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33화 (133/862)

8화. 각성(覺醒) (3)

리언트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

어떻게 보면 아주 반가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치 오랜만에 마주친 친구를 본 것처럼.

하지만 리언트는 그 목소리 아래에 깊게 깔린 짙은 살의를 느꼈다.

이자는 대체 누굴까?

이만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아르티야가 무너진 이후로, 최대한 몸을 사리면서 지냈기 때문에 생각이 미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더 깊게 생각해 보려 했지만. 생각은 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스걱!

눈앞에서 섬광이 번쩍인다는 생각과 함께 의식이 아래로 내려앉았다. 그게 리언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푸우우-

리언트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튀었다. 잘린 목에서 피보라가 높게 솟구치면서, 그 사이로 연우의 가면 쓴 얼굴이 드러났다.

연우는 왼손을 활짝 펼쳐 쓰러지려는 녀석의 시신에다가 갖다 댔다.

랭커로서 가졌던 생명력과 아직 조금은 형태가 남은 환룡의 내단을 수거하기 위해서.

‘이 녀석이 정우의 환수 내단을 먹었을 줄은.’

동생이 쓰러진 뒤, 환룡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청화도에서 잡았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우연이라도 수거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생과 환룡 사이는 너무나 각별했었으니까. 특히 환룡은 고룡 칼라투스가 동생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바토리의 흡혈검’을 사용했습니다. 사체에 남은 정혈을 흡수합니다.]

[힘이 2만큼 올랐습니다.]

[체력이 5만큼 올랐습니다.]

……

연우는 금세 쭉정이만 남아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리언트의 사체를 바닥에다 아무렇게나 내버렸다.

퍼석.

충격과 함께 시체가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연우는 더 이상 그런 리언트의 시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녀석은 동생의 심장에 직접 칼을 꽂았던 자들 중 하나.

그렇다면 그만큼 속이 시원하다거나 통쾌한 마음이 들어야 했지만, 그보다 이제야 겨우 해야 할 일을 하나 끝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

연우에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리언트에게서 캐낼 건 많았지만, 영혼을 미리 컬렉션에 넣어 뒀으니 나중에 따로 소환해서 심문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 다른 사냥감을 노릴 차례였다.

연우는 몸을 돌렸다. 이쪽으로 달려오다 말고 멈춰선 바할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카인?”

바할의 얼굴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

그는 분명 여기로 이동할 거란 것을 연우에게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2조와 다른 외인부대를 함께 지휘하면서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치라고 신신당부를 해둔 상태였다.

눈에 띄는 활약을 벌이면 벌일수록, 앞으로 그를 중용하는 데 있어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으니까.

바할은 정말 진심으로 연우를 크게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른팔로서. 앞으로 레드 드래곤의 이인자로 성장할 자신의 보좌역으로서.

그런데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우가 갑자기 바로 이곳에 나타났다.

그것도 서늘한 눈빛을 하고서. 가면 아래 보이는 두 눈은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서.

바할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름여왕이 어떻게든 제압해서 잡아 오라던 리언트가 죽고 말았다는 것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돌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여기를 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자신은 현재 너무 크게 다친 상태. 하이 랭커라고 해도, 레드 드래곤이 자랑하는 81개의 눈에 해당하는 고수라고 해도, 지금의 몰골로는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한 발자국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경악하고 말았다.

아르티야를 나온 이후. 레드 드래곤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물러서지 않았던 자신이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절대 물러서는 것을 모르던 자신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끝까지 포기를 모르던 자신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사실에.

그러면서 자신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킨 정체가 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 피어.

여름여왕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약하지만, 그건 분명히 용종만이 가질 수 있다는 살기였다.

생명체라면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압도되고, 공포를 느끼며, 경의를 표하게 된다는 용종의 힘!

그런 힘이 어째서 연우에게서 풍기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할은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여왕 말고도 용종의 힘을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알려야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니까. 그리고 여태 자신들을 갖고 놀았을 게 분명한 녀석에 대해 누군가에게라도 전해야만 했다.

자신이 안 된다면 아직 겨우 숨이 붙어 있는 플레임 비스트의 누군가라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영역 선포.”

연우는 바할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내빼려 하기 직전, 용체를 각성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곧바로 시전했다.

[용의 영역, ‘비나’가 선포되었습니다. 일정 영역에 걸쳐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단계 권능이 발현됩니다.]

[권능: 드래고닉 블러드.]

[일정 시간에 걸쳐 모든 능력치가 특정 수치만큼 증가합니다.]

[일정 시간에 걸쳐 물리 방어력이 특정 수치만큼 상승합니다.]

[일정 시간에 걸쳐 속성 방어력이 특정 수치만큼 상승합니다.]

……

[용의 기운을 각성했습니다.]

[드래고닉 블러드]

설명: 고룡 칼라투스는 계약자가 용체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8단계에 걸쳐 권능을 세분화시켰다. 그중 첫 번째 단계.

용종의 피는 순수한 마나를 함유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뛰어난 면역력과 항마력을 보유하게 된다. 또한, 용의 인자를 활성화시켜 체내의 잠재 능력을 최대로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 용혈 각성

용의 피를 계속 수급 받는다. 각종 속성력에 뛰어난 면역력을 자랑하며 항마력으로 다른 종류의 마력으로부터 뛰어난 저항력을 지니게 된다. 또한, 빠른 회복력을 보유하여 다친 상처와 지친 체력을 치료할 수 있게 된다.

* 용의 감각

선포 영역에 걸쳐 보다 예민한 공감각을 지니게 된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감각이 세밀해지며, 나아가 미래 예지에 가까운 판단도 가능해진다.

연우의 발밑을 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진이 푸르스름하게 깔리더니, 곧 그것은 넓은 영역에 걸쳐 확장되었다.

화아악-

연우는 체내에 바짝 힘이 실리는 것을 느꼈다.

용의 인자가 깨어나면서 체내에 흐르던 피가 용혈(龍血)로 바뀌었다.

신체 곳곳에 힘이 바짝 실리고, 살갗 위로 올라왔던 용린이 남색 빛깔을 띠면서 더 짙게 변했다.

눈가에는 새로운 동공이 열리면서 세상의 이면을 좇기 시작했다.

감각도 좀 더 세밀해졌다. 영역으로 선포된 범위를 전부 머릿속에 담았다. 수십 배로 확장된 의식 영역 속으로 막대한 양의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순간 현기증이 돌았지만, 그만큼 연산 처리가 빨라지면서 사고 판단도 덩달아 빨라졌다.

마력회로가 울었다. 코어가 일제히 가동되면서 마력을 사방으로 뿌리며 등 뒤로 불의 날개를 화려하게 꽃피웠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비그리드가 거칠게 떨렸다.

이것이 바로 용종의 첫 번째 권능, 용혈 각성.

인위적으로 체내에 용의 피를 흐르게 함으로써, 용체가 가진 모든 신체적 능력을 극한까지 끌어 올리게 해 주는 힘이었다.

그리고 그의 영역으로 선포된 곳에 걸쳐, 용의 기운이 스며들면서 법칙을 묶어 두기까지 했으니.

바할은 보이지 않는 사슬에 발목이 묶인 것처럼 쉽게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강제로 뿌리치려 하면 할수록 반발 작용으로 더 강한 힘이 땅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그를 강하게 구속했다.

그건 바할뿐만이 아니었다.

궁그닐의 폭발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던 자들도.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 탈출할 기회를 엿보던 플레이어들도.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 어느 소속에 가릴 것 없이 모두 발이 묶여버렸다.

그들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드래곤 피어는 단순히 그들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속박하려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츠츠츠-

마법진이 깔린 곳을 따라, 갑자기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새카만 그림자가 되어 이상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유령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괴물처럼 보이기도 한 것들.

전장에 뿌려 놨던 괴이들이 연우의 명령에 따라 소환된 것이다.

그리고 괴이들의 등장과 함께, 이번에는 대기를 따라 잿빛 안개가 자욱하게 퍼져 나갔다.

상공에서 부가 구슬을 높이 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죽은 망자들이여. 주인님의 의지를 따르라!」

녀석의 선언이 떨어진 순간. 곳곳에 널브러진 사체들이 덜덜 떨리더니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켈레톤과 구울, 좀비 등 언데드들은 산 자가 있는 곳으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시큼한 악취를 풍겨 댔다.

그 중심에는 어느새 샤논이 서서 언데드 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마치 생전에 수하들을 이끌었을 때처럼. 그는 데스 나이트만이 가진 기질을 이용해 단번에 망자의 군단을 휘어잡아, 남아 있는 산 자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주인님께 영광을-!」

콰쾅-

“크아악!”

“아악!”

주변은 삽시간에 괴이 군단과 망자 군단에 둘러싸여 하나둘씩 사냥되기 시작했다.

이미 궁그닐로 크게 다치고 말았기 때문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었다.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불덩이와 얼음 조각에 사람도 산산이 부서졌다. 망자 군단에 짓밟히고, 괴이들에게 목이 잘려 나갔다.

비명이 울리고, 절규가 퍼졌다.

마치 죽은 자들의 세상에 떨어진 것만 같은 착각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할은 멍하니 선 채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용종의 권능과 죽음의 힘.

하나만 하더라도 탑이 발칵 뒤집힐 만큼 대단한 힘일 텐데. 그걸 동시에 다루는 자라니.

하지만.

연우는 그런 걸 말해 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듯, 강하게 지면을 박찼다.

팟-

“흡!”

바할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내빼면서 주먹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연우에게 느끼는 위기감은 어디까지나 용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겪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미 랭커를 겨우 이겼던 녀석이었다.

노비스 치고 너무 빠른 성장이라지만,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자신을 당해 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상식적으로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았다.

물론, 궁그닐을 상대하면서 육체가 많이 망가진 상태이긴 했다.

한쪽 팔이 날아가고, 마력 기관도 상당히 훼손되었으니까.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니, 빈사 상태에 가깝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랭커 중에서도 상위 축에 속하는 녀석이 나타나면 위험할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우에게 꺾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르티야에서부터 레드 드래곤의 ‘눈’이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절대 쉬운 길이 없었고, 하나하나가 고난과 역경이었으니.

바할은 자신이 성취한 화권이라는 별칭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내지른 주먹에서 피어난 불꽃은 아주 강렬했다.

일대를 초토화시킬 만큼 강한 화력이 피어났다.

하지만.

콰앙!

화력이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비그리드가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튀어나와 그를 거세게 후려쳤다.

“크으윽.”

바할은 충격과 함께 뒤로 크게 밀려났다. 휘청거리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그의 얼굴에는 불신감이 잔뜩 어렸다.

방금 전 그 충격은 절대 세미 랭커급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최소한 랭커. 그 정도는 되어야 보일 수 있는 힘이었다.

정말 연우가 이만한 힘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얼굴을 따라 경악과 불신이 잔뜩 퍼져 나갔다.

게다가 불길은 연우에게 크게 통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바할은 혹시 자신이 뭔가 잘못 판단한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연우가 바짝 쫓아오는 것에 맞춰 이를 악물며 손을 거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마력 기관이 찢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콰콰쾅!

하늘에서부터 불벼락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벼락은 금방이라도 연우를 집어삼킬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터터텅!

연우는 이번에도 달려오던 그대로 비그리드를 잇달아 휘두르면서 불벼락을 갈라 버렸다.

그럴 때마다 칼끝에서 성화가 피어났다가 사그라지면서 남은 잔재를 빠르게 흡수했고, 그럴수록 연우를 칭칭 감은 불의 날개는 더더욱 화력을 더했다.

이미 연우는 모든 불꽃의 씨앗이라는 성화를 품고 있었다.

당연히 화 속성을 강하게 띠는 바할의 공격은 번번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속성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한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바할을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코어를 있는 힘껏 가동시키면서 가속도를 극한까지 쥐어짰고, 비그리드를 휘몰아칠 때마다 성화를 잇달아 터뜨리면서 바할을 계속 궁지로 몰아넣었다.

쾅! 쾅!

콰아앙-

“젠자아앙!”

그럴수록 바할은 더 크게 분노를 내질렀다.

어떻게든 연우를 떨쳐 버리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 때마다 신체에 새겨지는 상처가 자꾸 커지고 늘어났다.

불꽃이 터졌다. 연우는 비그리드로 불길을 옆으로 후려치면서 칼의 방향을 안쪽으로 꺾었다.

비그리드가 녀석의 왼쪽 정강이를 깊게 가르고 지나갔다. 바할은 인대가 끊어지면서 한쪽 다리를 후들거리더니 지면에 무릎을 부딪쳤다.

바할은 신음 소리도 내지 않고 다시 이를 악물며 남은 손을 거세게 아래로 내리쳤다.

우르르, 콰쾅!

다시 한 번 더 불벼락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성화만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 연우는 불의 날개를 활짝 펼쳐 뒤로 살짝 물러섰다.

뜨거운 열기로 대기를 데우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이제 진짜 날개처럼 비행을 어느 정도 순조롭게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가 빠르게 떠난 자리로 불벼락이 떨어지면서 시커먼 그을음이 남았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다시 한 번 더 불벼락이 떨어졌고, 이번에는 피하기 힘들겠다 싶어서 왼팔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여태 등에 매달고서 숨겨 두고 있던 아이기스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9겹 중 5겹이 날면서 불벼락을 튕겨 냈다.

그리고 연우의 주변을 뱅그르르 맴돌았다. 아이기스는 외부에서 떨어지는 모든 불벼락을 막아 내고, 튕겨 내며, 흘려 버렸다.

[전투 의지]

[감각 강화]

이제 연우에게 있어 전투에 몰입할 때면 패시브 스킬처럼 따라 붙는 두 스킬은 용체를 만나면서 큰 변화를 꾀할 수 있었다.

확장된 사고 능력은 전투 의지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이전보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연우는 더 집중해서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면서 움직일 수 있었다.

감각 강화는 용의 감각과 섞이면서 더 세밀한 정보를 가져다줬다. 수많은 투로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바할의 다음 움직임을 빠르게 예측했다.

두 스킬이 안과 밖에서 서로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리면서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연우는 바할이 뿌리는 불벼락을 아이기스로 막아 내고, 내지르는 주먹의 투로를 읽어 순보를 밟아 쉽게 피했다.

쉭!

[푸른 정령의 가호(임시)]

그리고 어비스 터틀이 선물로 주었던 정령은 4대 신수의 마력이 용체에 제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용체에 신수들의 가호가 제대로 녹아내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천익기공에서 팔극권까지. 마력 회로에서 비그리드까지. 마력이 힘차게 공급되면서 팔극권의 다양한 투로를 그려 낼 수 있었다.

시야를 따라 잔뜩 퍼져 있는 결을 따라서. 칼끝에 푸른 성화를 있는 잔뜩 담아내면서.

빠른 속도로 바할의 팔다리를 잘라 나갔다.

쉭!

쉭-

비그리드가 바할의 오른쪽 옆구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늑골이 죄다 부러지고, 장기가 잘려 나갔다. 성화가 체내로 침투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마력 기관을 모조리 끊어 버렸다.

물론, 바할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빈사 상태에 가깝다고 해도 하이 랭커는 하이 랭커. 속성에서 우위를 내준다고 해도, 마력의 등급은 연우를 훨씬 능가했다.

불꽃을 터뜨릴 때마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마력 폭풍이 날카롭게 뻗쳐 나가면서 연우에게 계속 상처를 입혔다.

왼쪽 어깨가 부러지고, 오른쪽 허벅지가 눈에 띄게 뭉개지기도 했다. 옆구리가 갈려 나가면서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콰드드득-

하지만 연우는 그런 상처를 입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의 날개를 연거푸 거칠게 펼쳤다. 빠른 기동성을 이용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바할의 시야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기회가 보인다 싶으면 깊숙하게 파고들어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이쪽이 상처를 입으면 저쪽에는 중상을 입히겠다는 생각으로. 그 사이에 드래고닉 블러드가 계속 돌면서 상처 회복을 도왔다.

귀기가 잔뜩 깃든 비그리드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대기가 찢어 질 때마다 끔찍한 귀곡성이 자꾸만 퍼져 나갔다.

그래서.

쉬쉬쉭-

비그리드는 연이어서 복부에 박히고, 오른쪽 가슴을 훑고 지나가고, 남아 있던 오른쪽 팔을 마저 잘라 버렸다.

퍼퍼퍽!

상처가 커지고, 화상 자국이 번져 전신을 뒤덮을 때까지. 오른쪽 다리가 베이면서 쓰러질 때까지 바할은 절규를 내뱉어야만 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라아알!”

바할은 이대로 처참하게 당할 수 없다는 듯, 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짰다. 거친 화마가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연우를 덮었다.

〈볼케이노〉.

불벼락과 함께 바할을 상징한다는 시그니처 스킬이 작렬했다. 마치 용암이 지면에서 솟구치듯, 불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스걱!

마지막 공격은 결을 따라 휘두른 비그리드에 처참하게 망가지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흩날리는 불똥 사이로 비그리드가 화살처럼 쏘아져 그대로 바할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퍼억!

“컥!”

망가진 바할의 몸뚱이가 그대로 지상에 내리꽂혔다.

팔다리가 전부 잘려 나간 채로 퍼덕이는 녀석의 몰골은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처량하기까지 했다.

울컥.

바할의 입가를 따라 핏물이 벌컥벌컥 쏟아졌다.

누군가가 구해 주길 기다렸지만, 그는 뒤늦게야 주변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주변에는 자신과 연우 외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느새 괴이 군단과 망자 군단에 의해 전멸한 상태. 덕분에 리언트와 바할이 끌고 왔던 두 클랜의 최정예들이 전부 죽어서 망령 상태로 컬렉션에 귀속된 상태였다.

그야말로 연우에게는 노다지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대단한 쾌거.

반면에.

바할은 잔뜩 공포에 질려 덜덜 떨어야만 했다.

죽음이 바로 코앞까지 다다랐다는 사실이 너무 두렵기만 했다. 한평생 승리만 구가하고, 남들을 약탈하는 입장이기만 했던 그에게 이런 상황은 너무 낯선 것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살려 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성대가 화상으로 다쳐 새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는 그런 소리마저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연우가 바할의 위에 올라탄 채로 가면을 벗는 순간. 그 속에 여태 숨겨진 얼굴이 드러난 순간.

차갑게 웃고 있는 그의 미소를 본 순간.

“……!”

바할은 머릿속이 창백해진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얼굴이. 분명 죽었어야 할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죽은 사람이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 어떤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충격과 불신, 그리고 공포.

세 가지 감정이 눈가를 메우는 순간, 마장대검의 칼끝이 바할의 미간에 깊숙하게 박혔다.

퍽!

털썩-

바할의 머리가 힘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두 눈을 부릅뜬 상태 그대로.

연우는 천천히 옆으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입가를 따라 단내가 잔뜩 퍼져 나왔다. 긴장으로 달아오른 육체는 여전히 뜨거웠다.

그러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갖가지 감정이 가슴 한복판에서부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정우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뿐.

그리고 그런 연우의 심경을 대변하듯.

쏴아아-

하늘에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톡톡 두들기는 빗방울이 연우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