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30화 (130/862)

5화. 전쟁 준비 (5)

그 광경을 지켜본 마도단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환각 결계.

여태껏 자신들이 봤던 것들은 전부 환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여태 일어났던 소란은 전부 저 쪽에서 그들을 속이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불과했을 뿐. 폭발이나 불길도 전부 환각이 빚어낸 눈속임이었다.

그들은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작전이 통했다고 생각하며 군영을 가로질러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꼴이었고.

마도단을 노려보는 이들의 발치에는 죽은 신도단과 진도단 등의 머리통이 가득했다.

『혹시나 했었다. 그래도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대는 창과 내가 처음으로 의기투합을 했던 벗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기다리라는 말을 믿지 못해 이런 짓을 저지르고 말았지. 꼭 이렇게 해야만 했나?』

검무신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도무신을 노려봤다.

이게 전부 너의 탓이라는 듯. 네가 배신을 했기 때문에 저 아이들이 모두 희생되고 만 것이라는 듯.

하지만 도무신은 무미건조한 눈길로 죽은 수하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뗐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계산해 판단하는 너는 이해 못 하겠지. 아마 저들은 모두 웃으면서 눈을 감았을 것이니. 저들을 동정하는 건, 오히려 욕보이는 일밖에는 되지 않는다.”

도무신은 딱 잘라 그렇게 말하고, 발로 걷어 차 가져온 철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알았으면 좋겠어.”

도무신의 안광이 차갑게 번뜩였다.

“하나가 되든, 열이 되든, 백이 되든. 결국 내가 잡으려는 놈은 딱 한 놈뿐이라는 것을.”

안광이 검무신의 뒤에 있던 리언트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촤라락!

철함 안에 수북하게 담겨 있던 아홉 자루의 칼이 일제히 허공으로 튀었다. 도무신은 그중 크고 작은 두 자루를 양손에 쥐고 리언트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주군을 엄호하라! 아무도 방해할 수 없게 막아라!”

마도단은 도무신이 달릴 수 있도록 주변을 경계했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플레이어들에 맞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콰쾅!

쿠쿠쿠-

청화도 내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고 알려진 마도단답게, 그들은 같은 동료였던 자들을 베는 데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훨씬 강했기 때문에 오히려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기까지 했다.

그사이.

도무신은 검무신에 다다르면서 거칠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잔뜩 응집된 마력이 폭발하면서 강풍을 불러일으키며 와류를 형성하고, 반대 방향으로 돌린 다른 칼날이 다시 다른 방향의 와류를 일으키면서 서로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거대한 태풍을 형성했다.

콰드드득-

공기가 발기발기 찢어지는 소리가 가득 울렸다.

도무신이 바닥에 꽂힌 칼을 잇달아 뽑아 휘두를 때마다 폭발을 거듭하고, 와류 형성이 연속적으로 이뤄졌다.

태풍의 범위는 계속 커져 나가면서 검무신을 잇달아 밀어붙였다.

[칼날 소용돌이]

[아홉 칼의 무덤]

도무신이 자랑하는 두 시그니처 스킬의 연계기는 이미 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바닥에 꽂힌 칼을 순서대로 뽑아 가며 형성되는 소용돌이는 주변의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바람은 오러가 잔뜩 응집된 칼바람으로, 휘말리는 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갈가리 찢어 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거기다 평소에는 자제하던 ‘아홉’까지 꺼내 들었으니. 4대 신수의 내단과 역혈단까지 가미된 위력은 말 그대로 일진광풍(一陣狂風).

제아무리 검무신이라고 해도 마치 풍랑 치는 바다 속에 표류하는 돛단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콰콰콰-

하지만 검무신은 표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없이 휘몰아치는 풍랑 속을 겁 없이 돌진하는 상어처럼 일직선으로 주파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선검이 차례대로 움직이면서 태풍을 일일이 부숴 나갔다.

주선검은 소용돌이를 깊이 꿰뚫어 부쉈다. 육선검은 사선으로 그어져 와류를 산산조각 냈다. 함선 검은 태풍을 짓눌러 으깨 버렸으며, 절선검은 모든 걸 잘라 나갔다.

‘신선을 죽인다’는 흉측한 이름을 가진 4개의 보검은 검무신의 지시에 따라 길을 활짝 열었고, 검무신은 금세 도무신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이렇게 빨리 간격을 내어 주게 될 줄 몰랐던 도무신은 흠칫 놀랐다. 하지만 곧 송곳니가 드러나라 훤히 웃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멍청한 놈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 근처 바닥에 꽂혀 있던 칼을 뽑아 대각선으로 검무신의 허리를 쓸었다.

하지만.

터억!

칼이 검무신의 허리를 휩쓸기 직전에 갑자기 튀어나온 손날에 가로막혔다.

검지와 엄지, 두 개의 손가락 사이에 칼이 단단히 붙잡혔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상황.

이렇게 쉽게 가로막힐 줄 몰랐던 도무신이 흠칫 놀라 주춤거렸고, 그사이 검무신은 두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칼이 부서지면서 조각들이 허공으로 튀었다. 악마의 이름이 담겼다는 마검은 그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허망하게 부서졌다.

그리고 검무신은 파편 사이로 손날을 깊게 찔러 넣었다. 때마침 주선검이 도착해 검무신의 손에 잡혔다.

쉬쉬쉭!

주선검이 잇달아 궤적을 그리며 도무신의 어깨, 가슴, 허리를 깊게 베어 나갔다.

도무신은 궤적에 휘말릴까 싶어 뒤로 물러서면서 바닥에 있던 다른 칼을 뽑아 쳐올렸다.

어떻게든 검무신을 튕겨 낼 속셈이었지만.

채채챙!

오히려 주선검은 반갑다는 듯이 도무신의 칼을 분지르며 더 깊게 파고들었다.

다음 칼도, 다다음 칼도 차례로 부서져 나갔다.

신의 이름이 담겼다는 칼도, 옛 영웅이 쓴 보구도, 검무신이 휘두르는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면서 손잡이만 휑하게 남아 버렸다.

그러다 마지막 아홉 번째 칼도 완전히 부서졌을 때. 주선검이 그대로 도무신의 오른쪽 허벅지에 깊숙하게 박혔다.

퍼퍼퍽!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잇달아 다른 세 자루의 검이 도무신의 육체를 과녁 삼아 꽂혔다. 그의 몸이 크게 흔들리다, 무릎을 꿇으면서 왈칵 피를 토해 냈다.

“어…… 떻게?”

도무신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떨리는 눈빛으로 검무신을 올려다봤다.

분명히 마력도 잔뜩 끌어올렸다. 실력도 전성기 때보다 위로 훨씬 높였다.

위세만 따진다면 절대 검무신에 못지않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정작 결과는 너무 압도적인 차이가 있었다.

검무신에게 생채기 한 번 내 보지 못하고, 아홉 자루의 칼이 모두 부서지는 굴욕을 맛봐야만 했다. 시그니처 스킬은 발동하기도 전에 전부 무너졌다.

검무신은 고요한 눈빛으로 말했다.

『경지란. 그런 것이다.』

“……!”

도무신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쓰게 웃었다.

뒤늦게 왜 자신이 청화도에 합류를 했는지 과거가 떠올랐던 것이다.

철없이 강자만 찾아 방랑하던 시절. 더 강한 힘을 갈구하며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검무신을 만났고, 패배했다. 그리고 그때 받았던 충격을 메우고자, 그를 배워 보고자 뒤를 따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때의 격차는 훨씬 커졌다. 마력이나 아티팩트로는 도저히 메워지지 않을 만큼. 훨씬, 그리고 깊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 뒤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검무신과 다르게, 자신은 연인을 만나고 아들을 낳았다. 거기에 정신이 팔리는 동안, 경지는 지체되기는커녕 퇴보하기만 했으니. 감각이 죽는 것도 당연했다.

결국 여기까진가.

도무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 아들을 구해 보고자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걸었는데. 덧없게 되어 버렸다.

최후의 끈을 놓친 기분. 눈빛에서 독기가 빠졌다. 슬픈 감정이 고개를 치켜드는데.

『하지만. 그대에게 고맙게 생각은 한다.』

갑자기 검무신이 꺼낸 말이 도무신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무슨…… 소리냐?”

검무신은 여전히 어기전성으로만 대답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도무신에게만 들리는 것이었다.

『그대가 역혈단을 섭취한 덕분에. 언제 끝날지 몰랐던 신수들의 내단이, 드디어 하나로 뒤섞였으니까. 그것만 고스란히 빼내면 되는 일이 아닌가.』

“너……!”

『고맙게 생각한다. 아주. 이렇게 빨리 건네받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으니. 이번 일만큼은 레드 드래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가?』

“……!”

순간, 도무신은 그동안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검무신이 여태 뭘 노렸는지도.

왜 굳이 쓸데없이 4대 신수를 잡으라고 했던가. 간단하다. 도무신이 먼저 삼켜 전부 융화시키고 나면, 그것을 고스란히 자신이 빼앗으려 했던 것이다.

리언트를 왜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가. 이것도 간단하다. 돌인지 뭔지 모르지만, 마력기관일 게 분명한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랬다.

검무신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몇 수를 내다보면서 진행했고, 반드시 결과를 손에 넣고 말았다.

이것도 그중 하나였다.

“하! 하하! 하하하!”

도무신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자신은 이용만 당했던 셈이었으니까. 레드 드래곤에게도. 청화도에게도.

자신은 그저 필요에 의해 쓰이는 꼭두각시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남들이 무신이라고 치켜세워 줘도, 하이 랭커라며 추앙을 받아도, 결국 절대자들이 버리려고 마음먹으면 버려지는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억울한 마음을 풀 길은 없었다. 자신은 당했고, 아들은 죽어 가고 있다.

『오라. 내게로.』

검무신은 오른손을 활짝 펼쳐 도무신의 왼쪽 가슴으로 내뻗었다. 심장과 내단을 함께 적출할 생각인 게 분명했다.

그 짧은 순간.

도무신은 그걸 보면서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를 떠올렸다.

이대로 당하는 건 원통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는다면, 효용 가치가 없어진 아들도 같은 신세가 될 게 분명했다.

한평생 고통 속에서만 허덕여 살아왔던 아들은. 결국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스러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싫었다. 아들만은 살려 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가치를 만들어 줘야만 했다.

가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레드 드래곤이 좋아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그러다 문득 쪽지가 떠올랐다.

아들의 눈알과 함께 동봉되어 있던 쪽지. 돌을 찾아오라는 말 뒤에 한 줄 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좌표.

그건 레드 드래곤의 본영이 위치한 좌표였다. 처음에는 왜 그런 걸 적어 놨나 싶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도무신의 눈동자가 다시 화려한 빛을 틔웠다.

지옥 불처럼 뜨겁게 타오른 두 눈은 옛 전성기 때의 그를 연상케 했다.

“검. 네가 실수한 게 있다.”

『무슨 말을……!』

“내단이 섞였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도무신이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비웃음. 검무신이 뭔가 불안한 마음에 급하게 녀석의 왼쪽 가슴을 꿰뚫으려는 순간.

퍼엉!

그보다 먼저 도무신은 마력을 역으로 돌려 자신의 심장을 부쉈다. 그리고 응집되었던 내단도 같이 으깨 버렸다.

그러자 안에 수용되어 있던 마력이 밖으로 방출되었다. 아니, 폭주했다.

마력의 급격한 팽창은 도무신이라는 육체를 풍선처럼 터뜨렸다. 남은 기운은 갈 곳을 잃고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빛의 무늬를 그리기 시작했다.

갈 곳을 잃은 신수들의 힘이, 도무신이 남긴 마지막 사념을 따라, 이리저리 거미줄처럼 얽히면서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했다.

그게 무엇인지 눈치챈 검무신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도무신의 본명을 부르는 새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려어어엉!』

하지만 그가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마법진이 흩어지면서 거대한 포탈을 형성했다.

검무신과 청화도 군영의 하늘을 따라. 그들의 머리 위로 엄청난 크기의 녹색 포탈이 열리면서.

그 아래로.

붉은색 비늘로 반짝대는 거대한 머리가 천천히 드러났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과 흉측한 이빨, 그리고 사위를 압도하는 맹렬한 투기. 드래곤 피어.

용.

지금은 탑에서도 멸종되어 아주 적은 개체 수만 남았다는 붉은 용이. 여름여왕이. 청화도 한복판 위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 * *

여름여왕의 뒤를 따라 레드 드래곤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 속에는 연우도 섞여 있었다.

연우는 용마안을 활짝 열어 고개를 들었다. 녹색 포탈을 따라 갈 길을 잃은 4대 신수의 마력들이 흩어지려는 것이 보였다.

다만, 그것들은 이미 한데 섞여 있어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역혈단과 도무신의 내력도 복잡하게 얽혔으니.

하지만 연우는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왼손을 뻗었다.

바토리의 흡혈검이 활짝 열렸다. 하늘을 가득 물들인 기운이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왼손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4대 신수의 마력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칭호 ‘신수의 계승자’의 특성이 적용, 빠른 수용이 가능해집니다.]

[마력이 5만큼 상승했습니다.]

[마력이 10만큼 상승했습니다.]

……

[‘마력회로’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55, 56…… 61, 62…… 68%…….]

……

[그릇이 확장되었습니다. 영혼의 성장이 확인되었습니다. 중단되었던 계승 작업이 재기되어 부족 부분을 채웁니다.]

[현재 작업량: 100%]

[모든 계승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용체 각성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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