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각성(覺醒) (1)
계승 작업의 마무리.
그것은 언제가 연우가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회중시계와 마찬가지로 동생이 남긴 유품이었으니까. 그리고 동생이 탑에서 살았던 흔적이자 증거였다. 동생을 대신해 살아가려는 연우에게 있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용이라는 존재는 너무 지고하기 때문에 그들의 힘을 이어받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대 최고 성적으로 튜토리얼을 졸업하고, 초심자 구역을 통과해도.
신의 이름이 담긴 아티팩트를 손에 넣고, 신수들과 계약을 맺은 계승자가 되어도.
무공을 단련하고 마력회로를 전부 개척해도.
도저히 획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언제나 손에 넣을 듯 말듯하면서 너는 아직 멀었노라고, 용의 한계는 한낱 인간 따위가 바랄 수 있는 게 아니라며 오만하게 굴었다.
하지만 지금.
연우는 도무신이 하나로 뒤섞었던 4대 신수들이 품고 있던 막대한 마력을 손에 넣었다.
마치 제자리를 찾아가듯. 죽은 도무신을 대신해 허공을 떠돌아 다니던 마력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신수의 계승자라는 호칭을 가진 연우에게로 깃들었다.
바토리의 흡혈검이 효율적인 흡수를 도왔다. 마력회로가 최고로 가동되면서 들어오는 기운들을 닥치는 대로 수용했다.
그 양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여태껏 연우가 어렴풋하게 짐작했던 것을 훨씬 월등하게 넘어설 정도였다.
언제 다 채울까 싶을 정도로 방대한 크기를 자랑했던 마력회로가 가득 차 버릴 정도였으니까.
아니, 차다 못해 넘쳐흐를 정도였다.
그리고 남은 양은 마력회로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도 스며들었다.
뼛속으로 들어가며 골수를 물들였다. 밀도가 더 농밀하게 단단해지면서 웬만한 아티팩트도 튕겨 낼 경도를 자랑하는 용골(龍骨)이 되었다.
세포로 들어가 용의 인자를 깨워 그 위로 용문(龍紋)이 잔뜩 퍼졌고, 마력회로는 더 확장되면서 용맥(龍脈)으로 거듭났다.
콰드득.
콰득.
모든 신체 조직이 낱낱이 해체 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샤논이 연우를 가리켜 ‘무작정 쌓았던 탑’이라고 말했던 모든 성취들이 와르르 무너졌다가, 용체라는 단단한 기반을 바탕으로 차곡차곡 다시 쌓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쌓였을 때.
포탈을 모두 통과하고 지상에 착지했을 때.
연우는 육체에서부터 영혼을 관통하는 짜릿한 뭔가를 만끽할 수 있었다.
마치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촤륵. 촤르륵!
연우의 가슴팍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푸른색 비늘이 상체를 뒤덮은 채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용린(龍鱗)이었다.
[용의 인자(因子)를 모두 깨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각성이 완료되었습니다.]
[성질 변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특성 ‘금강체’가 ‘용체(龍體)’로 변경되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경험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10,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1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상태가 ‘미완전한 용체’에서 ‘완전한 용체’로 변경되었습니다. 할당된 용종의 보고를 열람할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여태 잠겨 있었던 ‘용의 보고’ 중 일부가 해제되었습니다.]
[여태 잠겨 있었던 ‘용의 지식’ 중 일부가 해제되었습니다.]
[여태 잠겨 있었던 ‘용의 권능’ 중 일부가 해제되었습니다.]
[특성 ‘금강체’가 ‘용체’로 변경되었습니다.]
[특성: 용체(龍體)]
설명: 고룡 칼라투스는 한때 신과 악마에 비견될 정도로 위대했던 종족이 옛 거인족처럼 사멸하는 것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눈을 감기 직전에 자신이 가진 모든 유산들을 남기면서, 언젠가 종족의 위대함을 널리 알려 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업(業)은 이제 다시 새로운 연자에게 전해지며, 다시 화려한 꽃을 틔웠다.
위대한 고룡의 가호와 축복이 따르는 육체와 영혼은 용종의 위대함을 다시 재현케 할 것이다.
* 용의 영역
자격 여부에 따라 일정한 범위에 걸쳐 가진 권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 ‘비나’를 선포할 수 있게 된다.
* 용의 지식
자격 여부에 따라 용종들이 탐구하고 이해했던 지식의 체계, ‘호크마’를 열 수 있게 된다.
* 용의 권능
자격 여부에 따라 용종들이 터득한 진리의 힘, ‘케테르’를 열 수 있게 된다.
휘휘휘-
연우는 육체가 달라진 것뿐만 아니라, 영혼이 부쩍 성장하고,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너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에도 조금씩 지식이 확장되면서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관측’만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조금만 더 연습을 한다면 ‘제어’도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만물의 진리를 탐구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오롯이 가지게 되는 힘.
그게 바로 용종이었으니.
아주 짧은 시간 차이인데도 불구하고. 불과 몇 분 전과 지금은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아예 ‘격’이 달라져 있었다.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은 무한한 자긍심과 자신감이 풍겼다.
이게 모든 용종들이 가졌다는 오만함의 발로겠지.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우에게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따로 있었다.
‘권능.’
고룡의 축복을 받은 용체는 가진 능력치에 비례해서 원래 용종이 가지고 있다는 8단계의 권능을 차례대로 열 수 있게 된다.
당장 연우에게 주어진 권능은 1단계에 불과했지만. 그것만 하더라도 용의 권능이니만큼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연우는 당장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바로 목적지로 이동하려는데.
그 순간.
『……새로운 계승자인가? 그 아이가 말했던.』
연우는 머릿속으로 울리는 어떤 목소리에 고개를 높게 들었다.
나지막하지만 굵직한 목소리. 일기장 속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목소리였다.
‘칼라투스!’
연우의 눈이 커졌다.
고룡 칼라투스는 환룡을 통해 정우를 만났고, 그에게 모든 유산을 남기면서 눈을 감았었다. 용종의 위대함을 널리 알려 달라는 유언과 함께.
그런데 그게 아니었었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대가 찾아올 때까지.』
하지만 연우가 어떻게 말을 걸 방법을 찾기도 전에 칼라투스의 목소리가 옅어지더니 툭 하고 끊어졌다.
마치 깊은 잠에라도 든 것처럼 보였다.
연우는 칼라투스와 다시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다. 하지만 용체로 거듭나면서 원활하게 빨라진 사고 능력으로 되짚어 봐도 이렇다 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연우는 거기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못했다. 방법은 나중에 따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용체 각성을 위해 전투 집중으로 한없이 느려지게 만들었던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소란과 비명, 투기와 살기가 잔뜩 불어 닥치는 전장 한복판의 소란스러운 광경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망막 한쪽에서 떠오른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히든 퀘스트(허무룡의 두 번째 시험)을 완수했습니다.]
[보상으로 ‘심연의 구슬’과 ‘허무룡의 역린’, ‘허무룡의 둥지’를 획득했습니다.]
아마 빨려 들어온 기운 중에 도무신의 마력이 섞여 있어 퀘스트를 성공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이 판을 만든 게 자신이었다. 허무 속에 잠들어 있을 허무룡도 상당히 만족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우는 여기서도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구천으로 사라지려는 도무신의 영혼을 찾아 검은 팔찌의 컬렉션으로 밀어 넣었다. 하이 랭커의 영혼.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재료였다.
『……고마워, 주인. 정말로.』
돌 속에 잠들어 있던 짹짹이의 목소리도 아주 잠깐 들렸다.
연우는 조금 더 쉬고 있으면 끝난 뒤에 지금보다 재미난 걸 보여 주겠다고 말한 뒤, 고개를 주변으로 돌렸다.
‘첫 번째 목표였던 도무신은 잡았으니. 이제는 다음 놈들을 노릴 차례야.’
감각 영역으로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이 빠르게 파악되었다. 용체를 통해 용의 감각까지 깨달으면서, 이미 감각의 범위와 세밀함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그에 못지않거나, 못 미치더라도 크게 뒤지지 않는 놈들이 아주 많지.’
연우는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랭커와 하이 랭커, 그리고 플레이어 중에서도 상위권에 해당하는 자들이 수두룩하게 많은 곳.
연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영혼을 수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또한.
전장은 원래 연우가 뛰어다니던 곳. 가장 극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이기도 했다.
‘카인.’
지구에서부터 시작했던 코드 네임을 제대로 꺼낼 차례였다.
우우웅-
마력회로가 미친 듯이 열을 뿜었다. 어느새 하나로 뒤섞인 마력이 맹렬하게 회전하면서 연우의 육체에 강한 힘을 실었다.
등을 따라 성화가 뒤섞인 불의 날개가 돋아 몸을 칭칭 감으면서. 그리고 비그리드를 천천히 꺼내면서 감각 영역을 더욱 넓게 퍼뜨렸다.
드넓은 청화도의 군영 전체가 감각 속에 잡혔다. 더불어 뇌리 속에는 각 구조가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속에서.
표적 대상을 빠르게 물색했다.
‘찾았다.’
다행히 녀석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연우는 지체하지 않고 그쪽으로 몸을 거세게 날렸다.
팟-
두 번째 사냥감, 리언트가 있는 쪽으로.
* * *
크롸롸롸-
마치 유성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여름여왕이 청화도의 군영 한복판에 착지하자 지축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리고 뒤따라 이어진 막대한 존재감은 주변 일대의 공간을 출렁이게 만들기까지 했다.
엄청난 영압(靈壓). 태어났을 때부터 초월자에 해당한다는 용종이 발산하는 기세는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포효는 본능 속에 숨겨진 공포심을 자극했다. 약한 플레이어들은 드래곤 피어를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웬만한 실력자들도 내상을 입을 만큼 큰 타격을 입어야만 했다.
그나마 세미 랭커 이상은 버틸 만했지만, 그들도 여름여왕이 발산하는 무지막지한 드래곤 피어를 쉽게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여름여왕의 공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살짝 젖혔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순간, 드래곤 피어만큼이나 두렵다는 새로운 권능이 모습을 드러냈다.
브레스.
지옥에서 건졌다는 유황불이, 들끓는 죽음의 한숨이 지면을 휩쓸었다.
콰콰콰-
여름여왕이 있는 곳부터 브레스가 쏘아진 청화도 군영의 반대 방향까지. 화마는 일직선으로 선상 위에 놓인 모든 것들을 지워 버렸다.
그 속에는 랭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손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 압도적인 광경에.
올포원을 제외하면, 무왕과 함께 탑을 상징하는 최고의 실력자라는 이의 엄청난 위세에.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 소속을 막론하고, 모든 플레이어들이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정말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이 가능할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특히 청화도의 소속원들은 심장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공포심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한평생 무(武)를 좇으며 극기와 자강을 추구하는 그들이라지만. 그래서 아무리 대단한 강자를 만나더라도 기가 꺾이는 일이 없는 그들이라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벽으로 다가오는 여름여왕의 모습에 더 크게 꺾이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들이 스스로를 단련한다고 하더라도, 저기까지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좌절과 무력감이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패배감이 청화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여름여와아앙! 감히, 네 년이!』
검무신은 그런 수하들의 변화를 알았기 때문에 더 크게 분노했다.
가뜩이나 4대 신수의 힘이 허망하게 사라져 속이 끓는 지경이었다. 4대 신수의 힘을 빼앗은 후, 그 다음에는 ‘돌’을 가지고, ‘칼’을 완전히 손에 넣을 생각으로 기분이 잔뜩 부풀던 차에 모든 계획이 헝클어져 울화가 치미는 상황이었는데.
여기에다 기름을 끼얹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불을 더 크게 질러 모든 걸 망치려 하는 여름여왕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검무신은 발밑에 허공을 잇달아 터뜨리면서 빠른 속도로 여름여왕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그보다 먼저 사선검이 빠르게 궤적을 그리면서 떨어져 어마어 마한 파공성을 일으켰다. 공간이 발기발기 찢어지고, 폭음이 잇달아 울리면서 여름여왕을 덮쳤다.
그 뒤를 따라.
창무신이 포효를 터뜨리면서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여름여왕과 이어지는 공간이 단번에 압축되었다가 크게 휘어지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여름여왕의 복부를 후려쳤다.
〈굴공창〉. 창무신이 외뿔부족을 나오면서 새롭게 정립한 자신만의 절학이었다.
궁무신은 활의 신, 이예의 사도가 되면서 얻었던 활을 하늘 쪽으로 겨누었다.
그는 9개의 태양을 떨어뜨렸을 때에 썼다던 ‘사일동궁’이 이대로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위를 세게 잡아당겼다가 놓았다.
그러자 허공을 따라 9개의 백색 화살이 나타났다가, 그대로 녹으면서 빛줄기가 되었다. 빛줄기는 다시 수십 수백 갈래로 쪼개지면서 하늘을 따라 거대한 빛의 그물을 만들어 냈으니.
어느 지점에 다다른 그물은 그대로 추락하면서 여름여왕의 머리 위로 작렬했다.
콰콰콰쾅-
세 무신과 여름여왕의 충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