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25화 (125/862)

25화. 임무 (5)

“흐흥. 흥.”

라플라스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포탈을 타고 들어왔다.

수많은 관리자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곧 그렇겠거니 하는 표정과 함께 자기 할 일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이 알고 있는 라플라스는 언제나 하이 텐션을 유지하고 있어서 같이 일을 하는 부하 직원들도 곤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텐션이 더 올라갔을 때에는 우연이라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훨씬 속 편했다.

라플라스는 관리자들의 사이를 지나 자신의 개인 집무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라플라스의 콧노래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대신에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놀고 있던 사람을 가만히 노려봤다.

“이블케. 여기는 무슨 일로?”

라플라스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블케였다.

이블케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효효. 그냥 지나가던 길에. 우리 라플라스 군이 계시던 방이 있기에. 그래서 찾아왔답니다. 마침 재미있는 소문도 들었고 말이지요.”

라플라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 절대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튜토리얼과 초심자 구역을 제외하면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역시 이블케의 눈은 곳곳에 깔려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평소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양반이. 큰 소란이 있어도 별 개의치 않아 하던 양반이. 왜 이번 일에는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하고.

그래서 라플라스는 최대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굴을 차분히 가라앉혀야만 했다.

저 이지적인 외눈 안경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도록.

그리고.

이블케가 송곳니가 삐죽삐죽 솟아 나온 입을 천천히 열었다.

“어떤 악마가 하층 구간에 관심을 두었고, 라플라스 군이 거기에 개입을 했다는 말이 있던데. 여기에 대한 생각을 물어봐도 될까요?”

* * *

그건 연우에게 익숙한 냄새였다.

아프리카에서 상대하던 반란군의 기지 중 상당수가 아편굴이기도 했으니까.

부대에서도 간혹 수하들이 몰래 마약을 구하다가 적발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청년이 상체를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다.

“으응? 아저씨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헤헤헤. 뭐, 아무러면 어떻겠어. 그보다 여자는? 좀 데려왔어? 얘네들 이제 너무 지겨워. 바꿔 줘.”

방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난교 파티라도 벌인 건지, 남자 하나와 여자 여럿이 벌거벗은 채 뒤엉켜 있었다. 특히 여자들은 동공이 완전 풀려 의식도 흐릿해 보였다.

얼마나 많은 마약을 피워 댄 건지 방 안의 공기는 뿌옇기까지 했다.

깡마른 체구. 퀭하게 가라앉은 눈자위. 풀린 동공.

이목구비는 전체적으로 선이 굵었다. 연우에게도 익숙한 생김새였다. 도무신과 얼굴이 똑같았으니까.

‘한빈.’

도무신이 숨겼다는 유일한 아들.

“어? 이씨. 아저씨, 내 말 안 들려? 여자는 왜 안 보여? 뭐야? 안 데려온 거야?”

한빈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면서 연우를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천천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세를 숙여 문가에 누워 있던 여자를 살폈다.

원래 미녀였을 것 같은 여자는 눈자위가 완전히 풀렸고,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벌거벗은 몸 곳곳에는 시뻘건 매질의 흔적도 있었다.

“묶어 놓고 강제로 했군. 약도 강제로 먹인 것 같고. 윤간? 납치라도 했었나?”

연우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문가 쪽을 돌아봤다.

거기에는 헐레벌떡 뛰어온 고위 신관과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저, 저, 저희가 설명을 해 드릴 테니 잠깐 시간을……!”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아.”

“제발 기회를!”

용병들은 어떻게든 방으로 들어오려는 사제들을 발로 걷어찼다. 몇몇은 칼을 뽑으면서 당장이라도 벨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신전을 함부로 습격한다는 사실을 꺼림칙해한 나머지, 사제들을 제압하는 와중에도 다치지 않게 힘을 조절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방 안 곳곳에 배치된 고문 도구며 성교의 흔적들, 그리고 여인들의 몸에 남은 자국만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막장 인생을 살아온 용병들이라 하여도. 그들에게도 정해진 ‘선’이라는 건 있었다.

“야! 너 뭐냐고! 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 죽고 싶어? 어?”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빈은 여전히 상황 판단이 되질 않는지 연우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끌고 와.”

2조의 선임 용병들, 델란과 쥰은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가 한빈을 강제로 끌어냈다.

녀석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아악!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너희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딴 짓을 저지르는……!”

한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뒷덜미를 내려친 손날에 그대로 기절해 축 늘어졌다.

연우는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화르륵. 성화가 피어오르면서 실내에 자욱하던 연기를 모두 불태우고, 곧 여인들에게 깃들어 약의 기운을 몰아냈다.

‘도무신. 아들 사랑 때문에 눈이 완전히 멀었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한빈은 타고난 장애 때문에 언제나 고통을 안고 살아야만 했다.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쉬운 길은 마약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내성 때문에 투여량도 자꾸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나중에는 더 자극적인 것을 찾다가 성적 쾌락에 치중하게 되었을 테고. 납치나 인신매매도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다 결국 이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겠지.

아마 스쿨드의 신전에서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상대는 도무신의 아들. 자칫 밉보였다가는 어떤 횡액을 당할지 모르니 내내 숨기기 바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이런 여자들이 어디서 제공될까? 외부에서 구한다면 소문이 돌 테니, 신도들을 대상으로 했을 게 분명하다.

‘신도를 성노예로 쓰는 신전이라니. 미친놈들이야.’

결국 이들도 한빈과 공범이라는 뜻.

아마 앉은뱅이 세 여신은 운명을 점치는 것 외에 따로 물리적인 행사를 할 수 없는 점을 악용한 것인지도.

“으음.”

“여…… 기가 어디지……?”

연우는 여인들이 침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려는 것을 확인하고, 용병들과 함께 별실을 빠져나왔다. 한빈은 델란의 등에 너덜너덜 업혀 있었다.

밖에는 신관과 사제들이 덜덜 떨면서 서 있었다.

이미 별실에서의 일은 소문이 퍼졌던지 신도들이 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모습도 보였다.

수척해진 얼굴을 한 고위 신관이 연우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존경 받는 자리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으니까.

아마 오늘 있었던 일은 하루도 되지 않아 탑 전체로 퍼져 나갈 게 분명했다.

언제나 탑에서 많은 존경을 받던 앉은뱅이 세 여신의 위상도 그만큼 추락하고 말겠지.

하지만 연우는 추락하는 여신들의 명예만큼, 곧 도무신과 청화도의 명성도 곤두박질 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자신이 비웃음을 받았다고 착각한 고위 신관은 두 눈을 부릅떴지만.

연우는 그의 눈빛을 무시하고 티켓을 꺼내 찢었다.

곧 그와 용병들 아래에 깔린 붉은색 포탈을 타고 공간을 넘자, 익숙한 11층 내 레드 드래곤 군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형님, 오셨수? 딱 보니 깽판 치고 오신 행색이신데?”

때마침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도라와 판트가 몸을 일으켰다.

한쪽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바할도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흥미 가득한 얼굴이 되어 연우에게 다가왔다. 대신에 시선은 선임 용병의 등에 업혀 있는 한빈에게 고정되었다.

“이놈인가?”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확실히. 도무신을 꼭 닮았어. 주름만 더 붙인다면 도무신이라고 해도 믿겠는걸. 하핫!”

바할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무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빈에게서 그를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가만히 앉아 중요한 패를 손에 넣게 되다니. 기분이 상쾌했다.

‘카인, 이 친구를 만난 게 올해 가장 큰 복이군. 혹시나 했는데, 정말 이런 대어를 낚아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여름여왕이 드래곤 하트가 망가져 대체품을 찾고 있는 이때. 리언트를 꾀어내기 위한, 아니, 정확하게는 ‘돌’을 세상에 드러나게 하기 위한 작전은 아주 신중하게 진행해야만 했다.

그래서 사실 바할도 따로 계획했던 작전이 있었다.

여름여왕에게 별도로 보고하고, 일단 진행해 보라며 미적지근하게나마 허락을 받았던 것.

‘내가 파악하기로, 리언트가 튜토리얼 지대에서 만들려고 했던 ‘돌’은 분명히 미완성이었어. 하지만 그걸 완성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재료가 있다면. 아무리 의심이 많은 녀석이라고 해도 혹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이미 돌을 완성하기 위한 남은 재료는 이쪽에서 전부 챙겨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원래는 여기에 대한 정보를 실수인 척 흘리고, 리언트를 꾀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돌에 대한 집착은 어마어마했으니까.

하지만 이 작전에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이미 리언트는 바할과 레드 드래곤을 의심하고 있고, 녀석의 성격상 직접 재료들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녀석을 움직이게 할 만한 원동력이 필요했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도무신의 아들의 그의 손으로 흘러오게 되었다.

도무신이라면 리언트를 자극하고, 강제로 돌을 꺼내게 만들 원동력으로 충분하다.

아들이 있는 한, 도무신은 바할의 꼭두각시 인형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물론, 도무신이 아들을 버리고, 청화도를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할은 그럴 일이 없으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외골수인 도무신이 자신의 마력을 나눠 주면서까지 보호하고 싶어 하는 아들이라면. 무술과 조직에 대한 집착보다, 아들에 대한 집착이 훨씬 클 게 분명했다.

“일단 깨우지.”

대기하고 있던 선임 용병은 지시에 따라 한빈의 얼굴을 세게 두어 번 후려쳤다.

짜악. 짜악. 볼따구니에 시뻘건 손자국이 남았다.

한빈은 정신이 번쩍 드는지 눈을 활짝 떴다.

녀석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곳에서 잠시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새끼들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서 다 죽일……!”

하지만 한빈은 말을 길게 잇지 못했다.

고함을 치다 말고 바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약의 기운 때문에 안개처럼 흐릿했던 의식이 갑자기 확 맑아지면서 정신이 또렷하게 들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바로 공포였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는 자신 하나쯤은 개미 죽이듯이 가볍게 해치울 수 있는 높은 존재라는 것을. 탑에서 손꼽힌다는 아버지도 이 사람 앞에서는 승부를 쉽게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머리 위로 나부끼고 있는 깃발. 레드 드래곤의 표식이었다.

자신은 지금 적진 한가운데에 끌려와 있었다.

“그래도 제 아비를 조금은 닮아 사람을 보는 눈은 있군. 완전한 견자(犬子)는 아닌 모양이야.”

바할은 잔뜩 겁을 먹은 한빈의 눈빛을 읽고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호랑이의 아들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눈치가 빠른 것 같으니, 이제부터 내가 뭘 하려는지도 잘 알겠어. 그렇지?”

바할이 사납게 웃었다.

“우선은 왼쪽 새끼손가락부터 하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 * *

연우는 고요한 눈길로 그런 바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걸로 기름은 부어졌다.

이제.

불길을 당길 차례였다.

* * *

“이, 이런! 하, 한빈아!”

도무신은 갑작스런 레드 드래곤의 방문으로 스쿨드의 신전이 망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한평생 여자와는 담을 쌓을 줄 알았던 자신에게, 봄날의 훈풍처럼 갑자기 다가왔던 연인. 그녀가 눈을 감으면서 유일하게 남긴 흔적이 바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뺏겼다고 한다. 그것도 원수인 레드 드래곤에게.

도무신은 어떻게든 아들을 찾아 오고 싶었지만,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기에 발을 동동 굴려야만 했다.

그래도 철함을 가지고, 어디로든 갈 생각이었다. 함정에 빠져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함을 가지러 온 순간. 자신이 머무는 막사 안, 탁상 위에 자그마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익명의 편지와 함께.

아들을 찾고 싶다면. ‘돌’을 가져와라.

편지에 적힌 딱 한 줄의 문구.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걸로도 도무신의 머릿속은 창백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속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들의 것으로 보이는 새끼손가락.

도무신은 난생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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