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32화 (132/862)

7화. 각성(覺醒) (2)

콰콰콰-

여름여왕이 브레스를 내뿜으면서 세 무신을 휩쓰는 사이.

다른 레드 드래곤의 랭커들은 각자 전투 부대를 이끌고 청화도 군영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따라 스킬 발동을 의미하는 이펙트가 폭죽처럼 잇달아 화려하게 터졌다. 폭발이 일어나고, 뒤따라 탄내와 피 냄새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청화도의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막아 보려 애썼다.

하지만 워낙에 습격이 기습적으로 이뤄진 데다가, 도무신 등을 막기 위해서 주요 병력이 한 자리에 모인 상태였기 때문에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름여왕이 내뿜는 드래곤 피어는 알게 모르게 청화도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발목을 붙잡는 역할도 했으니.

레드 드래곤의 랭커들은 그런 약점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오러를 휘두르고, 마법을 난사하면서 닥치는 대로 청화도의 플레이어 들을 쓸어 나갔다.

세간에 청화도가 훨씬 많은 고수들을 품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레드 드래곤의 랭커들도 그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더 대단한 전력을 보였다.

그제야 청화도는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레드 드래곤이 여태 탑을 지배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당당하게 올포원을 잡겠노라고 선언할 수 있는지를.

전력 중 일부만 내비쳤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그들은 청화도를 압도하고 있었다.

콰콰쾅!

그리고 그중에서 판트와 에도라가 이끄는 외인부대 2조도 맹활약을 벌이는 중이었다.

죽어라 팔진도를 연습한 덕분일까.

그들은 실전에서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자로 잰 듯 오와 열을 맞추면서 착실하게 청화도를 밀어내는 중이었다.

에도라는 중앙에 서서 혜안을 연 상태로 ‘좌와 우’를 번갈아 명령하면서 팔진도를 옳은 방향으로 유도했고, 판트는 그보다 앞으로 튀어나가 뇌정권을 잇달아 터뜨렸다.

그가 지나는 자리로 샛노란 뇌기와 새카만 재가 쉴 새 없이 흩날렸다.

쿠쿠쿠쿠-

그렇게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에도라는 신마도를 꼭 끌어안은 채, 외뿔부족이 아직 청화도에 합류를 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만약 아버지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양측 모두 피해가 훨씬 컸을 테니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자리에 없는 연우가 조금 걱정이 되었다.

-잠시 여길 부탁한다.

어떻게 대답할 새도 없이, 짧은 한 마디만 남기고 갑자기 종적을 감춘 그.

대체 어디서 뭘 하려는 것일까?

에도라는 여전히 많은 걸 숨기기만 하는 연우가 조금 미웠지만, 그래도 일단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가 언제 돌아오더라도 이제껏 그가 부재했다는 걸 남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야만 했다.

* * *

쐐애액-

연우는 전장의 사이사이를 빠르게 이동했다.

4대 신수의 내단과 도무신의 마력, 그리고 용체를 얻으면서 상승한 육체적 한계까지. 상승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순보를 밟자, 곳곳에 그의 잔상만 흐릿하게 남았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연우의 기척을 미리 읽을 새도 없었다.

워낙에 빠르게 사라지는 데다가, 당장 각자 위치에서 전황에만 집중해야 하는 상태였으니까. 그저 갑자기 주변에 남은 불의 기운 때문에 살짝 놀랐다가, 폭발 때문에 생긴 것이겠거니 하고 넘긴 게 전부였다.

때문에.

연우는 목적지로 움직이면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나와라.’

츠츠츠-

검은 팔찌가 검은빛에 잠기다가 곧 사방팔방으로 사기를 흘렸다. 예민해진 감각으로 주변에 있을 30여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주인이시여.」

「명령을.」

놀과 카를 비롯한 ‘괴이’들.

녀석들은 전부 연우가 샤논과 부를 데스 나이트와 리치로 만든 뒤,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귀들을 진화시킨 형태였다.

[괴이(怪異)]

망령과 사귀 등급을 이어 유령이 크게 진화한 형태.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해 간편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진다.

평소에는 그림자 속에 녹아 대기하고 있다가, 원할 때에 물리적인 실체를 자유롭게 가질 수 있다. 대체적으로 악의 성향을 띠며, 욕심이 많아 구천을 떠돌면서 호시탐탐 자신보다 약한 영혼들을 잡아먹으려 기회를 엿본다.

칭호 ‘죽음을 이끄는 자’는 사귀의 진화를 보다 더 쉽고 간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존에 있던 10여 마리는 물론, 20여 개체를 더 추가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시켜 주기도 했다.

덕분에 탄생한 괴이는 여러 모로 아주 편리한 존재였다.

필요에 따라 영적 실체와 물리적 실체를 자유롭게 변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는 힘도 사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영적인 모습을 할 때에는 기척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다. 물리적 실체를 필 때에는 하나하나가 세미 랭커보다 조금 떨어지는 힘을 선보였다.

게다가 조금씩 의사소통도 가능할 정도로 사고가 깊어지면서, 자체적인 판단도 할 줄 알았다.

힘을 세밀하게 다룰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력 면에서만 따지자면, 이미 클랜 연합들을 휩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것이다.

게다가.

‘흩어져라.’

연우는 거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곳은 전장. 죽음이 난무하고, 갖가지 귀한 영혼들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곳이다.

이제 갓 진화를 해서 배가 많이 고픈 괴이들이 포식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만찬회장은 없었다.

괴이들은 연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자로 녹아 사라졌다.

지금부터 곳곳으로 퍼져 나가면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방황하고 있을 영혼들을 맘껏 집어삼킬 것이다.

그중에 평범한 플레이어는 없다. 전부 하나같이 거대 클랜에 소속 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들이었고, 개중에는 간간히 눈 먼 칼에 죽은 랭커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자들만 먹어 치우는 것이다. 단언컨대, 괴이들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할 게 분명했다.

때로는 전투에 개입해서 다 죽어 가는 플레이어들의 목숨을 직접 거두기도 하겠지.

그렇게 차곡차곡 성장하다 보면. 그리고 망령을 채집하다 보면 컬렉션도 뛰어난 녀석들로 가득 찰 게 분명했다.

그래서 연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은밀하게 움직여야 해서 소리는 낼 수 없었지만, 이렇게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무대를 만들어 준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에 너무 감사했다.

그리고 죽어라 어부지리만 내어 주는 저들의 멍청한 꼬락서니를 비웃었다.

물론, 아직 축배를 들기엔 너무 일렀다.

리언트가 남아 있었고, 바할이 있었다. 두 사람을 마저 죽이고, 이 전쟁을 더 극대화시킬 때까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연우는 리언트의 기척이 점차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속도를 조금씩 늦추기 시작했다.

대신에 최대한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기척을 죽였다. 은밀하게 움직이면서 리언트의 뒤를 칠 준비를 했다.

리언트가 있는 곳에는 녀석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를 보호하는 집단도 있었고, 그를 빼앗으려 하는 곳도 있었다. 그곳에는 그곳 나름대로 또 다른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개중에는 바할의 기척도 섞여 있었다.

‘역시 녀석도 리언트를 잡으러 온 거야.’

바할을 처음 탑 외 지역에서 만났을 때. 그는 연우와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튜토리얼 지대에서 돌아오던 리언트를 급습했다.

그때는 왜 그런 걸까 의문을 가졌었다.

그저 단순히 레드 드래곤이 청화도에 전쟁을 선포할 이유가 없으니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그 이유 중에 하나쯤은 리언트와 어떤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돌.’

리언트가 튜토리얼 지대에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희생시키면서 만들고자 했던 돌. 여전히 이름이나 정보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여러 신비를 가진 게 분명한 돌을 바할이 노리고 있었다.

바할의 옆에서 도무신에게로 보낼 거라고 했던 편지를 훔쳐볼 수 있었으니까.

물론, 아직까지 레드 드래곤이 그 돌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구했고, 어떤 용처로 쓰려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당장 녀석들이 찾는 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안 이상, 연우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 바할과 리언트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눈치가 빠른 리언트는 자신이 가장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잘 알 테니 어떻게든 도망치려 할 것이다.

검무신의 도움을 빌릴 수도 있고, 자신의 남은 세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취하든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게 분명했다.

바할은 그런 리언트를 다시 쫓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궁지로 내몰렸으니 돌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여길 테니까.

그리고 원래 리언트의 성격이라면 그렇게 나오는 게 정석이었다. 녀석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의 안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녀석이었다.

‘물론, 그것도 리언트에게 진짜 돌이 있을 때 이야기겠지만.’

결국 리언트는 자신을 뒤쫓는 바할 등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려 할 것이다. 돌이 없으니 그에 준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대단한 전력을 갖춰야만 한다.

그런 상태에서 리언트와 바할이 충돌을 벌인다면.

없는 돌을 두고 끝까지 다툼을 벌인다면, 누가 이기더라도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 뒤에.

‘내가 뒤를 친다.’

연우는 즉각 들이칠 생각이었다.

그 전에 전장을 떠돌아다니면서 포식할 대로 포식해서 무럭무럭 성장했을 괴이 군단을 잔뜩 이끌고서.

용체를 완전히 각성하고, 동생의 얼굴을 하고서.

그리고.

저 멀리.

예상대로 리언트와 바할이 충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 *

콰콰쾅!

“제…… 기랄!”

리언트는 가슴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불길을 마구 쏟아내면서 끝까지 따라붙는 바할의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섬뜩하기까지 했다.

검마칠십이단. 마신검단. 호위검령. 백검무단…….

청화도가 자랑하는 최정예들, 그것도 검무신의 직속 산하에 해당하는 랭커와 플레이어들이 그를 호위하는 중이었다. 개중에는 청화도가 여태껏 비밀리에 숨겨 두고 있던 무신급 인사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바할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들을 강제로 밀어냈다.

찢어발기고, 부쉈다.

그를 따라온 플레임 비스트도 이름처럼 짐승이 되어 마구 날뛰었다.

콰콰콰-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 시간이 흐를수록 접전은 자꾸만 커졌다.

“끝까지 버틸 셈인가, 친구? 자네가 이렇게까지 고집이 있는 친구인 줄은 몰랐는데. 어?”

바할이 내뱉는 비꼬는 언사에 리언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없다고, 그딴 거! 너희들이 찾는 돌이란 것, 정말로 없단 말이다! 사라졌다고! 있으면 진즉에 내가 썼지, 왜 안 쓰고 있겠냐고!”

원래대로라면 끝까지 숨겼을지도 모른다.

돌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 자신의 원대한 꿈은 사라지는 거니까.

돌은 고스란히 검무신에게 뺏기고, 섬에 해악만 끼쳤다면서 징계를 받을 게 불에 보듯 뻔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고, 다른 무신들이 그를 무시하면서부터 가슴 속에는 울화가 자꾸 쌓였다.

그러다 도무신이 자신을 겁박하면서부터. 검무신이 보호해 주겠다는 말로 꼬드기면서 돌을 내놓으라고 종용하고, 결국 이렇게 레드 드래곤이 습격을 해 오면서 자신의 턱밑까지 칼을 들이대는 순간.

더 이상 억울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돌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덜 억울했을 것이다.

그때는 도무신에게 빼앗기든, 검무신에게 상납을 하든 간에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몸부림이라도 칠 수 있었을 테니.

하지만 정말 돌은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그런데도 놈들은 증발한 돌을 내놓으라고 자꾸 겁박을 해 댔다. 진짜 없다고 진실만 이야기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머릿속, 마음속에 든 걸 전부 꺼내 놓고 진실을 밝히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진 자들도 사실은 감시 역에 가까웠다.

“끝까지 그렇게 나온다는 거로군. 좋아. 해보자고.”

바할은 그런 리언트의 모습을 보면서 아예 녀석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얼핏 진짜 돌이 사라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없더라도 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이쪽은 이쪽대로 사정이 급했다.

여름여왕이 언제까지 세 무신을 압도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정확한 것은 그리 시간이 길지 못하다는 것.

드래곤 하트가 망가진 그녀가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쳤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는 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막아야 했다. 돌을 찾아서 드래곤 하트를 복구하고, 다시 탑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바할은 어떻게든 리언트를 포획할 생각이었다. 돌이 없다면 잡아서 만들 방법이라도 토해 내게 하면 된다. 레드 드래곤이 나서서 구하지 못할 재료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인간이라면 인간, 엘릭서라면 엘릭서.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런 바할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플레임 비스트도 끝까지 리언트에게 따라붙었다. 여기에 맞서 리언트의 호위들이 겹겹이 뭉치면서 더 크게 충돌했다.

콰아앙-

그런 상황 속에서 리언트는 이를 악물었다. 으스러져라 어금니를 갈면서 눈에 불을 켰다. 억울한 마음이 커지면 분노가 앞서기 마련이고, 분노는 이성을 잠식하기에 아주 좋은 양식이었다.

“끝까지 이딴 식으로 나선다면……! 좋아. 끝까지 해보자, 바할!”

결국 리언트는 갖고 있던 마력을 전부 터뜨렸다. 나중에 후유증이 크더라도, 우선 눈앞에 있는 녀석을 찢어 죽여야 조금이라도 분한 마음이 가실 것 같았다.

순간. 리언트를 따라 엄청난 마력 폭풍이 불어닥쳤다. 스톰 브링거니, 괴뢰술사니, 하는 별칭으로 불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폭풍.

바할이나 다른 무신들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은 힘이었다.

바할은 갑작스레 변한 리언트의 기세를 읽고 흠칫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력에 섞인 익숙한 냄새를 깨닫고 눈살을 찡그렸다.

“이건 설마…… 환룡? 내단이라도 삼킨 거냐? 이걸 어떻게 너희들이 갖고 있었던 거지?”

환룡. 한때, 그들이 깊이 신뢰하고 따랐던 동료가 부리던 환수. 지금은 지우고 싶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료가 죽으면서 같이 사라졌다고 알려졌던 환룡의 내단이 어떻게 리언트에게 있었던 걸까?

하지만 리언트는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환룡의 힘을 가득 풍기면서 잇달아 장풍을 쏟아 냈다. 손 그림자가 허공을 한가득 물들이면서 쏟아지는 장풍 세례는 하나하나가 태풍에 비견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환룡은 환수의 최상위종으로서 닿는 모든 속성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런 기세가 섞이니, 바할이 내뿌리는 〈불벼락〉도 계속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언트를 따라 갖가지 마법진이 생성되면서 마법 무장(魔法武裝)이 갖춰졌다. 검무신이 도무신으로부터 리언트를 보호하라면서 따로 지시해 놨던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리언트의 움직임에 버프를 잔뜩 중첩시켰다.

그리고 반대로 바할에게는 디버프와 저주를 잇달아 걸어 손발을 느리게 만들었다. 실명과 공황, 중독 등이 뒤따랐다가 사라졌다.

쿠쿠쿠-

그렇게 충돌이 계속 커지면서.

플레임 비스트가 잔뜩 쓸려 나갔다. 손길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플레이어들이 족족 죽어 나가면서 피보라가 튀었고, 뜨거운 열기에 증발해서 사라졌다.

반대로 리언트 쪽의 피해도 자꾸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어느새 어질러진 전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려지는 순간 이 목숨을 잃는 순간이었으니까. 적아를 막론하고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고, 부딪치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리언트가 바할의 바로 코앞까지 치달았다.

바할은 흠칫 놀라야만 했다.

여태까지 사냥꾼으로서의 역할만 했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리언트가 사냥꾼처럼 느껴졌다. 한순간에 사냥감으로 전락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광기까지 느껴지는 리언트의 두 눈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 리언트는 몸을 비틀면서 여태껏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꺼냈다. 손목에 감겨 있던 팔찌가 빠르게 풀리면서 빳빳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칼’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창’으로 보이기도 하고, 모양을 만들기에 따라서 ‘도끼’나 ‘채찍’ 같은 다른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검무신이 리언트에게 위기 시에 쓰라고 맡긴 물건이었다.

정말 클랜이 위기에 빠지지 않는 한, 절대 꺼내지 않으려고 했던 최강의 무기.

궁그닐.

주신 오딘이 하늘에서 적들을 벌할 때에 내린다는 신의 무기가, 어떤 등급으로도 따질 수 없을 최강의 칼이 샛노란 빛을 토해 내면서 시야를 가득 물들였다.

“죽어라.”

악에 받친 리언트의 외침과 함께.

콰아아앙!

콰콰콰-

쿠르르! 콰쾅! 쿠쿠쿠-

폭발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아니, 회오리를 치면서 공간을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바할을 비롯해 플레임 비스트는 물론, 검무신이 붙여 뒀던 호위들까지 죄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쓸려 나갔다.

그 속에서. 리언트는 포효했다.

환룡의 내단을 거의 다 소비해 버렸지만, 드디어 빌어먹을 놈을 처치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이 힘만 있다면. 돌이 없어도 될 텐데. 아니, 돌이 있는 상태에서 이것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한창 예민해진 감각으로, 계속 퍼져 나가는 폭발 사이로 뭔가가 튀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리언트으!”

바할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들고 있었다. 녀석은 왼팔이 날아가고, 얼굴과 전신이 처참하게 뭉개진 상태로 악바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두 눈은 분노로 가득 차 어떻게든 리언트를 죽여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언트는 그 모습에서 처음 녀석에게 달려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자신에게는 궁그닐이 있는데. 검무신이 와도 자신이 있는 마당에, 달려드는 꼴이라니. 바할이 불나방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궁그닐을 앞으로 내지르려 했다. 환룡의 남은 내단을 몽땅 소진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겠다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을 잡아 돌로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궁그닐을 앞으로 내뻗었다. 환룡의 내단을 몽땅 끌어들이며 칼끝이 다시 한 번 번쩍이려는 순간.

퍼억!

리언트는 갑자기 뒤에서부터 일어난 충격에 몸을 뒤흔들었다. 울컥. 입가를 따라 비릿한 핏물이 쏟아졌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 궁그닐에 맺혔던 마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그는 떨리는 눈길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왼쪽 가슴을 따라 처음 보는 칼날이 비집고 나와 있었다. 갑옷을 따라 핏자국이 점차 번지고 있었다.

억지로 뒤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검은 가면 아래로 싸늘한 눈빛을 한 누군가가 검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리언트는 어쩐지 녀석이 가면 아래로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얼굴형이 낯이 익은 것 같다는 생각도 같이.

“드디어 만났구나.”

연우가 싸늘하게 조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