 내 지랄 맞은 성격이 기다리질 못한다. 그런데 바로 네가 나타난 거다.』

그래서 허무룡은 연우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무시했을 테지만, 피닉스의 가호를 받는 놈이라면 뭔가 다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놈일 수도 있으니. 과연 제대로 된 놈인지 확인하려 했겠지.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무룡의 인정을 받아, 히든 퀘스트 ‘허무룡의 시험’을 달성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허무룡의 환심’을 획득했습니다. 허무룡과의 친화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목(木) 속성에 대한 친화도가 50만큼 상승했습니다.]

[암(暗) 속성에 대한 친화도가 50만큼 상승했습니다.]

[뇌(雷) 속성에 대한…….]

……

『하지만 당장 네가 그놈과 싸운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큰 차이가 존재하지. 그것을 조금이나마 줄여 주겠다.』

[허무룡이 두 번째 시험을 제안했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연우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두 번째 시험.

어차피 그는 처음부터 허무룡의 시험을 받고자 했다.

연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든 퀘스트 / 허무룡의 두 번째 시험]

내용: 동쪽의 신수, 허무룡은 자신의 단잠을 깨운 원수에게 단죄를 내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는 현재 허무 속에 스러져 나설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허무룡은 당신에게 원수를 단죄할 임무를 내리고자 합니다. 허무룡이 내어 주는 힘을 받아 단죄를 마무리하십시오.

징벌의 정도가 커질수록 주어지는 보상도 커질 것입니다.

보상:

1. 심연의 구슬

2. 허무룡의 역린

3. ???

『좋아. 그럼 이것으로 계약은 성사되었다.』

허무룡이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그리고 존재가 허무에 녹아 확 흩어지더니 수십 줄기로 나뉘어 연우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흡!”

연우는 허리를 바짝 세웠다.

체내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무와 어둠, 그리고 번개 속성으로 이뤄진 힘. 사념을 구성하고 있던 허무가 연우에게로 흡수되는 것이다.

『비록 알맹이는 죄다 강탈되어 쭉정이밖에는 남지 않았지만. 이것으로도 조금은 도움이 되길 바라지…….』

도무신과의 격차를 조금이라도 메우라며 주는 선물이었다.

허무룡의 사념은 점차 흐려지다가 끝내 마력회로에 녹아 사라졌다.

[‘허무룡의 가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력을 대거 흡수했습니다.]

[힘이 15만큼 상승했습니다.]

[민첩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

[칭호 ‘허무룡의 계약자’를 획득했습니다.]

연우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허무룡의 사념은 쭉정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정도로도 연우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양이었다.

아카샤의 뱀을 또 한 마리 더 먹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덕분에 성화로 너무 넓어졌던 마력회로를 일부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여전히 많은 양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총량만 따진다면 이전에 비해 1.5배 이상 불어나 있었다.

‘피닉스와 달리 유산이 아닌 몇 단계 낮은 가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야.’

허무룡의 사념은 더 이상 자리에 없었다. 그에게 마지막 남은 힘을 넘겨주고 사라진 것 같았다.

연우는 에도라를 돌아봤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도라는 신수를 삼킨 것 같은 연우를 멍하니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는 도문신을 빨리 따라잡아야 했다.

다음 장소는 북쪽. 어비스 터틀이 있는 곳이었다.

* * *

쿠웅!

거대한 형체가 스러졌다. 연못이 범람하고, 지축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거대한 뱀과 거북이가 엉켜 있는 이상한 모습을 한 신수, 어비스 터틀이었다.

“으음.”

“괜찮으십니까, 도무신?”

청화도의 플레이어들은 도무신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도무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목과 어깨를 풀었다.

우드득.

두득.

그럴 때마다 뼈와 근육이 다시 잡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피곤하군.”

그러다 도무신은 도무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근처에 있던 바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늘 하루. 너무 큰 전투를 세 차례나 치러야 했다.

한 번만 치러도 몸이 축나 한 달을 쉬어야 할 판국인데. 그것을 연속으로 해냈으니.

그래서 도무신은 검무신의 허락에 따라 ‘여섯’을 개방한 뒤에야 어비스 터틀을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은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중이었다.

‘뒤에 있는 ‘일곱’까지 개방하셨다면 좀 더 쉬우셨을 것을.’

도무신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하, 마도단의 단장은 안타까움이 담긴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도무신이 왜 그러는지 납득은 되었다.

‘일곱’까지 개방하는 것은 도무신에게 있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을 테니까.

아무리 신수라고 해도 고작 11층의 존재.

그런 놈들을 상대하는 데 ‘전력’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일곱을 꺼내 버린다면, 여태껏 수양했던 것들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도무신, 차라리 조금 쉬고 가시는 것이…….”

“아니. 되었다. 신수들도 이미 자신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알아챘을 테고, 레드 드래곤에서도 곧 냄새를 맡고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일을 끝내야 해.”

도무신의 단호한 대답에 마도단의 단장은 한 발 물러섰다.

다른 무신들이 도와줬다면 일처리가 빨리 끝났을 테지만, 그들도 각자 맡은 임무를 처리하고 있는 지금.

도무신밖에는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을 테니까.

굳이 왜 쉽지도 않은 일인데, 4대 신수를 제거해 화근을 만드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검무신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나중에 가서야 숨어 있던 뜻을 깨닫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무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수많은 안배를 설치하는 검무신의 말은 청화도에서도 절대적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제 한 마리만 남았다는 점이었다.

“그럼 다시 가지.”

도무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놓았던 철함을 들었다.

마도단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도무신의 성격만큼이나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도합 아홉 자루의 칼이 들어있는 철합이 움직일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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