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신수의 계승자 (7)
샤벨 타이거의 잔류 사념은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대로 두면 육체는 물론, 영혼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
다른 신수들과 달리 부활은 꿈도 꾸지 못할 것 같다는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이미 바토리의 흡혈검은 톱니 이빨을 녀석의 사체에 들이 밀고 있었다.
끼아아-
소름이 오소소 돋는 끔찍한 귀곡성.
마치 지옥불을 뒹구는 유령이 이리 오라면서 손짓을 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샤벨 타이거의 사체가 빠른 속도로 메마르기 시작했다.
[‘바토리의 흡혈검’을 사용했습니다. 생기와 정기를 갈취합니다.]
[힘이 2만큼 올랐습니다.]
[민첩이 1만큼 올랐습니다.]
……
『안 돼!』
잔류 사념은 연우에게 와락 달려들면서 크게 울부짖었다. 뒤늦게 연우가 뭘 하려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에너지 드레인!
상대가 갖고 있던 에너지를 강제로 갈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 것이다.
문제는 연우가 발동시킨 바토리의 흡혈검이 에너지 드레인 류의 스킬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한다는 점이었다.
사체에 남아 있을 마지막 골수까지 뽑아먹을 뿐만 아니라, 자칫 영혼까지도 집어삼킬 수 있는 스킬!
연우는 애초 샤벨 타이거의 힘을 갈취하기 위해서 도무신과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고,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찾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체를 흡수하기 위해서. 마력이 흩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갈취하기 위해서였다.
내단과 심장이 없어도, 신수의 육체는 그 자체로도 엄청난 양과 순도 높은 마력을 싣고 있는 보물 창고였으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신수의 영혼을 수집할 수도 있을 테고.’
검은 팔찌는 소유자가 죽인 대상의 영혼만 수집할 수 있다는 조건이 있다.
하지만 여러 번의 실험 결과, 꼭 자신이 ‘완벽히’ 죽인 대상일 필요는 없었다.
정확하게는 죽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해를 입히는 정도만 되어도 영혼을 갈취할 수 있었다.
확률은 확 떨어졌지만.
연우는 바로 여기에 착안했다.
만약 바토리의 흡혈검이 사용된다면?
그때는 탑의 시스템이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샤벨 타이거는 분명 도무신에게 죽었다. 하지만 허무룡과 어비스 터틀이 그러했듯, 신수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근원으로 돌아가 부활을 노릴 수 있다.
잔류 사념이 남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부활을 할 수 있으니 대체재를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죽어도 죽는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맹점이 생긴다.
연우는 바토리의 흡혈검을 사용해 신수의 사체에다 새로운 해를 가했다. 그렇다면 이미 죽었어도 죽은 게 아닌 신수에게 이 행위는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
‘녀석을 한 번 더 죽이는 꼴이 되겠지. 바토리의 흡혈검은 영혼에도 상처를 입히니까.’
탑의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노린 것이다.
물론, 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단순한 연우의 추론일 뿐이었고, 실험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크아악!』
잔류 사념이 연우를 공격하기 위해서 기운을 흩뿌리다 말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는 순간.
연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통했다.’
자신의 도박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빌어먹을! 빌어먹으을! 그 손, 놓지 못할까아!』
잔류 사념은 어서 연우더러 손을 놓으라며 비명을 질러 댔다. 고통스러운지 상체를 부여잡은 손에는 힘이 바짝 실렸다. 두 눈에도 핏대가 잔뜩 섰다.
하지만 아무리 악을 질러 대도 사체는 빠른 속도로 메말라 갔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연우는 몸에 부쩍 힘이 많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텅 비었던 마력회로가 꽉 차올랐다. 육체가 조금씩 단단해졌다.
힘의 일부만 남겼던 허무룡이나 어비스 터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샤벨 타이거의 근간을 빼앗는 일이었으니 효율이 훨씬 높았다.
내단과 심장이 없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이것만 해도 과연 수용이 전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육체의 빠른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재기됩니다. 99.8%…….]
용의 육체는 한 톨도 허투루 남기지 않겠다는 듯 죄다 빨아들이면서 에너지로 환원시켰다.
지금의 육체로 부족하다 싶을 때에는 그릇을 더더욱 넓히기까지 했다.
『으아아……! 내가! 내가 인간 따위에게!』
잔류 사념은 한낱 인간 따위에게 죽은 것으로도 모자라, 수천 년 동안 쌓았던 업을 송두리째 빼앗긴다는 사실에, 그리고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어느새 사체는 금세 메말라 찌꺼기만 남아 버렸다.
망가진 인형처럼 이리저리 뒤틀리던 잔류 사념도 가루가 되어 확 하고 흩어졌다.
[샤벨 타이거의 사체를 성공적으로 흡수했습니다. 정수를 갈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혼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바토리의 흡혈검’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30.1%]
[4대 신수의 유산을 모두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내에서 4대 신수들의 힘이 서로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푸른 정령의 가호(임시)’를 통해 신수들의 힘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융합된 힘이 마력회로에 동화됩니다. ‘마력회로’의 스킬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52.1%]
[힘이 15만큼 상승했습니다.]
[민첩이 12만큼 상승했습니다.]
……
[칭호 ‘샤벨 타이거의 약탈자’를 획득했습니다.]
[칭호 ‘피닉스의 상속자’, ‘허무룡의 계약자’, ‘어비스 터틀의 대리자’, ‘샤벨 타이거의 약탈자’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새로운 칭호 ‘신수의 계승자’를 획득했습니다.]
[칭호: 신수의 계승자]
11층에 거주하는 모든 신수로부터 인정을 받은 플레이어에게 수여되는 칭호. 보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러 신수들의 가호를 받는다고 한다.
효과: 모든 속성에 대한 저항력 +15%. 환수를 비롯한 모든 영적인 존재에 대한 지배력이 대폭 상승한다. 또한, 신수들의 가호를 받아 여러 방면에서의 잠재 능력이 크게 개화한다.
화아악-
연우는 자신의 몸 위로 떠오르는 서광을 안쪽으로 갈무리하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입가에 미소가 잔뜩 번졌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성장이 가져다주는 희열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짜릿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용체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계승 작업이 끝났습니다.]
[현재 작업량: 99.9%]
99%를 넘긴 다음부터는 성장 속도가 극적으로 낮아지더니, 이제는 마지막 0.1%가 큰 벽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으니까.
마력회로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천익기공은 하나로 합쳐진 4대 신수의 힘을 육체에 골고루 뿌리면서 다시 곳곳에 코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연우는 여기에서 끝내지 않았다.
전리품으로 획득한 샤벨 타이거의 영혼이 있었다.
망령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격’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검은 팔찌가 부서질 듯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째액!
그때, 짹짹이가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소리쳤다.
치사하게 혼자 먹지 말고 자신도 달라는 듯. 맛있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알았다. 너무 재촉하지 마라.”
연우는 피식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검은 팔찌가 검은 빛에 잠기면서 컬렉션에 있던 망령들을 흑기로 치환시켰다.
다만, 그중에서 샤논의 망령은 쓸 데가 있어 따로 빼 뒀다.
꺄아아-
「인…… 간……! 인가안……!」
샤벨 타이거의 망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검은 팔찌를 이겨 낼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녀석의 영혼마저 갈리면서 망령의 구슬이 만들어졌다.
샤벨 타이거의 영혼이 들어간 망령의 구슬은 보통 것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이전엔 보지 못한 영롱한 빛깔을 자랑했다.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연우는 그것을 짹짹이에게 건넸다.
짹짹이는 자기 몸체만 한 구슬을 먹기 버거워했지만, 부리로 조금씩 쪼아 대면서 삼키기 위해 애를 썼다.
신수의 영혼이 내재된 구슬이다. 당장 경매장에 내놓으면 천문학적인 액수를 부를 귀한 보물.
내단이나 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가치를 지녔을 게 분명했지만, 짹짹이에게 건네는 연우의 손길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짹짹이가 성장할수록.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연우도 같이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이윽고 짹짹이가 구슬을 모두 삼켰을 때.
화아악!
짹짹이를 따라 희뿌연 서광이 맺혔다.
서광은 점차 커지면서 푸른색 불꽃으로 변하더니, 곧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매 정도 되는 크기가 되었다.
그리고 불꽃이 가시면서 드러나는 모습.
단단한 부리. 매서운 눈빛.
윗면은 푸른 잿빛으로 빛나고, 아랫면은 황색을 띤다. 검은 무늬를 따라 타오르는 불길은 따스하지만 곧 세상을 태울 것처럼 이글거렸다.
크기는 50센티미터 내외로 조금 작았지만, 날개를 활짝 펼치니 족히 1미터는 넘어 위압적이었다.
[새끼 피닉스(짹짹이)가 망령의 구슬을 토대로 성장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난조’의 형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흑기의 영향으로 악의 성향을 일부 핍니다.]
그리고.
[모든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뭐?’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연우는 생각지도 못했던 문구에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지?
시련이 끝났다니.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체력과 마력이 회복됩니다.]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됩니다.]
……
[모든 공적치를 합산합니다.]
[현재 공적치: 11,500Point]
그 뒤로도 메시지는 계속 떠오르면서 연우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줬다.
연우는 혹시 탑 외 지역에 있는 환수의 알이 깨어난 건가 싶어 연결 고리를 파악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짹짹이 때문에?’
당장 짚이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고마워. 주인.』
단번에 몇 단계 이상으로 성장한 짹짹이는 심어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연우는 부리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녀석과 연결된 고리를 통해 대강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런가? 짹짹이도 환수니까, 시스템이 내가 녀석을 부화시킨 걸로 인식하게 된 거야.’
연우는 메시지창의 내역을 뒤져 처음 11층에 들어섰을 때 봤던 문구를 다시 켰다.
[시련자여, 지금부터 당신만의 환수를 부화시키세요.]
‘이것 때문이구나.’
자신만의 환수를 부화시키라는 문구.
여기에 함정이 있었던 것이다.
알을 내어 주긴 했지만, 무조건 그것을 부화시키라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꿈을 먹고 자란 환수라면 충분했던 것이다.
짹짹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연우와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연우의 도움으로 성장을 이루면서 완전한 계약 관계가 되었다.
그 때문에 시스템도 연우의 권속으로 인정을 한 것 같았다.
‘스테이지를 통과하려면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이런 방식으로 통과하게 될 줄은.’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전쟁이 벌어지는 한 당분간 11층을 떠날 생각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클리어를 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는 아주 컸다.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의 범위가 완전히 달라지니까.
연우는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짹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고맙긴 내가 고맙지. 넌 내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아일지도 모르니까.”
짹짹이는 연우의 말이 기뻤는지 눈을 감으면서 손길을 만끽했다.
『아니.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그럼 그 말은 도무신을 잡고 나서 마저 하도록 하자.”
『응응! 그럴게.』
짹짹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힘도 생겼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녀석은 천천히 내려와 연우의 어깨에 올라탔다. 단단한 발톱이 어깨를 찔렀지만 이상하게 아프지가 않았다.
“그럼 이만 돌아가자. 앞으로 할 게 많아.”
『그래.』
그렇게 연우가 돌아서려는데.
『그런데 주인.』
갑자기 짹짹이가 다시 그를 불렀다.
“왜?”
『그 전에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
연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녀석을 바라봤다.
짹짹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 좀 바꿔 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