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21화 (121/862)

21화. 임무 (1)

쾅!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형님!”

창무신 플랑은 무왕이 머무는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는 연우를 비롯해 판트와 에도라가 레드 드래곤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였다.

거기다 청화도의 세밀한 정보까지 떠넘긴 건지, 레드 드래곤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 꽤 많은 피해를 입어야만 했다.

창무신이 이끄는 신창단과 혈창단을 비롯한 여러 조직도 꽤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가 제자처럼 기르다시피 한 아이들이기 때문에. 분노는 더 끓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향했다.

전부 창무신도 알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장로들. 무왕은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한다지만, 사실 부족 내에서는 부족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었다.

“플랑, 이게 무슨 짓이지? 아무리 족장과 그대가 형제 사이라고 해도, 아니, 형제 사이이기 때문에 더 예의를 갖춰야 할 텐데? 이곳은 엄연한 공식 석상이다. 똑바로 자세 갖춰라.”

그때, 안경 써서 학자 같은 인상을 주는 장로가 고개를 들었다.

대장로. 창무신이 어린 시절부터 유독 어려워했던 사람이었다. 아니, 깐깐한 성정 때문에 무왕을 제외하면 모두가 어려워했다.

무공 실력도 무왕에 못지않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창무신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거려야만 했다.

“아니지. 이미 이번 협약을 계기로, 그대의 왕족으로서의 직위를 모두 내놓게 되었으니. 청화도의 창무신으로서 대해야겠지. 창무신, 예의를 갖춰 주시오.”

“…….”

창무신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노에 눈이 멀어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아주 잠깐 잊고 말았으니까.

사실 외뿔부족이 오랜 기간의 은거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창무신이 그들과 맺은 한 가지 맹세 때문이었다.

뿔의 맹세.

자신이 가진 뿔을 내놓겠다는 맹세.

본디 외뿔부족은 부족의 시조이자 그들이 모시는 신, 소호 금천에 대한 뛰어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호 금천의 가호 덕분에 부족이 오랫동안 전성기를 누리고, 무공이라는 비전을 통해 탑에서 뛰어난 입지를 갖췄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부족 내에서는 소호 금천의 혈통을 타고난 직계 왕족들에 대한 존경심이 뛰어났다.

물론, 같이 지낼 때에는 계급 의식을 두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그 바닥에 존경심과 외경심이 같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왕족들도 그만큼 많은 의무가 지어져 행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창무신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무왕이 왕이 되면서 방계로 밀려나 제약이 많이 풀렸다지만, 그래도 왕의 친동생이라는 틀은 아주 견고하고 단단했다.

창무신은 이런 왕족으로서의 의무와 혜택을 모두 벗어 버리겠노라, 그리고 나아가 자랑스러운 외뿔부족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것이 바로 뿔의 맹세.

그리고 부족은 왕족의 뿔을 받는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어 줘야만 했다.

그것이 외뿔부족이 지난 은거를 깨고 청화도의 편에 서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맹세와 의무가 있다고 해도, 외뿔부족으로서는 자의가 아닌 타의로 끌려 나온 것이나 마찬가지.

때문에 부족에서는 창무신을 고깝지 않게 보는 시선이 꽤 많은 편이었다.

또한, 그들로서는 자랑스러운 부족을 저버리고 다른 곳에 붙어먹은 작자인 것이니.

대장로도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창무신은 크게 숨을 골라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무왕은 가장 끄트머리에서 웃으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창무신은 무왕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 전의 기억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형제이기 앞서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지만, 유쾌한 행동과 달리 속내는 도저히 알 수 없어 멀게만 느껴졌던 형.

그래서 창무신은 자신을 회유하는 검무신을 따라 세상으로 나와 청화도를 설립하게 되었다.

뿔의 맹세를 한 지금도 그때와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창무신은 생각과 마음을 빠르게 다잡을 수 있었다.

“회의 중에 무례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게 되었소. 하면, 청화도의 창무신으로서. 책임자로서. 무왕께 여쭐 것이 있소.”

창무신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현재 스테이지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 독식자와 판트, 에도라의 전향(轉向). 무왕께서는 알고 계시었소?”

무왕은 재미나다는 듯이 웃었다.

“알다마다. 내 제자와 자식들의 일을 모른다면 천치겠지.”

창무신은 주먹을 꽉 쥐었다. 목에 핏대가 잔뜩 섰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방관 할……!”

“내 맘.”

“무슨!”

“내 맘이라고.”

“……!”

창무신은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뻘겋게 충혈 된 두 눈이 무왕을 잔뜩 노려봤다.

하지만 창무신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아무리 항의하고 따져 본다고 해도, 형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다른 뭔가를 하려 하겠지.

무왕은 화를 억누르는 창무신이 조금 대견스럽다는 듯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질 급했던 동생도 철이 든 것이다.

“내 제자와 자식의 일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청화도에 피해가 간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그들의 일탈은 우리들 선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 너희들이 해결할 일은 아닐 텐데?”

“…….”

“그리고 우리 부족은 개개인의 일탈에 대해서는 일절 참견하지 않아. 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책임이지, 부족이 책임질 필요는 없지.”

창무신은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왕은 과거 검무신과 네가 일족을 떠나간 것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주는 다른 의미도 알고 있었다. 창무신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뜻은, 그 아이들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들의 손으로 죽여도 된다는 뜻이오?”

“말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그들이 책임질 몫. 우리는 일절 관여하지 않아.”

“그 말, 달라지지 않으리라 믿겠소.”

창무신은 무왕을 한 차례 쏘아보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

쾅!

문을 닫는 손길에 힘이 가득 실려 건물이 살짝 떨렸다.

무왕은 그런 동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하여간. 철이 좀 들었나 싶었더니. 여전히 저 성질 머리는 어떻게 못 한단 말이지.”

장로들 사이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대장로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무왕에게 물었다.

“플랑의 일은 그렇다 치고. 족장, 정말 카인과 판트, 에도라의 일은 이대로 둘 생각인가?”

장이 처참하게 망가진 이후로. 판트는 계속 왕 후보로서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쿠람 공략 때에도 꽤 많은 발전을 보여 장로들의 긍정적인 판단을 끌어냈다.

하지만 갑자기 적대 진영으로 넘어가니 걱정이 든 것이다. 차대 왕의 선출에 대해서도 영향력이 큰 대장로로서는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무왕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규율은 바뀌지 않아, 영감.”

“흠.”

대장로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무왕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좀 더 고행을 겪어 봐야, 왕으로서의 그릇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로군.”

무왕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기만 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장로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왕의 심중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

“알았네. 족장의 뜻대로,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지. 그럼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세. 이후 레드 드래곤과의 충돌에 관한 것이네만…….”

그들의 차기 행보에 대한 회의가 다시 이어졌다.

* * *

“우측으로. 일보(一步).”

우르르-

“좌측으로. 검.”

촤촤촥!

“다시 회전.”

팔짱을 낀 판트의 명령에 따라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250명이 일제히 자로 잰 듯이 오와 열을 맞춰서 빠르고 깔끔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 하여금 감탄을 저절로 부를 정도였다.

같이 연무장을 쓰고 있던 외인부대 내 다른 용병들도 길을 지나다가,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정도였다.

용병이란 원래 자기들 입맛대로 사는 존재. 외인부대라는 틀 안에 갇혀 있어도, 어느 정도 자율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 며칠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강과 군율이 단단하게 잡혀 눈빛도 또렷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지휘하는 판트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은지 눈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똑바로 안 해? 한 번 더 구르고 싶어? 다시 사선으로. 찌르기.”

으아악!

아악!

용병들은 기겁을 하면서 더 세게 악바리를 질렀다. 앞으로 찌르는 무기에 힘과 박력이 잔뜩 실렸다.

그리고.

그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연우와 에도라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다만, 용병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건 에도라뿐. 연우는 조용히 책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흘 정도만 구른 것치고는 그래도 제법 그럴 듯해진 것 같아요.”

그러다 연우는 에도라가 툭 던진 말에 잠시 책자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용마안으로 잠깐 판트와 2조의 훈련을 살펴보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확실히. 쓸 만해졌어.”

판트가 2조에게 가르치는 전술 대형은 사실 외뿔부족에서 하급 전사들에게 가르친다는 ‘팔진도(八陣圖)’를 살짝 비튼 검진(劍陣)이었다.

검진은 각 상황에 맞는 전사들의 여러 대처 방안과 행군, 숙영 및 군사 배치를 비롯한 작전 방 안을 넓게 포함하는 진법의 한 분야였다.

팔진도는 그중 대표적인 검진으로, 빠른 습득이 가능하고 일사불란한 행동이 가능했다.

특히 갖가지 일이 벌어지는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가장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 특별히 부탁해서 판트더러 2조에게 가르쳐 보라고 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저 녀석, 급한 성질 머리만 고치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어. 아니, 정확하게는 남들을 이끄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연우는 어렴풋하게나마 왜 판트가 외뿔부족 내에서 왕의 후보로 불리는지를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저렇게 단순하고 과격한 녀석이 무슨 일족의 왕이 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판트는 그런 단점을 모두 벗어 던지고도 남을 만큼 강한 장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카리스마와 리더쉽.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은연중에 휘어잡는 힘과 패기가 있었다.

연우도 아프리카에서 머물 때 부대를 이끌어 봤기 때문에 판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 건 누군가가 가르친다고 해서 쉽게 익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왕의 자식으로 태어나, 오랫동안 왕족으로서의 규율과 의무를 공부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이 뛰어났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뛰어난 자만이 누군가를 이끌 수 있을 테니. 어쩌면 판트의 단순한 면모는 그런 면에서 아주 좋은 것인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계속 마음 놓고 맡겨도 되겠는걸.’

연우는 레드 드래곤에 머무는 동안 2조에 대한 권한은 모두 판트에게 떠넘기면 되겠다 싶었다.

판트가 알게 된다면 진절머리를 치겠지만. 물론, 거절한다면 곧바로 쿠람으로 내쫓아 버릴 생각이었다.

연우는 점점 더 정교해지는 2조의 훈련을 좀 더 지켜보다가, 다시 책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에도라가 옆으로 슬쩍 다가왔다.

“그런데 아까 전부터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팔극권 중권.”

에도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연우가 팔극권의 상권을 전부 익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권과 하권까지 무왕으로부터 받았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만큼 연우가 무왕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기 때문에. 에도라는 자기 일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뿌듯했다.

“그런가요? 그런데 중권부터는 오라버니께도 조금 어려운가 보네요. 4일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중권을 보고 계시다니.”

에도라는 괴물 같던 연우에게도 사람 같은 면모가 있다는 사실에 살짝 웃었다.

팔극권은 무왕이 만든 여러 무공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한다.

3개로 분할할 만큼 초식의 수도 방대하고, 뒤로 갈수록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에 형태를 외우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거기다 이것을 ‘이해’까지 하려면 족히 몇 년은 필요로 할 정도였다.

장로들 중에도 팔극권을 붙잡다시피 하면서도 다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러 있을 정도였으니.

연우도 그런 것 같았다.

확실히 진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고 해도 이제 무공에 갓 입문했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에도라는 자신이 도와줄 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조금 기뻤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팔극권을 모두 익혀 둔 상태. 무왕이 조언을 하지 말라는 말도 남기지 않았으니, 당분간 연우의 옆에서 충분히 도와줄 수 있을 듯싶었다.

이왕이면 단둘이서. 오붓하게.

하지만.

“아니. 형태는 외웠고, 구결의 내용도 조금씩 파악하고 있는 중이야. 다만,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싶어서. 놓친 게 있지 않을까 해서 되짚어 보는 거지.”

“……!”

에도라는 자신의 예측이 정확하게 빗나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제는 연우가 괴물처럼 보였다.

‘그걸…… 다 익혔다고?’

팔극권의 중권과 하권은 각각 32, 16개의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뒤로 갈수록 복잡함과 정교함은 상권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단 나흘 만에 그걸 다 외워?

거기다 아리송한 종교 경전 같은 내용들을 파악하고 있기까지 하다고?

그러다 에도라는 연우가 이전에도 단 나흘 만에 무공을 뚝딱하고 만든 괴물이라는 사실을 떠올 릴 수 있었다.

몇 번씩 비슷한 광경을 보고도.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우리 판트 오빠, 또 머리 쥐어 뜯으면서 좌절하겠네.’

에도라는 왠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판트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놓치고 있는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연우는 정확하게 팔극권을 파악하는 게 아니라, 낱낱이 분해해서 천익기공과 뒤섞고 있는 중이라는 것.

‘팔극권 그 자체도 뛰어난 무공이지만. 그래도 연원이 다르니 마력회로와는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어. 여기에 맞추려면 어느 정도 개작(改作)이 필요해.’

이런 건 팔극권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더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에게는 이런 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용종의 특성인 ‘용의 지식’의 도움을 받고 있는 데다가, 용마안이 비치는 결을 따라 재조립을 하는 것이니. 맞춰 놓은 순서를 차근차근히 밟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집념과 의지, 그리고 명석한 오성이 없으면 해낼 수가 없을 만큼 대단한 일.

덕분에 연우는 최근에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계속 보고 있었다.

[98층의 여러 신과 악마들이 당신을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몇몇 신과 악마들이 당신에게 흥미를 가지고 논의를 나누고 있습니다.]

[헤르메스가 흐뭇한 미소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98층이 신과 악마들이 자신을 관찰한다는 내용.

그중에는 익숙한 이름도 있었다.

‘헤르메스라.’

연우는 올림포스의 보고에서 만났던 헤르메스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털었다.

처음에는 98층의 관심이 조금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귀찮을 따름이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팔극권의 남은 부분들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책자에 집중하려는데.

“오. 생각보다 꽤 잘 지내고 있군그래.”

연우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책자를 접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기척. 바할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연우와 2조의 훈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주변은 총사령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난리가 난 상태였다.

용병들이 허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조장들이 다급하게 뛰어나와 인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바할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뻗어 그들을 제지하고, 다시 연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듣자하니 용병들을 한껏 잘 휘어잡았다더니.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그래. 어떤가? 작전, 곧바로 뛸 수 있겠나?”

연우의 눈가에 이채가 어렸다.

그동안 부대를 휘어잡느라 시간을 내어 줬으니, 이제 슬슬 움직이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이란 뜻이지.’

슬슬 계획을 실행할 때였다.

연우는 속내를 전혀 내비치는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잘됐군. 하면 자네가 비밀리에 다녀올 곳이 있…….”

“그 전에 사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바할은 감히 자신의 말허리를 자른 연우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가 봤을 때, 연우는 여러 모로 그에게 신기한 것을 많이 가져다 주는 복덩이였으니까.

이번에는 또 무엇을 꺼낼지 궁금했다.

“음? 뭔가?”

연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16층에 도무신의 아들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

바할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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