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화. 전쟁 준비 (1)
『머리가 아프군.』
검무신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어떻게든 억지로 눌러 담아야 했다.
외뿔부족에서 식객으로 있던 그가 창무신과 함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독립을 한 뒤.
세상은 언제나 그에게 있어 커다란 장벽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더라도 험준한 장애물이 있었고, 고난과 역경이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검무신은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
적들을 쓰러뜨리고, 빼앗았다. 짓밟고, 일어섰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의 주변에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고, 지금의 청화도를 일구는 초석이 될 수 있었다.
그랬다.
검무신에게 있어 세상은 언제나 장벽이었지만, 그만큼 극복하고 약탈을 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최근에는 아르티야가 그러했고.
지금은 레드 드래곤이 그러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꺾을 수 있었던 아르티야와 다르게, 레드 드래곤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철옹성으로 다가왔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레드 드래곤은 탑을 지배한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탄탄하고 견고했다. 그리고 도무지 아래는 보지 않는다는 올포원에 유일하게 대항할 만큼 강했다.
그랬던 곳과의 싸움은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청화도가 적은 인원수에 비해 많은 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편이긴 했다.
그리고 외부에서도 수적으로 우세한 레드 드래곤과 유일하게 부딪칠 만한 곳은 청화도일 거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작 청화도의 주인인 검무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들이 모두 헛소리라는 걸.
청화도의 전력과 하부 세력들을 전부 끌어 모은다고 해도, 실제로는 레드 드래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유명한 81개의 눈은 시작에 불과했다.
소속만 두고 제대로 외부 활동은 하지 않는 랭커들이 수천 명에 달했고, 또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따로 양성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레드 드래곤에게는 다른 클랜들이 가지지 못하는 그들만의 무기가 있었다.
역사와 전통.
레드 드래곤의 태생은 아주 오랜 과거로 이어진다.
당시에도 77층에 자리를 잡으며 숱한 랭커들에게 거대한 장벽으로 군림했던 올포원을 잡고자 수많은 랭커들이 모여 조직을 이뤘다. 그리고 누대에 걸쳐 조직을 확장하고, 선대가 남긴 유산을 발전시켰다.
그러다 보니 레드 드래곤은 외부에 드러난 것보다, 내부에 숨겨 둔 힘이 몇 배는 더 크다고 할 정도로 탄탄한 조직이 되어 버렸다.
당장 11층에 파견된 전력만 하더라도, 레드 드래곤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청화도와 맞먹을 정도였으니.
아니, 오히려 앞서고 있었다.
창무신이 뿔을 꺾으면서 외뿔부족을 끌어왔다지만, 레드 드래곤이 크게 마음만 먹는다면 함께 짓밟힐 운명이었다.
다만, 레드 드래곤도 그런 큰 피해를 감수하기 싫어서 잠깐 주춤거리는 것일 뿐.
하지만 레드 드래곤이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건 분명했다.
결국.
검무신은 깊은 고심에 잠겼다.
그는 애초 레드 드래곤과 전쟁을 치를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저쪽에서 리언트를 공격했기에 전쟁을 시작했을 뿐, 할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끝낼 의향이 있었다.
물론, 그렇게 했다가는 아홉 왕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는 건 물론, 청화도가 레드 드래곤에 꼬리를 말았다는 오명을 씻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때는. 청화도가 무너지는 신호탄이 되고 말겠지.
불굴과 자존. 이 두 가지야말로 오늘날 검무신이 청화도를 세울 수 있었던 절대 명제였으니.
그걸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검무신은 고민했다.
『결국 남은 방법은 ‘칼’밖에는 없나?』
아무리 청화도가 레드 드래곤에 비하면 작은 규모라지만, 그래도 거대 클랜은 거대 클랜.
숨겨 둔 무기는 있었다.
다만, 그것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을 필요로 했다. 검무신조차도 자칫 휘둘릴지 모를 정도였다.
검무신은 검을 쓰기에 ‘칼’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사용하기에 따라서 창이 될 수도, 활이 될 수도, 도끼가 될 수도 있었다.
신의 이름, 아니, 신 그 자체라고도 불리는 신물(神物).
그렇기에 여태껏 얻어 놓고서도 쓸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생각을 조금 다르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아직 미완성일 테지만. 리언트를 이제 슬슬 꺼내야겠어.』
그리고 ‘칼’을 사용하기 위해서 여태껏 리언트가 뭘하는지 알면서도 묵인해 왔다.
돌. 만능의 비보이기도 한 그것이라면. 충분히 ‘칼’을 다루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검무신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리언트는 버리기로. 그리고 미완성이더라도, 조금 일찍 ‘칼’을 취하기로.
『밖에 누구, 있는가?』
판단이 끝났다면 명령은 즉각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어기전성으로 밖에다 의념을 실어 보내자, 곧 수하가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권무신에게 할 말이 있으니 따로 찾아오라고 이르라.』
“예.”
수하가 그림자 속으로 녹아 조용히 사라졌다. 그렇게 리언트가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리언트 대신에 수하가 다시 돌아왔다. 뭔가 좋지 않은 표정을 한 채로.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도무신께서…… 권무신을 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뭐?』
검무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쾅!
쐐애액-
“이런 미친놈이! 몇 번을 말해! 그딴 건 나에게 없다고!”
“난 너에게 물건이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가져오라고 했지. 살고 싶다면 가져오는 게 좋을 거야.”
리언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칼을 세게 내려친 도무신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맹렬한 투기는 이미 회오리치면서 리언트가 머물던 건물을 무너뜨렸고, 바닥 곳곳에 깔린 9자루의 칼은 금방이라도 날아들어 그를 난도질해 버릴 것만 같았다.
한때 아르티야에서도 곤혹을 면치 못하게 만들었던 투견답게. 도무신이 발산하는 살기는 리언트의 숨통을 단단히 옥죄었다.
방에서 쉬고 있던 리언트에게 도무신이 찾아와 꺼낸 말은 아주 간단했다.
-돌, 내놔라.
리언트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말았다.
여태껏 숨긴다고 숨겼던 사실을, 어째서인지 도무신이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울컥하는 심정도 들었다.
여태 자신이 고생했던 이유가 돌 때문이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걸 내놓으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리언트는 자신에게 없다고 했다. 아니,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바로 이것이었다.
살의.
흉흉하게 빛나는 도무신의 두 안광은 당장이라도 리언트를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가져와.”
으르렁대는 목소리.
리언트는 울대가 파르르 떨렸지만, 끝내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역시 랭커이자 같은 무신. 이렇게 협박을 받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없……!”
촤아악!
리언트가 어떻게 말을 잇기도 전에 갑자기 도무신이 몸을 옆으로 뒤틀었다.
칼날이 섬광이 되어 공간을 쪼개고, 단숨에 리언트의 목젖으로 다다랐다.
리언트가 뒤늦게 섬광을 읽고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늦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먼저 들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변할 무렵.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리언트 앞으로 벼락처럼 뭔가가 빠르게 툭 떨어졌다.
쾅!
결국 섬광은 목적대로 리언트의의 목젖을 가르지 못하고 도로 튕겨 나야만 했다.
도무신은 반탄력을 옆으로 흘리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짐승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지면에 꽂힌 창을 보고, 뒤따라 조용히 착지하는 창무신을 노려봤다.
“무슨 짓이지? 비켜라, 창. 너에게는 볼일이 없다.”
“도.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냐? 레드 드래곤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아군끼리 칼부림을 해? 요즘 마성으로 고생하더니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거냐?”
창무신은 리언트를 도무신에게서 가리면서 창을 뽑아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역시 리언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소속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기본 규율은 지키려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도무신이 보이는 행위는 명백한 적대 행위. 조직에 피해를 끼치는 반란이었다.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비켜.”
하지만 도무신은 그런 것 따위 모르겠다는 듯, 옆에 있던 다른 칼을 뽑으면서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창무신도 다시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도무신은 걷다 말고 도중에 걸음을 멈췄다. 좌측 사각 지대에서 찌릿하게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궁무신이 먼 나무 꼭대기 위에서 차갑게 웃으며 시위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궁무신의 활 솜씨는 탑에서도 비교할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나 간혹 뱀 사냥꾼 갈리어드와 비교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신으로 손꼽힐 만큼 대단한 건 사실이었다.
도무신도 그를 상대하는 걸 꺼려 할 만큼.
앞에는 창무신. 뒤에는 궁무신. 앞뒤가 꽉 막힌 채로 리언트를 잡으려면 둘의 위협을 동시에 상대해야만 한다.
도무신이 아니라, 검무신이라도 쉽사리 승부를 장담하기 힘든 싸움이었다.
하지만 도무신은 이번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성큼 나섰다.
도리어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잔뜩 끌어 올리면서 심령으로 연결된 모든 칼들을 울렸다.
우웅- 웅-
따라서 창무신의 인상도 더 굳어졌다.
도무신이 정말 진심으로 싸우려 한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홉 자루의 칼을 전부 쓰는 도무신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콰콰콰!
세 무신들이 일제히 내뿜는 기세는 서로 부딪치고 깨지기를 반복했다.
지축이 위아래로 요동치고, 곳곳의 공간이 휘어졌다.
군영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외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혹시 기세 다툼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시체도 남기지 못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처럼, 그들이 떠난 자리는 얼마 안 가 가차 없이 뭉개졌다.
이윽고 도무신이 칼을 쥐고 창무신에게 달려들려던 그때.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갑자기 하늘을 따라 어기전성이 크게 울렸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군영 전체에 내려앉으면서 세 무신이 내뿜던 기세를 단번에 부숴 버렸다.
창무신이 핑 도는 현기증에 주춤 물러섰다. 궁무신은 활을 내려 놓고 창백해진 얼굴로 숨을 골랐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도무신이 울컥 피를 토하면서 바닥에 칼을 꽂아 균형을 지탱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한쪽 무릎이 지면을 찍고 있었다.
화라락!
그 위로, 검무신이 조용히 바닥에 내려왔다.
그는 외뿔부족이 주로 입는다는 복장에 얼굴에는 나무로 만든 사자 탈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네 자루의 검, 통칭 옛 금오도의 통천교주가 애용했다는 ‘사선검’이 그를 지키듯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검의 날에 각각 주(誅)·육(毅)·함(陷)·절(絶)이라고 적힌 글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말해 보아라, 도.』
검무신은 쑥대밭이 된 주변 상황을 둘러보다가, 곧 도무신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자 탈 아래에 비치는 두 안광은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섬의 기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에게 도무신의 이런 태도는 절대 묵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도무신은 이를 악물며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이 빠른 속도로 메마르면서 억눌러 놨던 마성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지만, 그래도 최근에 흡수한 4대 신수의 내단으로 버티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뿐. 난 권에게 그것만 내놓으라고 요구했을 뿐이다.”
무엇을 요구했단 거지? 검무신은 물욕이 없는 도무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생떼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권이 뭘 갖고 있다는 것이냐?』
“돌.”
『…….』
검무신은 아주 잠깐 침묵을 지켰다.
“역시 검, 너는 뭔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도무신의 한쪽 입술을 비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난 그 돌이란 게 뭔지 모른다. 관심도 없고, 안다고 해도 쓸 줄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걸 가져야겠어.”
『왜?』
“아들놈이 저들에게 붙잡혀 있으니까.”
『……!』
검무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주변은 도무신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의 사정을 알고 있는 검무신은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도무신의 못난 아들, 한빈이 레드 드래곤에 납치되어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구 대가는 돌.
“그러니 내놔라. 나중에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을 테니. 난 지금 아들부터 구해야겠다.”
도무신의 흉흉한 눈동자는 아무리 검무신이라고 해도 가로막는다면 칼을 휘두를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무신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돌은 그로서도 필요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러나 도무신도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었다.
검무신은 자신들이 지독한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드 드래곤에서 이런 판을 깐 게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판을 깔아도 아주 제대로 깔았다는 생각에 이가 갈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충돌은 불에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검무신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안 되니, 우선 화를 가라앉히고 마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난 지금 한시가 급하……!”
『기다리라고 했다. 도.』
도무신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곧 돌아오는 검무신의 싸늘한 목소리에 입을 닫아야만 했다.
검무신의 사선검이 일제히 날을 세우며 어느새 도무신의 주변을 빼곡 채우고 있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도무신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상황은 가려야만 했다. 돌을 구하기도 전에 자신이 죽어 버린다면, 아들의 목숨도 끝이었다.
게다가 어느새 다른 플레이어들도 모여 언제든지 그를 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도무신은 쥐고 있던 칼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냅다 꽂아 넣는 걸로 화를 풀어야만 했다.
검무신도 꼿꼿하게 날을 세우던 사선검을 되돌리고, 자세를 풀었다.
『일단은 방에 들어가서 머리를 식히고 있도록. 이쪽이 정리되는 대로 바로 불러 줄 테니.』
말은 배려로 가득 찬 것 같았지만, 명백한 근신령이었다.
도무신은 이를 악문 채, 수하들에 양팔이 붙잡혀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 * *
와장창!
도무신은 집무실에 있던 집기란 집기는 모두 내리치면서 부수고 또 부쉈다.
하지만 그래도 도무지 화는 가라앉질 않았다. 대신에 자꾸 초조감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들은 적들에게 붙잡혀 있다. 어떤 고문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고, 어떤 협박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연약한 아들이, 언제나 아프기만 하던 아들이 또 모진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힘이 없었다. 검무신을 무시하고, 리언트에게서 돌을 빼앗을 힘이 없었다.
아버지로서 너무 못났다는 사실이 억울하기만 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버지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그때.
똑.똑.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도무신의 머리가 그쪽으로 쏠렸다. 분명 자신은 연금된 상태라 허락 없이는 아무도 접근을 하지 못할 텐데, 누가?
게다가 기척은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절대 그의 아래가 아니란 뜻이었다.
‘설마?’
순간, 도무신은 등골을 따라 오한이 스쳤다. 뭔가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처음 아들의 새끼손가락이 든 상자를 열었을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도무신은 다급하게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는 이전과 똑같은 모양을 한 나무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또?
도무신은 덜컥 내려앉는 마음에 무릎을 꿇고 상자를 짚었다. 손이 얼마나 심하게 떨리는지 뚜껑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을 봤을 때. 도무신은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들의 것이 분명한 한쪽 눈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 장의 쪽지와 함께.
아들을 찾고 싶다면. ‘돌’을 가져와라.
이전과 똑같은 글씨체에, 똑같은 내용으로 적힌 문구.
“아아악!”
도무신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악다구니를 질렀다. 이미 겨우겨우 억눌러 놨던 마성은 고개를 높이 들어 그의 이성을 가득 물들이기 시작했다.
시뻘게진 눈가 사이로 탁한 안광이 맺혔다. 마기가 그를 따라 퍼져 나갔다.
“도, 도무신 님.”
그때, 소란을 듣고 마도단의 단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도무신을 존경하고, 오랫동안 그를 따르던 단장은 도무신을 따라 감도는 마기를 보고 흠칫 굳고 말았다.
마력 폭주.
외뿔부족과 검무신은 주화입마라고 불리는 징조가 도무신에게서 풍기고 있었다.
“너.”
“예.”
“너는. 너는…… 누구의 편이냐?”
단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충혈 된 도무신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가 뭘 바라는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여기서 내리는 선택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게 될 거란 것도.
그리고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설사 잘못된 걸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단장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군께서 홀로 전장에 버려져 언제 죽을지 모르던 절 구해 주셨을 때부터…… 이미 저는 주군의 칼이었습니다. 칼에, 생각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무신의 안광이 차갑게 번뜩였다.
“그렇다면. 당장 아이들을 모아라. 밤이 깊어지는 대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