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15화 (115/862)

15화. 신수의 계승자 (6)

샤벨 타이거는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것들. 얼마나 못났기에 인간 따위에게 동정을 받는 거지? 신수로서의 자격도 끝나 버렸군.』

피닉스, 어비스 터틀, 허무룡. 모두 비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같은 신수라고 엮였기에 그래도 인정을 했던 녀석들인데. 이렇게 손쉽게 죽어 버렸으니 그동안 잘못 봤다 싶었다.

그도 아니면, 너무 오랫동안 평화를 누리면서 자기 존재마저 망각하고 있었거나.

『무엇이 되었든 간에 멍청하다는 사실은 틀리지 않지.』

특히 가면을 쓴 인간에게 안겨 있던 피닉스의 새끼는 정말이지 꼴 보기 싫을 정도였다.

신수란 신의 영성을 깨우친 존재들이다. 언제 신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대한 존재란 뜻이었다.

그런 피를 타고난 주제에 인간에게 기대고 아양을 떨어?

샤벨 타이거는 더 이상 녀석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신수들을 차례대로 죽인 녀석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하니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간만에 힘을 써야겠군.』

샤벨 타이거는 입을 벌리면서 얕게 울음소리를 냈다.

영역에 있는 모든 권속들을 부르는 울음소리였다. 녀석들은 각자 위치로 퍼져 나가면서 곧 영역을 침범할 적들을 맞을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찌릿한 감각이 뇌리 한편에서 느껴졌다.

제법 묵직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여 개의 그림자를 몰고 다니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인간. 등에 매단 거대한 철함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오는군.』

샤벨 타이거는 입술을 비집고 나온 송곳니를 잔뜩 드러내면서 천천히 동굴을 나왔다.

감히 자신의 영역을 함부로 더럽히고자 들어온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무신과 샤벨 타이거가 충돌하려는 영역의 상공에서는.

츠츠츠.

사귀, 부가 하늘을 유유히 날면서 아래를 관망하고 있었다.

* * *

콰아앙!

“시작했어요.”

에도라는 다급히 연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분명 샤벨 타이거의 영역과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수십 개의 천둥이라도 동시에 울린 것처럼 어마어마한 충격음이 여기까지 들렸다. 빽빽한 밀림 위로 높은 먼지 기둥이 치솟고, 지반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떨림이 에도라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에도라는 혜안을 열고 있는 내내 입 안이 바짝 메마르는 것 같았다.

‘강해……! 너무! 숙부님만큼이나.’

진리를 꿰뚫는다는 그녀의 눈에는 너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숲을 따라 회오리치는 두 개의 회오리가. 그것도 칼처럼 날카롭고 매서운 회오리바람이 다른 회오리바람을 일방적으로 찢어발기고 있었다.

누가 누구 것인지는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무왕이 일격에 쿠람을 반파(半破)시켰다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힘이었다.

인간으로서 정점에 다다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힘.

칼바람이 휘몰아치고, 숲을 깡그리 밀어버리고, 나아가 11층이라는 스테이지 전체를 요동치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리고 샤벨 타이거의 것으로 보이는 힘은 상대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저런 사람을 잡겠다고?

무리였다.

머릿속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잡더라도 아주 나중에. 기나긴 수련 끝에, 꾸준히 층계를 오르고 올라 충분한 힘을 비축했을 때에나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때에도 과연 넘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득한 격차를 느껴야만 했다.

에도라는 차라리 자신들을 내쫓아 준 샤벨 타이거가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샤벨 타이거를 미처 도피시키지 못하고 같이 영역에서 도무신을 맞닥뜨렸다면?

볼 것도 없다.

죽었을 것이다.

거대한 쓰나미에는 아무리 큰 바위라 해도 던져 봤자 별 티도 나지 않는 것처럼.

금세 파묻히고, 쓸려나갔을 게 분명했다.

물론, 자신이야 청화도의 중요한 동맹군인 외뿔부족의 공주라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연우는 어떻게 손도 못 쓰고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연우는 저런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도리어 까만 가면 아래에 비치는 두 눈은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 사냥에 나서기 전, 철두철미하게 작전을 짜는 사냥꾼 같이 느껴졌다.

‘하이 랭커를 잡으려는 사냥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때, 연우는 한 손으로 짹짹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녀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짹짹아.”

짹?

“잘 봐라. 저게 앞으로 우리가 잡아야 할 녀석이니까.”

째액!

짹짹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우가 연결 고리를 통해 전달하는 시야에 집중했다.

샤벨 타이거의 영역 위에서 지상을 굽어다 보고 있는 사귀 부가 전송하는 시야였다.

연우는 검은 팔찌의 숙련도를 높여 다루면서 이제 사귀와 어느 정도 감각을 공유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거리가 떨어질수록 감각도 무뎌질 수밖에 없어서 당장은 시각 공유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도무신과 샤벨 타이거의 싸움을 지켜보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짹짹이는 영적으로 연결된 고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부의 기척을 도무신에게 들킬 염려도 하지 않았다. 워낙에 높은 상공에 떠 있는 데다가, 기척도 최소한으로 줄였으니까.

‘게다가 들킬 수 있다고 해도, 샤벨 타이거와의 싸움에 집중하는 한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겠지.’

연우는 부의 시야에 집중했다.

‘일기장에도 도무신과의 전투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흐른 만큼 어떻게 변했는지 체크할 필요가 있어. 장단점도 구별해 내야 하고. 이런 건 직접 보는 것만은 못해.’

도무신은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샤벨 타이거를 휘몰아치고 있는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후한 인상을 가졌지만, 그의 전투 방식은 아주 과격했다.

도무신은 먼저 가져온 철함을 허공에다 던졌다. 그러자 철함이 분리되면서 안에 배치되어 있던 칼들이 우수수 떨어져 지면에 꽂혔다.

크고 작은 아홉 개의 칼. 도무신이 그동안 층계 곳곳을 누비면서 모았다는 마도(魔刀)였다.

하나하나가 옛 군주의 유품이거나, 신의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들.

도무신은 그런 것들을 아무렇게나 꽂아 두고, 하나하나씩 뽑으면서 샤벨 타이거를 상대했다.

하나를 크게 뽑아 놈의 발톱을 잘랐다 싶으면 아무 곳에나 던져 두고, 복부를 공격해야겠다 싶으면 가장 가까운 칼을 뽑아 크게 베고 또 던져뒀다가 자리를 옮겼다.

이렇다 할 정해진 수순은 없었다.

샤벨 타이거의 주변을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근방에 있는 칼로 공격을 하고, 다시 자리를 옮겨 그 자리에 있는 칼로 또 공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샤벨 타이거는 도무지 도무신을 잡질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자잘한 상처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었다.

『감히! 감히……!』

샤벨 타이거가 내뱉는 분노에 찬 소리가 얼핏 전해졌다.

도무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이동 속도는 점차 가속도가 붙어 빨라졌고, 휘두르는 칼에 실리는 힘도 계속 커지면서 마치 포탄이 작렬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치명타로 이어졌다.

샤벨 타이거의 살갗이 뭉개지고, 뼈가 훤히 드러났다. 이미 오른쪽 뒷다리는 크게 잘려 나가 자세가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럴수록.

도무신은 샤벨 타이거가 쏟은 피를 뒤집어쓴 채, 즐겁다는 듯이 건치를 훤히 드러내면서 웃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광소를 터뜨리는 게 분명했다. 광기가 자욱하게 풍겨 부가 부르르 떨 정도였다.

그 모습이 마치 유희를 즐기러 나온 악귀처럼 느껴져 섬뜩하기까지 했다.

쾅! 콰쾅!

콰콰콰-

‘아예 갖고 노는 수준이야. 도무신이, 이렇게 강했었나?’

연우는 일기장에서 엿봤던 도무신의 경지보다 훨씬 높아진 녀석의 무위를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점차 과격해지는 싸움을 보면서 짹짹이와의 연결 고리를 잠깐 끊으려 했다.

피닉스와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 되었을지 빤히 보였다. 괜한 트라우마를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짹짹이는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자신은 끝까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듯.

짹짹이의 굳건한 의지가 느껴졌다.

“알았다. 그래도 힘들다 싶으면 바로 이야기해. 억지로 볼 필요는 없으니까.”

짹!

연우는 대견한 듯 짹짹이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다가, 부의 시야를 보면서 깊이 생각에 잠겼다.

‘도무신의 경지, 정상적으로 강해진 게 아닌 것 같은데. 광기가 너무 심해. 마성(魔性)이라도 낀 것 같은데. 다른 뭔가에 손이라도 댔나? 마공? 아니면 흑마법?’

연우의 눈이 스산한 빛을 발했다.

어쩌면 앞으로 도무신을 공략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잡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콰아앙!

도무신이 여태껏 잡지 않았던 마지막 아홉 번째 칼을 휘두른 순간, 세상이 이대로 단절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큰 폭발과 함께 샤벨 타이거의 머리통 절반이 날아갔다.

쿵!

샤벨 타이거의 거구가 지면에 처박혔다. 대지가 움푹 파이면서 모래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두 눈은 믿기지 않는다는 충격으로 가득했다.

연우는 바로 부를 검은 팔찌로 거둬들였다.

싸움을 끝낸 도무신이 부의 기척을 조금이라도 읽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이다.”

째액!

연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생각을 읽은 짹짹이도 어깨 위로 올라와 크게 지저귀었다.

팟-

연우는 전력을 다해 순보를 펼쳐 샤벨 타이거의 영역으로 향했다. 에도라에게는 잠시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말해 둔 상태였다.

남들이 본다면 자살 행위로 보일지 몰랐지만.

‘역시, 없다.’

연우가 영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도무신이 자리를 뜬 뒤였다.

혹시 있을지 모를 레드 드래곤의 추격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기회가 되었지.’

연우는 샤벨 타이거의 사체 옆에 착지했다. 이미 샤벨 타이거의 내단과 심장은 적출된 상태. 머리통은 절반이 잘려 나가 보기 끔찍했다.

연우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가볍게 혀를 찼다.

자신은 분명 경고를 했고, 그것을 무시한 건 녀석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된 신수의 꼴을 보니 속이 쓰렸다.

『나를 비웃기라도 하러 온 것이냐, 인간?』

그때, 샤벨 타이거의 사체 위로 백색 아지랑이가 모이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미남자가 연우를 잔뜩 노려봤다. 허무룡 때와 마찬가지로 사체에 남은 잔류 사념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부 그쪽의 선택일 텐데.”

『그럼? 여기는 뭣 하러 온 것이지? 만약 멍청한 다른 놈들처럼 뭔가 남겨 주는 게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게 있다면. 꺼지는 게 좋을 것이다.』

샤벨 타이거의 잔류 사념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두 눈은 분노로 가득했다.

『인간 따위에게 남겨 줄 유산 따윈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화풀이 상대가 생겼으니 좋을 일이지.』

잔류 사념을 따라 백색 기운이 회오리쳤다. 금방이라도 연우를 공격할 기세. 녀석은 사라질 때 사라지더라도 연우에게나마 화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실제로 찌꺼기만 남은 잔류 사념이라고 해도 신수의 잔재. 연우쯤은 해치울 수 있었다.

하지만.

피식-

『웃어?』

샤벨 타이거의 잔류 사념은 가면 아래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연우가 아예 대놓고 비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누가 당신의 유산을 받는다고 했지?”

『뭐?』

연우는 더 이상 존대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여 준 자를 굳이 더 이상 존중해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갖고 가면 그만인데.”

『무슨……!』

잔류 사념이 버럭 소리를 지르기 전에.

연우는 왼손을 활짝 펼치면서 샤벨 타이거의 사체 쪽으로 가져갔다.

“삼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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