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14화 (114/862)

14화. 신수의 계승자 (5)

연우는 이번에도 자신이 늦었다는 것에 입술만 질끈 물어야 했다.

이미 어비스 터틀의 권역도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바다처럼 커다랬을 호수는 물이 모두 증발해 휑한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비스 터틀은 심장과 내단이 모두 뽑힌 상태로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피닉스와, 허무룡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라? 600년 전에 비슷한 놈을 보긴 했지만. 또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는걸.』

『하지만 어쩌나. 인간이여. 이미 한발 늦은 것을.』

어비스 터틀은 집채만 한 덩치를 가진 거북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거북이와 뱀이 뒤섞인 자웅동체였다.

어비스 터틀은 원래 서로 다른 길을 걷던 환수와 마수가 하나로 뒤엉키면서 만들어진 신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둘이되 하나였고, 하나이되 둘이었다. 거북이 몸과 머리통, 그리고 꼬리 쪽에 나 있는 기다란 뱀의 머리.

하나는 신(神)을, 다른 하나는 마(魔)를 가리키며 수련자들을 시험했다.

어비스 터틀은 4대 신수 중에서 가장 성격이 온순하고, 인간을 아껴서 시험을 필요로 하는 플레이어가 있으면 아낌없이 시험을 내어 줬다.

하지만 두 마리가 동시에 내리는 시험답게, 난이도는 가장 어렵고 험난해서 죽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어비스 터틀은 꾸벅, 꾸벅, 감기는 눈을 하고서 두 쌍의 눈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그들도 허무룡이 한 것처럼 뭘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성격이 온순해도 갑자기 공격을 받은 것에는 화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허무룡보다도 더 큰 원한을 갖고 있었다.

꼬리 역할을 하고 있는 뱀은 한때 맨티코어도 한입거리로 즐기던 마수.

이런 일에 죽임을 당한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가호라도.』

『받겠나?』

결국 어비스 터틀의 부탁이 떨어지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비스 터틀의 가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당신은 어비스 터틀의 부탁을 받아 반드시 시험을 치러야만 합니다.]

[강제 사항입니다. 거부하실 수 없습니다. 거부 시, 커다란 패널티를 받게 됩니다.]

[히든 퀘스트 / 어비스 터틀의 시험]

내용: 어비스 터틀은 피닉스와 허무룡의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당신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이어서 시험을 내리고자 합니다.

어비스 터틀은 복수보다 자신들을 대신해 북쪽을 도맡아 줄 후임자를 찾고자 합니다. 어비스 터틀의 후임이 될 만한 자격을 가진 환수를 찾아 신수로 각성시키세요.

보상:

1. 머리 거북이의 등껍질 조각

2. 꼬리 뱀의 허물

3. ???

‘후임?’

허무룡과 마찬가지로 복수를 말할 줄 알았는데. 어비스 터틀은 전혀 달랐다.

『그깟 복수, 이뤄서 뭣할까?』

『어차피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둘이었기에 같은 생을 가졌기에 두 배는 더 충만한 삶을 살았지.』

『그러니 죽어서도 미련은 없다.』

『있다면 단 하나.』

『우리는 피닉스와 달리 자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

연우는 그제야 어비스 터틀의 두 시선이 줄곧 짹짹이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스함.

그리고 부러움.

귀하긴 해도 어떻게 짝을 찾을 수 있는 피닉스와 다르게, 어비스 터틀은 서로 다른 존재가 얽힌 몸이니만큼 짝을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후손은 어떤 존재가 세상을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비스 터틀은 그런 증거를 남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짝짓기는 안 되니, 후임이라도 찾으려는 건가.’

어비스 터틀을 대체할 만한 존재라? 어쩌면 허무룡의 복수를 이뤄 주는 것보다 훨씬 힘든 숙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뒤를 부탁하지.』

『우리는 저 스틱스(Styx)에서 지켜 보고 있겠다.』

어비스 터틀은 큼지막한 눈을 끔뻑거리더니 곧 잘게 부스러져 사라졌다.

스스스.

가루가 흩날리면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거북이 부위와 뱀의 부위.

이중 거북이 부위가 먼저 연우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다가 흡 수되었다.

[마력회로가 개방됩니다.]

[호칭 ‘어비스 터틀의 대리자’를 획득했습니다.]

[힘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민첩이 15만큼 상승했습니다.]

……

[수(水) 속성에 대한 친화도가 50만큼 상승했습니다.]

[빙(水) 속성에 대한 친화도가 50만큼 상승했습니다.]

……

허무룡 때와 마찬가지로 텅 빈 마력회로를 따라 마력의 양이 부쩍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비스 터틀이 연우에게 남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뱀 부위의 가루가 피부 위에 앉은 것이다.

[스킬 ‘푸른 정령의 가호(임시)’가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연우는 눈을 크게 뜨면서 새로운 스킬을 확인했다.

[푸른 정령의 가호(임시)]

등급: ???

숙련도: 0.0%

설명: 어비스 터틀은 대리자가 오로지 시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거느리고 있던 정령을 붙였다.

정령이 있는 한, 복잡하게 얽힌 신수들의 가호는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이 스킬은 ‘고유’입니다. 어비스 터틀에게 인정을 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으며, 숙련도에 따른 성장이 가능합니다.

‘패시브 스킬이구나.’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연우는 어비스 터틀이 자신에게 아주 필요한 것을 내어 줬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몸에서 뒤죽박죽으로 들끓고 있던 여러 기운들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으니까.

신수들의 가호는 아주 강력한 축복에 해당한다.

버프에도 충돌이 있어 주의를 기울여야 하듯이, 신수들의 가호도 자칫 충돌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한창 전투가 치러지는 중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낭패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스킬은 그것을 잡아주는 데 탁월했다.

전력을 최대로 끌어내는 데 좋은 것이다.

연우는 혹시 어비스 터틀이 붙였다는 ‘푸른 정령’의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권속으로 할당 된 녀석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연우는 가볍게 몸을 풀어 보고,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싶자 이번에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도무신의 다음 목적지는 서쪽. 샤벨 타이거가 있는 곳이었다.

* * *

전속력으로 달린 끝에, 연우는 다행히 도무신보다 먼저 샤벨 타이거의 권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웃기는구나. 나더러 터전을 떠나라고? 이 내가? 탑이 솟은 이후로 줄곧 이곳에 터전을 잡은 내가? 왜?』

연우는 샤벨 타이거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본 것들을 모두 말해 주었다.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충돌. 도무신의 행보. 죽은 세 마리의 신수들.

그리고 이곳도 곧 위험해질 테니 자리를 피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샤벨 타이거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느냐면서. 오히려 인간에게 죽은 다른 신수들을 비웃기까지 했다.

『허무룡과 어비스 터틀도 맛이 갔군. 멍청한 것들 같으니. 아니, 멍청하니 당한 것인가? 하하! 거기다 피닉스는 유산까지 상속했나? 미쳤군!』

샤벨 타이거는 연우의 설명을 듣더니 동굴이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기 머리통만큼이나 길게 삐죽 튀어나온 송곳니를 훤히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꺼져라, 인간. 난 너희들과 달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하지만.”

『꺼지라 하였다.』

크르르릉-

낮은 하울링이 대기를 잔잔하게 떨게 만들었다. 이 이상 귀찮게 굴면 정말 죽이겠다는 뜻.

샤벨 타이거는 자존심이 강하기로는 최고를 달렸다.

그래서 시험을 얻기 위해서도 꽤 많은 공을 들여야 했으니, 이렇게 무작정 연우가 찾아온 데에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짹짹이가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샤벨 타이거는 도리어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멍청하니 당했을 뿐이라며.

게다가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해 댔다.

『아니면. 그대의 손에 있는 아이를 내게 넘겨라. 같은 신수는 영력을 증강시키는 데 아주 좋지.』

결국.

연우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샤벨 타이거의 권역을 떠나야만 했다.

* * *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연우는 에도라의 질문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샤벨 타이거의 영역을 보면서 살짝 미간을 좁혔다.

“우선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우리끼리 도무신을 막을 수는 없어요. 절대.”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나도 용기와 만용을 구분 못 하는 건 아니니까.”

짹짹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녀석이나 연우도 샤벨 타이거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꺾인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식 앞에서 죽은 어미를 멍청하다고 면박을 준 상대였다. 거기다 도발하려고 꾸며 낸 말이라고 해도, 짹짹이를 제물로 내 달라는 말까지 했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이상했다.

그래도.

짹짹이는 샤벨 타이거를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저 자리만 잠깐 피하면 되는 것일 텐데. 왜 고집을 피우는 걸까.

하지만 연우는 얼핏 샤벨 타이거의 심정이 이해도 갔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도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는 거겠지.’

오랜 세월 동안 신수라는 고고한 존재로서 살아왔다. 터전을 떠난다는 건 그런 고고한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일일 테니.

그렇기에 연우로서는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샤벨 타이거는 이미 두 귀를 닫았다. 자신의 설득 따윈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도무신이 나타나는 것에 맞춰서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가 가세한다고 한들, 도무신이 항상 그림자처럼 끌고 다닌다는 마도단의 벽도 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제 의견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때, 여태 조용히 뒤를 따르던 에도라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연우가 고요한 눈길로 에도라를 바라봤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나?”

“우선은 계속 여기에 있을 게 아니라, 일단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봐요.”

“이유는?”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남을 이유?”

에도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닉스에 이어서 허무룡, 어비스 터틀은 오라버니에게 유산과 유훈을 남겼어요. 그렇다면 그것을 따라 줘야 하는 게 맞아요. 하지만 샤벨 타이거는 달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는 우리의 경고를 무시했고,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거부했어요.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도라의 말이 전적으로 옳았으니까.

사실 여기까지 온 것도 짹짹이의 부탁 때문이었지, 피닉스가 아닌 다른 신수들과 어떤 인연이 있어서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일단은 물러났다가, 천천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정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무신과는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도,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무신은 잡는다. 그 생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피닉스의 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연우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었다.

이런 일은 천천히 진행해야만 했다. 보복을 부탁한 허무룡도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퀘스트에 제한 시간을 놔두지 않았다.

그래도 연우는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결국.

연우는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알았다. 여기에는 네 의견을 따르는 게 맞는 것 같으니까.”

에도라가 조금 밝아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연우가 도무신을 당장 적으로 돌리려고 할 때부터 우려했었다. 도무신과 싸운다는 건 청화도와 전쟁을 벌인다는 뜻이었으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비쳤던 것이다.

게다가 에도라 자신은 연우의 편을 들어 준다고 해도, 자칫 외뿔부족과 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내심 불안했었다.

그래도 다행히 설득이 통한 것 같았다.

평소 냉정한 성격답게, 연우는 절대 만용을 부리지 않았으니까. 청화도에 대한 적개심은 차후에 기회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 그러니까 일단 돌아가서 마저 생각하도록 해요. 어쩌면 청화도 내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에도라는 몰랐다.

연우가 냉정하다고 해도, 그는 절대 포기를 모른다는 사실을.

“아니. 이미 결정은 따로 내렸어. 짹잭이 때문이라도 청화도와는 함께할 수 없어. 부족에서는 알만 되찾고 바로 나올 거다.”

에도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럼……?”

“알만 되찾고, 바로 레드 드래곤으로 넘어간다.”

“……!”

“혼자 힘으로 안 된다면, 다른 힘이라도 빌려야지.”

가면 아래, 연우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마치 허무룡에게서 봤던 허무와 심연을 담은 것처럼.

새카맣게.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공멸을 유도할 수 있다면.’

이미 연우의 머릿속으로는 여러 계획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에.

‘챙길 수 있을 건, 전부 챙겨야겠지.’

다른 신수들의 힘은 모았다. 하지만 아직 샤벨 타이거의 힘만 모으질 못했다.

과연 4대 신수의 모든 힘이 한 곳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연우는 왼손을 쥐었다 폈다.

사각.

사각.

바토리의 흡혈검의 차가운 톱니 이빨이 저들끼리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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