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용병 (3)
하지만 지금은 화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
연우는 웃으면서 말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바로 오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질 않더군요.”
“일찍 오고 늦게 오고가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같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바할은 연우의 어깨를 손으로 툭 두들겼다.
그 모습이 정말 친한 동료를 맞이하는 느낌이라, 주변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바할 님이 독식자와 인연이 있었나?”
“탑 외 지역을 방문하셨을 때. 직접 스카웃을 하셨다고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저렇게 신임을 할 정도라면 정말 깊은 친분이 있었다는 뜻일 텐데. 왜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거지?”
“음. 여하튼 신기하신 분이야.”
그들 사이에는 의문도 작게 오고 갔다.
하지만 연우는 왜 이렇게 바할이 자신을 환대하는지,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레드 드래곤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겠지.’
독식자라는 이름은 이제 레드 드래곤에서도 잘 알고 있다. 몇몇은 그를 빨리 제거해야만 할 루키로 체크해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을 거꾸로 돌린다면, 포섭했을 때 그만큼 뛰어난 가치를 지녔다는 뜻이기도 했다.
세미 랭커를 쓰러뜨린 노비스.
무왕의 제자.
명망 있는 루키.
이런 명성을 가진 녀석이 갑자기 청화도에서 레드 드래곤으로 전향을 한다면?
그것도 무왕의 두 자식을 데리고 투신을 한다면. 청화도의 정보도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도한 사람이 바할이라면.
‘명망도 그만큼 높아지겠지. 선물도 제법 마음에 들었을 테고.’
연우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바할이 환대해 줄수록 레드 드래곤 내에 자리를 잡는 건 그만큼 손 쉬워질 테니.
“그런데 무왕의 두 자제 분께서는 이렇게 적대 진영으로 넘어오셔도 되나? 무왕이 꽤 싫어하실 텐데.”
판트도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기 때문에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그러신가? 하긴. 청람가의 두 자제가 재능도 지략도 깊어 부족에서도 손을 대지 못한다는 말을 듣긴 했었지. 하여간 이렇게 오게 된 것, 환영하오.”
바할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연우 일행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자, 그럼 어서 안쪽으로 들어가자고. 마침 회의 중이었으니까. 소개해 줄 사람이 아주 많아.”
* * *
바할의 말대로, 작전실에는 열 명이나 되는 랭커들을 비롯해 여러 간부들이 앉아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자들을 따라 강렬한 기세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기운을 거둘 생각도, 갈무리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
연우는 그들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81개의 눈.’
청화도가 다섯 무신에 의해 공동 경영된다면, 레드 드래곤은 여름여왕을 중심으로 81명의 하이 랭커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81개의 눈’.
드래곤이 하나의 동공 안에 수십 개의 겹눈을 가지고 있다는 전설에서 따온 단어였다.
또한, 그들은 개개인이 전투 부대를 이끌며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많아.’
그들의 면면은 연우가 일기장을 통해 알고 있는 경우도 꽤 많았다.
‘화이트 드라고니안, 플레임 비스트, 브레이즈, 코로나 아나콘다, 적랑단, 이리 부대…… 꽤 많이도 끌고 왔어. 아예 11층에다 깽판을 놓으려고 그러나?’
연우는 슬쩍 그들의 면면을 훑다가,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을 때 흠칫 놀라고 말았다.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사람이 앉아 있었다.
푸른 장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장난기 가득한 모습의 미녀.
비록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붉은색이 아닌 푸른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복장도 간편한 것으로 입고 있었지만.
연우는 그녀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그러우, 형님?”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만 분위기가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 것 같았기에, 연우는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조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여긴 왜?’
저층 구간은 벌레들이나 사는 곳이라면서 혐오하던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난 건지.
11층에서의 전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지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바할이 연우 일행을 소개했다.
“인사하지. 독식자와 외뿔부족 청람가의 자제들이야. 저층 구간의 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름을 들어 봤겠지?”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흥미를, 또 누군가는 노기를 드러냈다.
하지만 대부분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라는 눈빛.
‘아니. 정확하게는 바할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는 건가?’
리언트와 마찬가지로, 아르티야 출신자들은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어 새로운 조직에서도 별달리 환영을 받지 못한다더니.
바할도 그런 것 같았다. 다만, 그는 뛰어난 실력과 명석한 머리를 지녀서 여름여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들 크게 관심이 없는 눈빛이군. 하지만 이걸 보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질 거야.”
탁!
바할은 종이 뭉치를 탁상에 올려놨다.
랭커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돌아갔다.
“이게 뭔지 아나?”
“뭡니까?”
누군가가 던진 질문에, 바할이 씩 웃었다.
“청화도 놈들의 군영 배치도.”
“……!”
“……!”
“그게 정말입니까?”
여태껏 귀찮아하는 티가 나던 랭커들은 눈을 부릅떴다.
특히 오늘 아침까지 청화도와 크게 싸움을 치렀던 이리 부대의 대장, 라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되묻기까지 했다.
“그럼. 확인해 보겠나?”
바할은 쥐고 있던 지도를 라훌에게 던졌다.
라훌은 재빨리 지도를 낚아채 활짝 펼쳤다.
11층의 스테이지가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 곳곳에 붉은색으로 ‘X’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라훌도 어렴풋이는 파악하고 있지만, 정확한 장소는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던 위치가 정리된 것으로 보아 청화도 무력 부대의 전선 배치도가 맞았다.
“……그럼 이걸 가져온 것은?”
“이 친구들이지.”
바할은 크게 웃으면서 대견하다는 듯 연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연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 바로 그가 바할에게 전달했던 ‘선물’의 정체였다.
무왕의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에 얼핏 봤던 지도를 용마안으로 기억해 두고, 그것을 그대로 카피해 뒀던 것이다.
물론, 외뿔부족에 해가 갈 수 있는 내용은 담아 두질 않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레드 드래곤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적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어도, 숨겨진 군영이나 보급 기지의 위치까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가뜩이나 지지부진한 11층의 승기를 이쪽으로 확 돌릴 수 있을 테니까.
“어떤 것 같나?”
바할의 질문에 라훌은 흠칫거렸다. 그러다 살짝 안색을 바꾸면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우선 확인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화도 쪽에서 역으로 함정을 파려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라훌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연우와 판트 등을 바라봤다.
바할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걸 확인해야 할 곳이 바로 붉은 이리이지 않나?”
“지금 바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훌은 금세 작전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잔뜩 흥이 오른 얼굴이었다.
만약 지도가 진짜라면 단번에 역전을 꾀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바할은 좌중을 쓱 훑어봤다.
“이 지도가 진짜라는 가정 하에.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주 큰 공을 세워 준 것인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별 이의가 없으면 내 선에서 이들에게 적절한 지위와 보상을 주고 싶은데.”
간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심드렁했던 눈빛은 이제 사납게 번뜩이고 있었다.
바할은 그것을 무언의 긍정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럼 모두 동의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카인.”
“예.”
연우가 앞으로 나서면서 고개를 숙였다.
“마침 외인부대의 2조 조장 자리가 비었어. 거길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연우의 눈빛이 빛났다.
외인부대는 레드 드래곤 측에 참여하거나 고용된 용병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인원만 3천 명에 달하는 대규모 부대였고, 레드 드래곤에서 직접 관리하기 때문에 입대 조건도 아주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지원 물자도 풍부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곳의 조장이라면 최소한 수백 단위의 플레이어들을 관리하는 자리다.
외부인을 곧바로 앉힌다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만큼 연우가 가져온 선물과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
연우로서도 높은 직급일수록 행동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대환영이었다.
‘이곳에서 착실하게 단계를 밟아 위로 올라간다.’
위에 있을수록 기회는 많아질 테니까.
도무신이든, 리언트든, 바할이든…… 기회가 된다면 바로 잡을 생각이었다.
‘눈먼 칼과 화살이 날아드는 곳이 전쟁터니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겠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장(戰場)은 긴장과 공포가 뒤따르는 곳일지 몰라도, 연우에게는 자기 집 안방처럼 편한 곳이었다.
20대의 절반을 험악한 전장에서 굴렀다.
온갖 이능과 마법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전장은 전장. 연우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무신? 리언트? 바할?
그들이 아무리 뛰어난 랭커라고 하더라도. 연우는 전장에서만큼은 저들이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착실하게 저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 생각이었다.
‘정우야. 조금만 기다려라. 빌드만으로는 심심하겠지? 다른 놈들도 곧 그리로 보내 주마.’
가장 먼저 잡을 녀석은 도무신. 그다음은 리언트. 마지막은 바할.
이미 순서도 확실하게 매겨 둔 상태.
그리고 그것을 위해 세세하게 짠 계획도 있었다.
지도는, 그것을 위한 첫 단계에 불과했다.
‘저 여자가 걸리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아니. 오히려 좋아. 판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연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 전에 바할의 신임을 사는 게 우선이야.’
그러한 속내를 숨긴 채.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미리 말해 두지만, 난 너희들을 믿지 않는다.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바할의 지시에 따라 연우 일행을 외인부대 2조로 안내하게 된 자는 자신을 앰버라고 밝혔다.
‘화이트 드라고니안의 대장, 독부엉이 앰버.’
연우는 일기장에 적혀 있던 레드 드래곤의 계보를 되짚었다. 죽은 샤논의 상사이기도 한 사람.
때문에 앰버는 연우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못내 짜증 난다는 듯. 하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가차 없이 수하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가 물씬 풍겼다.
연우는 녀석 때문에 생활이 불편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정도는 이미 감안하고 있어서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앰버는 대꾸도 않는 연우를 노려보다가, 외인부대 2조가 머물고 있는 건물의 문을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쾅!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숫자는 대략 250명. 개인 시간을 즐기고 있었던지, 녀석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도박을 하거나 칼을 갈고 있다 말고 그쪽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하나같이 사나운 기세가 느껴지는 녀석들이었다.
“오늘부터 너희들의 조장을 맡게 된 카인, 그리고 새로운 조원이 된 판트와 에도라다. 알아서 맞이하도록!”
앰버는 그 말만 남기고 연우를 노려보면서 몸을 돌려 홱 하고 사라졌다.
“조장?”
“안 그래도 오늘 누가가 배치될 거라는 말은 들었었는데. 오긴 왔나 보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지 않아? 군영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그런데 외뿔부족은 청화도 쪽에 있지 않았어? 이쪽으로 노선을 갈아타기라도 했나?”
조원들은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연우와 판트, 에도라를 살폈다. 새롭게 온 조장과 조원들을 탐색해 보려는 것이다.
용병들의 기질은 대개 사납다. 한평생 거친 칼 밥만 먹고 살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보다 고수인지 하수인지 판별하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다.
그중에는 어여쁜 외모를 가진 에도라를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에도라는 그런 녀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연우는 녀석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실내를 가로지르면서 중앙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용병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몇몇이 뭔가를 떠올린 듯 눈살을 가늘게 좁혔다.
“그런데. 저 가면, 혹시 독식자 아냐?”
“뭐?”
“맞는 것 같은데. 귀신같이 생긴 까만 가면이랑 갑옷. 거기다 같이 따라다니는 외뿔부족 남매. 딱 독식자 아냐?”
술렁거리기 시작한 입소문은 금세 용병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대놓고 칼을 꺼내면서 살의를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연우가 11층의 히든 피스를 독식할 때에 손해를 봤던 피해자들이었다.
그러다 말로만 듣던 연우가 직접 등장하자, 그때 겪었던 고생이 저절로 떠올랐던 것이다. 죽은 클랜 연합의 잔당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형님. 못 보던 사이에 인기가 아주 많아지셨나 보우?”
판트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가면 아래 비치는 연우의 두 눈은 귀찮다는 투가 역력했다.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었다지만, 그래도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그때.
몇몇 용병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끼와 칼 따위를 든 채. 대놓고 살의를 드러내면서.
“이보쇼. 조장 나으리. 이야기 좀 나눴으면 좋겠는데?”
그들을 보면서.
판트가 뒤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자살 방법도 가지가지라니까.”
에도라가 동의한다는 듯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