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18화 (118/862)

18화. 용병 (2)

연우는 팔극권의 비급들을 품속에 잘 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에도라가 노심초사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다가, 연우를 보자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러다 연우의 머리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오라버니, 머리에?”

“음?”

연우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매만지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혹이 살짝 위로 나와 있었다. 곰방대가 맵긴 매웠던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마라.”

연우는 적당히 둘러대고,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에도라를 바라봤다.

“그보다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예. 따라갈 거예요. 말릴 생각은 마세요. 그냥 따라갈 거니까.”

연우는 에도라를 말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탑에 처음 오를 때에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아이였으니까. 어쩌면 때론 막무가내 같은 이런 모습이 에도라다운 것인지도 몰랐다.

결국 에도라도 외뿔부족. 고집은 아무도 꺾지 못한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부족을, 적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어요.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 거죠, 뭐.”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알았다. 말린다고 해서 말을 들을 것도 아닐 테니까. 알아서 해라.”

“히히.”

에도라는 이겼다는 듯이 배시시 웃었다.

연우도 그 모습을 보고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연우는 조용히 쿠람을 떠나고자 했다.

괜히 적대 진영으로 넘어가겠다는 사실을 구구절절 떠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괜히 창무신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쿠람의 성문을 나서려는데.

“너?”

뜻밖의 인물이 성곽 밖에서 팔짱을 낀 채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판트였다.

“흥. 동생 버리고 가니 좋습니까? 어디 야반도주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낮이니까 주반도주라고 해야 하나, 이건?”

판트는 연우 옆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에도라를 한껏 째려봤다.

이런 일이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에도라는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설마. 날 따라가려고?”

“그럼? 내가 왜 덥게시리 피약 볕에 나와 있다고 생각하우?”

“어디로 가려는 줄 알고?”

“최소한 여기보다는 재미난 곳으로 가겠지. 그리고, 흐흐. 원래 형님이 가는 곳은 항상 난리가 나지 않수?”

“…….”

연우는 순간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자신이 가는 곳에 사건과 사고가 많긴 했으니까.

“그리고 난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수.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영감님들 잔소리만 많지. 간섭은 일상 다반사지.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우. 그러니 어디든 좋으니 나 좀 데려가십쇼.”

연우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판트의 성격상 짜증이 날 법도 했다.

항상 전사들 사이에 섞여 회의를 하랴, 날뛰려고 해도 위험하다면서 보호받으랴, 이동하는 내내 답답한 틀에 갇혀 지내야만 했다.

그러니 화딱지가 났겠지. 어떻게 저항을 하려 해도 무왕의 눈치가 보여서 그러지도 못했을 테고.

그러다 연우와 에도라가 쿠람을 떠나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합류를 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때다 싶었겠지.

하지만 판트가 처한 처지는 에도라와 또 다르다. 백선가의 장이 연우에게 꺾이면서 판트는 부족 내에서 유력한 다음 대 왕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녀석을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레드 드래곤으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며 슬쩍 언질을 줬지만.

“으잉? 그렇게 재미난 짓을 꾸미고 있으면서 나한테 말도 안 했던 거요? 여태?”

오히려 판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잔뜩 폈다.

연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야만 했다. 판트는 무왕을 쏙 빼닮은 아들. 사고 치는 걸 너무 좋아했다.

“으핫! 안 그래도 쿠람에 있는 내내 청화도 새끼들 재수 없는 낯짝 보느라 속이 뒤틀리는 줄 알았는데. 그 얼굴들 망가지는 거 좀 볼 수 있겠네.”

결국 연우는 끝까지 제멋대로인 남매를 보면서 항복 선언을 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스승을 만난 것처럼. 자신은 좋은 동생들도 두게 된 것 같다고.

* * *

연우 일행은 쿠람을 벗어나, 스테이지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는 도시 베거스로 향했다.

“현재 레드 드래곤은 베거스를 중심으로 세를 뻗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해요. 청화도에서는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베거스를 공략하는 중이고요.”

에도라는 일족 회의에서 들었던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 11층의 전쟁 상황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했다.

외뿔부족의 쿠람 기습과 함께 시작된 청화도의 맹렬한 공세는 11층을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할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베거스에 이르렀을 때에는 속도가 많이 더뎌졌다고 했다.

“이유가 있나?”

“바할이 군을 이끌고 나타났거든요.”

연우의 눈이 빛났다.

“바할이?”

“예. 이번 11층에서의 총책임자를 맡게 되었다고 해요. 그 외에 다른 랭커들도 대거 참여를 했고요. 저희 일족이 나타난 만큼 저 쪽에서도 신경을 써야 할 테니까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11층을 그냥 포기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외뿔부족의 발을 묶어 놓을 최소한의 병력은 투입시켜야 할 테니.

아니, 그런 것을 집어치우더라도, 레드 드래곤은 그들 자존심상 서전을 빼앗기고 패배까지 겪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언제나 ‘용의 자긍심’을 모토로 삼는 녀석들이니까. 어떻게든 설욕을 하고, 11층을 탈환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거기다 청화도에는 무왕뿐만 아니라, 도무신과 창무신까지 가세했어. 레드 드래곤에서도 그걸 읽었을 테니…… 가만히 있지 않겠지. 11층에서의 전쟁, 생각보다 판이 훨씬 커지겠어.’

연우는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이 커지면 커질수록 도무신도 그만큼 11층에 발이 묶이게 될 테니까.

‘이왕이면 리언트도 이쪽으로 오면 좋을 텐데.’

연우는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느껴져 판트와 에도라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맛봐야만 했다.

그러다 판트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형님은 대체 어떻게 레드 드래곤에 투신을 할 생각이우? 저쪽에서 형님이라면 잔뜩 이를 갈고 있을 텐데?”

연우가 샤논을 쓰러뜨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확실히 레드 드래곤이 연우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말을 듣긴 했다.

“위험하기로 따지자면 너희들이 더 위험할 텐데?”

외뿔부족의 왕자와 공주. 확실히 이만한 인질들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알아서 찾아온다고 하면 두 팔을 벌려 환영하겠지.

하지만.

“형님 생각과 다르게 저쪽에서는 크게 관심 가지지 않을 겁니다. 우리 같은 놈들이 어디 한둘도 아니고.”

“……?”

연우가 무슨 말뜻인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도라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일족은 다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잖아요? 그 때문에 사실 개인적인 이유로 레드 드래곤이나 그쪽 산하 조직에 용병으로 참여한 부족원들도 꽤 있을 거예요.”

“아.”

연우는 그제야 무슨 말뜻인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외뿔부족은 마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많지만, 외부로 나가서 탑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부족의 행보와는 다르더라도, 인연을 맺은 곳이 있거나 하면 그곳의 용병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럼 그들과 일족이 부딪친다면……?”

“아마 서로 죽이려 하지 않을까요? 물론, 고의로 부딪치는 건 피하려 할 테지만.”

에도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적으로 만나도 서로 원망하는 일은 없어요.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전력을 다해서 부딪치지 않으면 서로를 모욕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그들의 자존심만큼이나 문화나 풍습도 인간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모습이니. 판트와 에도라도 일족을 떠나 레드 드래곤의 편에 선다고 해도 별반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다.

“뭐, 무왕의 자식들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우리 아버지 성격 알면 또 안 건드릴 거란 것도 아니까.”

판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확실히 무왕은 자식들이 인질로 붙잡혀 있다고 해서 크게 위축될 위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식들이 다치면 다친 것의 배 이상으로 되갚아 주겠다고 날뛸 양반이시지.’

연우는 무왕의 성격을 떠올리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여간. 레드 드래곤에 투신을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우?”

연우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미 너희들이 말한 것 중에 정답이 있지 않나?”

“우리가 말한 것?”

“바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에도라의 말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할이 나를 원할 테니까. 다른 압박도 그가 보호해 주겠지.”

판트와 에도라는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바할이 연우에게 보였던 관심은 아주 커 보였다.

‘외뿔부족에 참전했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신원 보증이 될 테고.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도 세미 랭커를 꺾은 나를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겠지.’

연우는 이미 자신이 처음에 바랐던 만큼 명성이 아주 많이 커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튜토리얼을 통과했거나 초심자 구간에 신기록을 쌓은 것은 그냥 흥미만 가는 요소일 뿐이다.

당장 전력에 도움은 되지 않는 유망주일 뿐이니까.

하지만 세미 랭커를 이긴 노비스는 다르다.

당장 전력에 도움이 될 뿐더러, 뛰어난 유망주이기도 하다. 거기다 외뿔부족과 청화도의 정보를 알고 있으며, 바할이 뒷배가 되어 주기까지 할 테니, 내버려 둘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까지 건네준다면.’

연우는 바할이 아주 탐내 할 만한 물건을 매만지면서 차갑게 웃었다.

이것만 있다면 앞으로 전쟁은 더 크게 불이 붙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런 연우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 * *

“거기 서라. 신원을 밝혀라.”

베거스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레드 드래곤 측의 플레이어들이 다가와 연우 일행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외뿔부족이 두 명이나 나타나자 얼굴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외뿔부족이 쿠람을 떠났나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거기서 연우는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독식자이며, 자신과 함께 온 외뿔부족은 레드 드래곤에 용병으로 참전하고자 온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을 바할 님께 전해 드리십시오. 제 선물이라 하면 아주 좋아하실 테니.”

플레이어들은 모두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말로만 듣던 독식자를 보게 되었으니. 몇몇은 연우를 원수 노려 보듯이 보기도 했다. 대개 연우 때문에 쿠람에서 죽은 플레이어들의 친한 동료들이었다.

거기다 같이 온 외뿔부족은 독식자와 함께 다닌다는 무왕의 자식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담담한 표정을 갖췄다. 자신들 선에서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베거스 안으로 사람을 보내 연우 일행에 대한 처분을 물었다.

연우가 건넨 물건은 간단한 검사로 이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바할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세 분을 정중하게 안으로 모시라는 바할 님의 명이 계셨습니다. 절 따라오시지요.”

연우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앞장서는 플레이어들의 뒤를 따랐다.

* * *

베거스는 모든 게 엉망이 된 쿠람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레드 드래곤 및 산하 조직의 플레이어들로 보이는 자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곳곳에서 행인들을 통제하는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삭막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그만큼 질서 있고 잘 정리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어들은 연우 일행을 보면서 눈을 반짝였지만, 굳이 시끄럽게 입을 열어 떠들지는 않았다.

얼마나 도시가 잘 통제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베거스의 중심부에 다다랐을 때.

“으하핫! 이게 누구야? 카인 아닌가. 자네가 오기를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아나?”

바할이 버선발로 마중 나와서 연우를 꽉 끌어안았다.

마치 아끼던 수하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환영하는 듯한 모습. 그는 진심으로 연우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우는 바할에 몸을 내준 채로.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정우에게도 이렇게 기뻐했었더라면.’

손등 위로 혈관이 높게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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