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용병 (4)
연우가 눈살을 살짝 찡그리면서 판트를 돌아봤다.
판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냐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연우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일어난 용병들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거지?”
귀찮음과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질문.
용병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들은 위협을 준답시고 날이 잔뜩 선 도끼를 보였다.
“행색을 보니까, 꼭 누구를 떠올리게 해서 말이지. 그리고 우리가 그 누구한테 쌓인 게 꽤 많거든. 그래서 조장 나으리의 정체를 묻고 싶은데. 통성명이나 나눌 수 있을까 싶어서.”
배배 꼬아서 말했지만, 정체를 밝히라는 의미였다.
연우는 더 이상 녀석들을 상대하는 게 귀찮게 느껴졌다. 팔짱을 끼면서 싸늘한 어투로 대답했다.
“너희들이 생각한 누구가 맞다면?”
“뭐?”
“독식자, 맞다고.”
“이 새끼가!”
용병들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면서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크게 넓지 않은 건물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연우는 자세를 풀지 않고 뒤에 있던 판트를 불렀다.
“판트.”
“왜 그러우?”
“저것들, 치워.”
“형님 일을 내가 왜?”
“내가 귀찮으니까. 아니면? 내가 할까?”
“……하여간 인성 하고는.”
판트는 가볍게 투덜거리면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자세를 풀며 주먹을 꽉 쥐는 순간, 입가에는 포악한 미소가 걸렸다.
“뭐, 나도 참 심심하던 차여서 잘됐다 싶지만!”
콰앙-
판트는 재미난 놀이거리를 찾았다는 듯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우악스러운 주먹을 거세게 휘둘렀다.
파직! 파지직!
주먹 끝에서 뇌기가 화려하게 튀어 올랐다. 청람가의 비기, 뇌정권이었다.
쿠르릉-
샛노란 뇌전과 시끄러운 굉음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그렇게 녀석들을 단숨에 쓸어버리려는 찰나.
“대신에 아무도 죽이지 말고.”
“쳇!”
판트는 주먹을 날리다 말고 갑자기 뒤에 붙은 연우의 조건에 가볍게 혀를 찼다.
덕분에 튀어 오르던 뇌기가 현저하게 줄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위력은 충분했다.
쾅! 콰쾅!
판트는 손에 닿는 건 모조리 부춰 놓았다.
무기가 날아오면 그냥 맨손으로 잡아 부러뜨렸다. 몸이 날아오면 팔꿈치로 갈비뼈를 날려 버리고, 마법이 날아온다 싶으면 뇌전을 터뜨려서 통째로 지웠다.
“아아악!”
“으악! 이게 뭐야!”
부수고, 짓밟고, 부러뜨린다.
달려들었던 녀석들은 죄다 팔다리가 뒤로 접힌 채로 튕겨 났다. 바닥에는 녀석들의 피로 흥건했고, 공기는 먼지로 가득했다.
“내 팔! 내 파아알!”
“다리가! 다리! 아악!”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판트는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맘껏 뛰어놀았다.
째짹! 잭!
『주인! 주인! 나 저 덩치 마음에 들어!』
연우의 어깨 위에 올라탄 짹짹이는 재미있다면서 크게 지저귀어 댔다.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크게 웃어 댔다.
연우는 아주 잠깐 아직 사고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짹짹이에게 판트를 닮지 말라는 말을 해야 하나 싶다가,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뒈져어엇!”
용케 기척을 숨기고 다가왔던 한 녀석이 칼을 크게 휘두르면서 달려들었다.
연우는 그쪽으로 손을 뻗지도 않았다.
대신에 짹짹이가 그쪽으로 부리를 열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저리 가!』
콰앙!
녀석 앞으로 갑자기 푸른색 불꽃이 튀어 오르면서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용병은 불길을 홀라당 뒤집어쓰면서 튕겨 나 벽을 부수고 바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흥! 귀찮게 하고 있어!』
짹짹이는 날개로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새가슴이 귀여웠다.
에도라는 그런 짹짹이를 살짝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신수의 힘을 계승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이 정도의 강한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연우는 다시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실내는 싸움이 끝나 있었다.
아니, 일방적인 폭행을 두고 싸움이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일단 상황은 끝난 상태였다.
바닥에는 팔다리가 부러진 플레이어 오십여 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고 있었다.
남은 이백여 명은 벽 쪽에 잔뜩 떠밀린 채 두려움에 젖은 눈빛으로 판트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에이씨. 손에 먼지만 묻었잖아.”
판트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별것 아니라는 듯이. 그러다 덜덜 떨고 있는 녀석들을 돌아봤다.
녀석들은 전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미 기세는 완전히 꺾여 있었다. 아무도 판트가 주는 위압감을 거스르지 못했다.
하지만.
판트는 거기서 그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쭈? 아직도 서 있어? 다들 대가리 안 박아?”
녀석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머뭇거렸다.
하지만 판트가 다시 뇌기를 끌어올리자,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지면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안 해?”
판트의 시선은 부상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오히려 주제도 모르고 덤빈 놈들이기 때문에 더 거칠게 굴렸다.
끝까지 반항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두어 차례 더 잘근잘근 밟아 주자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목이 부러지지 않은 이상, 예외는 없었다.
결국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늑대 무리처럼 사나운 기세가 흐르던 실내는 전부 정리가 되고 말았다.
판트는 이제야 속이 좀 속 시원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왜 이렇게 꼭 두들겨 맞아야만 정신을 차리는 인간들이 많은 건지. 그게 참 의문이다 싶었다.
하지만 에도라는 조금 걱정 섞인 얼굴이 되었다.
“아, 저 화상…….”
이들은 전부 앞으로 연우의 손발이 되어 줄 사람들이었다. 이래서야 부상 병동일 뿐. 기를 꺾었다고 해도 쓸모가 없으면 필요가 없을 뿐인데.
어떻게 의무대에 가서 포션이라도 받아 와야 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연우가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화르륵!
허공을 따라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푸른색 불꽃이 일어났다.
따뜻하고,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불꽃. 성화였다.
에도라는 연우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연우가 성화에다가 가볍게 검지를 튕겼다. 그러자 성화가 수십 개로 분리되면서 부상자들에게로 날아들었다.
“어? 어어?”
“이, 이게 뭐야?”
녀석들은 갑자기 불꽃이 날아오자 움찔거렸지만, 곧 기분 좋게 체내로 들어오는 열기를 느끼고 깜짝 놀랐다.
찢어졌던 상처가 아물었다. 뒤틀렸던 뼈마디가 제자리를 찾고, 끔찍했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몇몇은 지난 싸움에서 입었던 부상이 일부 낫거나, 독기가 해소 되어 깜짝 놀라기도 했다.
물론, 모든 상처가 완전히 나을 정도로 완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눈에 띌 정도로 빠른 회복력을 가져다준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말로만 듣던 큐어나 리커버리가 이렇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회복 마법들은 대부분 몸값 비싸기로 유명한 신관이나 사제들에게서나 받을 수 있었다.
용병들은 멍한 시선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판트와 에도라도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하지만 성화의 옵션인 ‘정화’의 효능을 강화시켰을 뿐인 연우는 눈빛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할 일을 시킬 뿐.
“판트.”
“예? 에?”
멍하니 묻는 판트에게.
연우는 머리를 박고 있는 놈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놈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더 부러뜨려.”
* * *
‘아, 악마 새끼…… 아니, 악마보다 더한 새끼.’
‘저건 인간도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씨발. 낫게 하고 부러뜨리고, 낫게 하고 부러뜨리고…… 저게 사람이냐고……!’
용병들은 억울했다. 울고 싶었지만, 속에 쌓인 말은 많았지만 차마 꺼내질 못했다. 앓는 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은 정말 몇 시간 동안 생지옥이란 게 뭔지 톡톡히 겪어야만 했다.
반항을 했던 놈들은 물론, 뒤로 빠져서 관망하려던 녀석들까지.
2조에 소속된 용병들이라면 한 명도 남김없이 팔다리가 부러졌다가 도로 붙는 끔찍한 경험을,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 맛봐야만 했다.
연우는 그들의 비명이나 애원을 듣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판트가 작업(?)을 마치면 성화를 뿌려 복구시키고, 다시 작업을 마치면 또 한 번 복구시키는 작업만 반복했다.
그걸 몇 차례 반복하다 보니 몇몇 용병들은 아예 맛이 가 버렸다.
하지만 성화는 정신도 똑바로 회복시켰다. 그들이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게 꽁꽁 묶어 버린 것이다.
결국.
마지막까지 반항적인 눈빛을 보였던 자들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연우를 간보려던 자들도 꼬리를 말아야만 했다.
이제는 연우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 정도로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한 가지만 말하지. 난 말 잘 듣는 사냥개가 필요할 뿐이지, 주인을 무는 미친개는 필요 없다.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
“…….”
250명의 용병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등골을 따라 오한이 스치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리고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클랜 연합들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를.
수백 명에 달하던 플레이어들이 독식자 한 명을 잡으러 나섰다가, 안개 낀 숲에 사로잡혀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정보를 흘렸던 별빛 술집은 아예 초토화가 되어 뿌리가 뽑혔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 독기를 지닌 자가 여태껏 그들을 살려 둔 건 단지 필요에 의해서일 뿐.
하지만 더 이상 그 필요가 없다면 가차 없이 내치겠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설사 레드 드래곤에 소속된 입장이라고 할지라도.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연우는 그럴 만한 독기와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꿀꺽.
용병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연우의 서늘한 눈빛이 다시 그들의 목을 옥쩔 것 같아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조아려졌다.
‘이제 골치 아프게 할 일은 없겠지.’
연우는 그런 용병들을 보면서 앞으로 충실한 사냥개가 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몇 번이고 요긴하게 쓰일 녀석들이었다.
살아서는 말 잘 듣는 사냥개로. 그리고 죽어서는 좋은 영양분이 될 망령으로.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용병들은 무거운 공기를 버티지 못하고 자꾸 땅바닥만 쳐다봤다.
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뒷일을 전부 판트에게 맡겼다.
판트는 부족을 나와서도 왜 그런 귀찮을 일을 도맡아야 하냐면서 징징댔지만, 연우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딱 한마디만 던져 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싫으면 부족으로 돌아가든가.”
“……젠장! 하면 되잖아요! 하면! 진짜 저 인성……!”
판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이 회복된 용병들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조금이라도 더 화풀이를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용병들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렸다.
아아악!
* * *
“판트 오빠는 여기 와서도 고생이네요.”
“자기 팔자지.”
에도라는 판트의 절규가 들리는 건물을 슬쩍 돌아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부족의 경영이 너무 어려워서 도망치다시피 한 녀석에게, 다시 비슷한 일을 떠안기고 말았으니.
하지만 원래 친오빠의 고통은 본인에게는 한없이 큰 행복. 에도라의 입가에서는 웃음기가 떠나질 않았다.
그런 에도라를 보면서 연우도 따라 가볍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작전실에서 우연히 봤던 푸른색 머리칼의 여자가 떠올랐다.
단아해 보이지만 강한 힘을 품고 있던 여인. 그 힘은 연우에게도 제법 낯이 익은 기운이었다.
‘용종의 힘.’
용의 기운을 가진 자는 탑에서도 단 세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은 정우였지만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용과 인간의 혼혈인 반인반룡(半人半龍)이었지만 실종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레드 드래곤 내에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그자였다.
‘여름여왕.’
연우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레드 드래곤의 수장이, 나타났단 말이지?’
* * *
“제법 괜찮은 애, 물었어?”
모두가 떠난 작전실에서.
푸른 머리칼을 가진 여인, 여름여왕은 화사하게 웃었다.
바할은 그런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저도 그 아이가 이런 귀중한 정보를 물어다 줄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흐흥.”
여름여왕은 머리 끝자락을 검지로 빙빙 돌리면서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방금 전에 라훌은 스테이지를 돌아다니고, 지도에 표시된 구역에서 청화도의 기척을 찾을 수 있었다는 보고를 올렸다.
지도가 틀리지 않았다는 뜻.
그 뒤로 간부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각자가 한 곳을 도맡고, 그곳으로 무력 부대를 직접 이끌고 움직였다.
아마 지금쯤 새로운 역공이 시작됐을 것이다.
청화도 쪽도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많이 놀라겠지.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 아이한테?”
“예.”
바할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여름여왕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능구렁이 같은 영감이 거둔 셋째라는데. 누가 관심을 안 가지겠어?”
여름여왕이 능구렁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금 가리킨 이는 무왕.
“그러니까 한 번 잘 다뤄 봐.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무슨 꿍꿍이도 있는 게 분명한 것 같고.”
“명심하겠습니다.”
바할은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도 연우가 가져온 선물은 전혀 뜻밖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으니까.
스승인 헤노바의 친인이라고 해서 관심을 가졌다가, 도중에 외뿔부족으로 돌아서며 청화도에 가담했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났었는데. 그런 화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었다. 여러모로.
“그보다. 리언트는?”
“여전히 골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검무신이 옆을 지키고 있으니,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리언트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가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바할이 일부러 놓아줬기 때문이었다.
‘돌’이 있는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언제든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그에게는 따로 추적 장치를 붙여 두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리언트는 돌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위치만 계속 체크하고 있는 중이었다.
“짜증 나네. 역시. ‘돌’을 연구하고 있는 중인 거겠지?”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최근에 도무신이 4대 신수들을 전부 정리한 것도, 돌의 연구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 중에 있습니다.”
“흠.”
“하지만 이대로는 완성이 될 때까지 돌을 꺼내지 않을 듯해서. 한 가지 미끼를 던지고자 합니다.”
“미끼?”
그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에, 바할은 자신이 구상한 계책을 늘어 놓았다.
모든 내용을 듣고 난 뒤, 여름여왕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혓바닥으로 붉은 입술을 농염하게 훑었다.
“깜찍한 걸. 괜찮을 것 같아.”
“감사합니다.”
“보상으로. 내 발을 핥을 기회를 주지. 어때?”
“영광입니다.”
여름여왕은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할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그녀의 구두를 벗겨 발끝에 얼굴을 가져갔다. 향기로운 장미꽃 향기가 코끝에 풍겼다.
여름여왕은 그런 바할을 보면서 배배 꼬던 머리카락을 풀었다.
대신에 그녀는 손으로 머리끝을 매만졌다.
원래는 불타는 것 같은 화려한 적발(赤髮)이었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버린 청발.
이 머리는 그녀의 상징이자, 마력의 근간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예전의 색을 되찾아야만 했다.
빌어먹을 헤븐윙 같으니. 죽은 녀석 때문에 자신이 이런 더러운 저층 구간까지 내려오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래. 그러니 빨리 찾아 줘. 그 돌이란 것. 미완성이라도 좋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여름여왕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게 있어야지만. 내 드래곤 하트를 복구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