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17화 (117/862)

17화. 용병 (1)

‘왜 이렇게 안 오시지?’

에도라는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연우가 돌아오질 않자 조금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지만. 혹시 도무신과 마도단에 걸려 끌려간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충격파도 들리지 않고, 혜안으로도 다른 뭔가가 잡히는 게 없어 일단 꾹 참고 기다렸다.

10분 정도만 더 기다려 보고, 그래도 오지 않는다면 연우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곧 연우가 돌아왔다. 어깨에 처음 보는 매 한 마리를 올려 태운 채로.

“오라버니, 그 아이는?”

“짹짹이.”

『칫. 이름 좀 바꿔 달라니까. 너무해.』

매가 투덜거렸지만, 에도라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에도라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이 아이가 그 자그맣던 새끼 피닉스라고?

지금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거기다 품고 있는 힘만 따진다면 웬만한 상위 환수도 쉽게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칫. 다른 이름 좀 지어 달라니까.』

하지만 짹짹이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지 홱 하고 토라져서 투덜거렸다.

에도라는 난감하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사실 그녀도 처음에 짹짹이의 이름을 듣고 조금 너무한다 싶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지, 몸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일단 쿠람으로 돌아가자.”

* * *

연우와 에도라는 쿠람이 있는 곳으로 스테이지를 가로질렀다. 쿠람의 무너진 성벽이 보일 즈음, 연우는 다시 에도라에게 물었다.

“에도라.”

“예.”

“지금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맙다.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도라가 홱 하고 연우를 돌아 봤다.

하지만 연우는 앞만 보면서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앞으로 난 청화도와 싸울 거야. 외뿔부족과 칼을 맞댈 수도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널 끌어들이는 건 아닌 것 같다.”

에도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오라버니를 돕겠다고 나서는지, 정말 이유를 모르셔서 그러는 건 아니시죠?”

이번에는 연우가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에도라가 자신의 일에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평소 보이는 태도와 외뿔부족에서의 분위기. 그도 짧게나마 연애 경험이 있었기에 그녀의 눈빛에 담긴 뜻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연애의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가까운 동료이자 동생으로만 여겼을 뿐.

설사 있다고 해도, 당장 다른 곳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그렇기에 여태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건데. 에도라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의사를 표시하니 조금 난감해졌다.

그렇게 불편한 침묵이 흐르는데.

『둘이 짝짓기 할 거야?』

짹짹이가 난데없이 불쑥 꺼낸 말이 분위기를 흐렸다.

에도라는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짹짹이를 바라봤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냐?”

『응? 엄마가 말해 주던데? 수컷이랑 암컷이랑 하는 게 있다고! 나도 나중에 짝 생기면 하게 될 거라고!』

연우는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피닉스가 왜 이런 어린애를 데리고 그런 말을 한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짹짹이 덕분에 불편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리고 쿠람에 도착했을 때.

연우는 볼 수 있었다.

때마침 쿠람의 무너진 성문으로 들어가려던 무리들을. 그들의 머리 위로 흔들리는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하는 문양.

청화도였다.

* * *

“오늘 청화도와 만나기로 했었나?”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에도라도 뒤늦게 뭔가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숙부님께서 오신다고…….”

에도라가 숙부라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은 청화도에 한 사람밖에 없다.

“창무신이?”

“네.”

“그렇단 말이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외뿔부족이 아직까지 청화도와 크게 접점을 가지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떠나기 전에 창무신을 살펴볼 수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겠지.’

연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에도라에게 걱정 말라면서 손사래를 치고, 쿠람의 성문을 통과했다.

부족원들이 머물고 있는 성채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진영을 구분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부족원들은 통이 큰 부족 전통 의상을 입었고, 청화도는 마치 군대처럼 푸른색의 갑옷으로 무장해 있었다.

특히 부족원들은 아침까지만 해도 껄껄대며 웃고 있었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하나같이 팔짱을 끼며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 간혹 청화도의 플레이어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코웃음을 치거나, 차갑게 웃어 대고 있었다.

청화도는 그런 외뿔부족을 보면서 이맛살을 찡그렸지만, 딱히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동맹군과 충돌을 벌이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태도가 외뿔부족을 자극했다. 아예 대놓고 그들에게 비웃음을 던져 댔으니. 몇몇은 보이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기도 했다.

연우는 그 모습에서 외뿔부족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판트와 에도라 덕분에 외뿔부족에 잘 녹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어? 아가씨랑 카인 님, 오셨습니까?”

그때, 연우와 에도라를 발견한 야누가 달려와 그들을 맞았다.

여태껏 냉막한 표정을 짓던 것과 다르게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청화도 플레이어들의 눈가에 광채가 스쳤다.

말로만 듣던 독식자와 외뿔부족의 영매 후계를 이렇게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특히 몇몇 고수들은 연우를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연우의 이름은 이제 11층의 중소 클랜뿐만 아니라, 청화도와 레드 드래곤에도 제법 알려진 상태였다.

혼자서 클랜 연합을 부쉈을 뿐만 아니라, 세미 랭커였던 샤논을 꺾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무왕과 외뿔부족이 도와줬을 거라는 의견도 많았다.

그래도 갓 노비스를 탈출한 플레이어가 세미 랭커를 꺾었다는 소문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난 자가 나타났다는 뜻이었으니까.

더구나 상부에서는 연우가 무왕의 세 번째 제자가 되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때문에 이번 행차에 나선 플레이어들에게는 연우에 대해서 살펴보라는 명령이 하달된 상태였다.

그러니 더더욱 시선과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야누에게 물었다.

“혹시 안에 스승님 계시나?”

“족장님은 지금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 아, 저기 마침 끝났나 보네요.”

야누는 말을 잇다 말고 성채에서 나오는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화도의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그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군대에 못지않은 엄격한 기강과 군율이 느껴졌다.

그들의 인사를 받아 나오는 사람들은 대략 30여 명. 그중 가장 선두에 있는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3미터 크기의 창을 어깨에 짊어진 중년인. 한쪽에 난 뿔과 보라색 눈이 외뿔부족 출신이라는 것을 말해 줬다.

‘창무신.’

연우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빛났다.

개인적으로, 청화도에서 가장 강한 적은 검무신이었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은 창무신이었다. 외뿔부족 특유의 피지컬과 단단한 창술은 도무지 부수기 힘든 성채처럼 느껴졌으니까.

동료들 중에서도 녀석과 맞닥뜨리면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이 꽤 있었다.

창무신은 검무신이 없었다면 청화도를 차지했을 거라고 평가받는 자였다.

그만큼 뛰어난 창술 실력과 타고난 피지컬로 수많은 하이 랭커들을 압도하곤 했다.

그런 자가 바로 앞에 있으니, 도무신을 목격했을 때와는 또 다른 위압적인 분위기가 잔뜩 풍겼다.

기세도 대단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오금이 저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다행이라면 연우는 어느덧 무왕의 기세에 익숙해져 창무신의 기세쯤은 쉽게 넘길 수 있었다.

무왕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창무신도 그런 연우의 태도를 읽었는지 턱을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감탄을 터뜨렸다.

“호오.”

여러 의미가 담긴 감탄.

그를 따라오던 플레이어들은 조금 놀란 눈빛이 되었다.

외뿔부족만큼이나 오만한 창무신이 이렇게 호기심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우는 창무신에게 가볍게 목례만 취하고 옆을 지나쳤다. 한 번 본 거면 충분했다.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형님이 또 물건을 주우셨군그래. 어떻게 그 양반의 주위에는 이렇게 인재가 꼬이는 건지. 참 부럽단 말이야.”

성채 안쪽으로 들어가는 연우를 보면서.

창무신은 한쪽 입술을 크게 말아 올렸다.

* * *

무왕은 자신을 찾아온 연우를 보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새 뭐 좋은 거 처먹었냐? 왜 이래? 어쭈? 그런 걸 하늘 같으신 스승님께 갖다 바칠 생각은 하지 않고, 혼자 날름 처먹어?”

연우는 기운을 모두 갈무리한다고 했는데, 금세 달라진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한 무왕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뭐든지 숨기기가 힘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뭘 그렇게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어? 곧 죽을 사람처럼? 할 말이라도 있냐?”

가뜩이나 빌어먹을 동생이 와서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느니, ‘앞으로도 계속 도와주면 좋겠다’느니, 되도 않는 소리만 지껄여 대서 한 대 쥐어박을까 말까 고민을 하던 차였는데.

왠지 연우를 보고 나니 그런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뭔가 사고를 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처음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의 눈빛.

딱 그 눈빛이었다.

“스승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죄송? 뭔 사고 쳤냐?”

“외뿔부족의 식객에서 빠지고 싶습니다.”

순간, 무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빠졌다.

진지한 얼굴이 된 그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한쪽 입술 끝이 비틀렸다.

실내를 따라 어마어마한 살기가 휘몰아치면서 연우의 몸을 옥죄기 시작했다.

고오오-

가면 너머로 보이는 연우의 눈동자가 살짝 요동쳤다. 무왕을 뒤집어쓴 짐승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처럼 이를 드러냈다.

“챙길 건 다 챙겼고, 위험한 건 싫으니 이제 빠지겠다, 뭐 그런 거냐?”

“아닙니다.”

“아니면, 뭐? 우리 부족이 동네 노인정처럼 들어오고 싶을 때 들어오고, 나가고 싶을 때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그런 걸로 보이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연우는 순간 이것을 이야기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신뢰를 가지게 된 판트나 에도라와 달리, 사실 그는 무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모르는 면이 너무 많았다.

아니, 사실 알기가 힘들었다.

웃는 낯 아래에 얼마나 많은 능구렁이를 담고 있는 건지.

연우는 본인 스스로를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라고 생각했음에도, 무왕의 심기만큼은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설사 스승으로 모셨다고 하더라도. 속으로 그의 무위를 동경하게 되었다고 해도. 인간적인 신뢰는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망설이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인사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왔지만, 무왕의 깊은 눈매를 보고 있으니 속이 훤히 내보이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했을 때. 무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청화도에 정보가 흘러 들어가게 될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청화도의 움직임에도 촉각을 세워야만 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영매가 있다면, 계속 숨기기 힘들겠지.’

무왕도 무왕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사람의 운명을 점지한다는 영매의 존재도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였다.

게다가 무왕은 연우가 피닉스의 영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곧 도무신이 신수들을 사냥했다는 사실도 알게 될 테니, 차라리 털어놓고 정면 돌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결국 연우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에도라에게 처음 설명을 했을 때처럼.

피닉스, 짹짹이와의 인연. 도무신의 행보까지.

다만, 다른 신수들과 계약을 맺고, 계승자가 되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굳이 전력적인 면까지 밝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연우를 압박하던 위압감이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다. 무왕의 얼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뭔가 찝찝해하는 표정.

“이런 니미.”

그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연우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를 노려보는 짹짹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놈이 아까 말한 피닉스의 새끼냐?”

“그렇습니다.”

“하아! 청화도 새끼들, 또 이상한 사고를 치고 다녔단 말이지? 하여간…….”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탁상 위에 놓여 있던 곰방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빠악!

연우가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곰방대로 연우의 정수리를 세게 후려쳤다.

“컥!”

연우는 앓는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쥐어 싸맸다. 순간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고얀 새끼.”

연우는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눈 안 까냐? 더 쳐 맞을래?”

“…….”

무왕이 다시 곰방대로 위협하자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아까 전에 맞은 충격 때문에 아직도 골이 얼얼했다. 한편으로는 왜 갑자기 맞아야 하는 건지 짜증도 살짝 났다.

무왕은 그런 연우를 보면서 미간을 팍 찡그렸다. 그러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뭐라고 생각하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게 무슨……?”

“너에겐 스승과 제자 관계가 무엇이냐고 묻는 거다, 이 빌어먹을 제자 녀석아. 단순히 가르침을 주고받는, 그런 삭막한 것밖에 되지 않던?”

“…….”

연우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곰방대로 맞은 것보다 더 단단한 걸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인연을 맺은 지 며칠 되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전력을 다해서 널 가르쳤다. 진심을 다했단 말이지. 내 일부처럼. 자식에게 가르치듯이.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

“뭔가 답답한 게 있고, 급한 일이 있으면 재깍 달려와 하늘 같으신 스승님께 와서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냐? 그래야 도움을 주든지, 잔소리를 퍼붓든지,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그걸 못 하고 혼자 끙끙 앓다가 내뱉는 말이, 뭐? 식객을 그만둬? 미안해?”

“…….”

“뭐 이런 빌어먹을 놈이 다 있어? 그래도 판트와 에도라를 돌보는 걸 보고 기본은 돼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널 잘못 본 거냐? 네가 날 그저 거래 대상으로만 생각했으니 이러는 것 아냐? 왜? 내 말이 틀렸어?”

무왕의 말이 길어질수록.

연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정신이 멍하기만 했다.

무왕은 그를 혼내고 있었다. 다분히 짜증난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잔뜩 묻어났다.

혼이 난다는 것.

꾸중을 받는다는 것.

잔소리를 듣는다는 것.

이런 걸 받아 본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구에 있을 때. 부대장이 몸을 돌보지 않고 사지만 뛰어다니는 그를 이따금 혼내긴 했었지만, 그런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연우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서 숨기려 했다. 고민을 털어놓지 않고, 생각을 끝낸 후 결론만 통보하듯이 말했다.

그것이 무왕을 화나게 만들었다. 며칠 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자식처럼 생각했던 제자였는데. 이렇게 타인처럼 나서는 것이 못내 섭섭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연우가 무왕의 모습에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았다면. 그건 조금 과장된 표현일까.

“스승과 제자 관계라는 건 말이다, 못난 제자야. 분명 부모 자식 관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부모 자식 관계는 하늘이 맺어 준 천륜이지만, 스승 제자 관계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맺는 인륜이니까. 하지만, 오히려 인륜이니까 가질 수밖에 없는 깊은 ‘선’이란 게 있다.”

무왕은 의자에 깊숙하게 상체를 묻었다. 근심과 짜증이 가득하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물으마. 너에게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 거냐?”

연우는 아주 잠깐 지난 며칠 동안 무왕이 자신에게 대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진심을 다해 가르쳤다.

태도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 하고 모르는 게 있으면 같이 고민을 해 주었다.

그리고 좋은 성과를 보이면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그것은 분명 기특한 제자를 보는 스승의 눈빛이었다.

반면에.

자신은 그를 어떻게 대했던가.

무왕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그를 경계했다.

그의 진심을 보려 하지 않고, 그가 숨긴 속내가 무엇인지 의심부터 했다.

악의만 엿보려 했던 것이다.

무왕은 그럴 생각도, 그럴 필요도 전혀 없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연우는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율, 칸과 도일, 판트와 에도라를 만나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여전히 많은 것들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있었다.

먼 길을 가려는 그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이기도 했다.

과연 그런 자신의 태도가. 동생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놈들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연우는 긴 침묵 끝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무왕에 대해서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스승님이십니다.”

“그렇게 생각하긴 하냐? 정말?”

무왕은 조금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피식.

연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렇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럼 여태 그러지 않았다는 거네? 이런 미친놈이?”

무왕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왠지 연우의 말투에서 능글맞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탁!

무왕은 더 이상 쓸 일이 없게 된 곰방대를 탁상에 올려 두면서 말했다.

“됐다. 이만하면. 그럼 가라.”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서 무왕이 그를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무왕은 연우의 스승이기에 앞서, 외뿔부족이라는 단체를 이끄는 수장이었으니까.

단체 대 단체로 맺은 조약을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연우를 따라 전장을 이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연우의 스승이기에 그를 자유롭게 풀어 줄 수 있었다. 연우가 하려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 줄 수는 있는 것이다.

그만의 방식대로.

“그리고 이것도 갖고 가고.”

연우는 무왕이 아무렇게나 던져 주는 두 개의 책자를 받았다.

팔극권 중권과 하권. 구결과 동작이 세세하게 적혀 있는 비급이었다.

“고맙습니다.”

“으휴. 됐다. 그거나 받고 사라져.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제자고 뭐고 간에 죽빵부터 날려 버릴 거니까 각오하고. 그리고 알은 걱정 마라. 잘 맡아 두고 있을 테니.”

전장에서 만나게 되면 스승과 제자 관계로 있을 수 없다는 뜻. 적대 관계이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따스함을 알기에.

연우는 더더욱 깊게 허리를 숙였다.

한참을 있다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전달해도 부족하지 않을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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