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각성(覺醒) (4)
연우가 다시 눈을 뜬 건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치던 머릿속이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다시 가면을 쓰는 손길에는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연우는 바할도 리언트와 마찬가지로 바토리의 흡혈검을 사용해서 똑같이 흡수를 시도했다.
피륙의 정기는 능력치로 환원시키고, 영혼은 검은 팔찌의 컬렉션에 눌러 담았다.
우웅, 웅-
검은 팔찌가 거세게 흔들렸다.
바할과 리언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던 플레임 비스트며 검무신의 산하 조직원들까지. 여러 고수들의 영혼이 담겨 있다 보니 망령으로 전락했어도 컬렉션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연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검은 팔찌의 속박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놈들에게는 나중에 따로 물을 것도 많고.’
연우는 이번 전쟁의 배경에 대해서 리언트와 바할을 심문해 내용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혹시 자신이 빠뜨리거나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까.
‘돌의 쓰임새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지.’
연우는 원래 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러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한다는 게 영 꺼림칙했고, 사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제대로 제어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이 전쟁을 걸 정도로 귀한 물건이라면. 당장 사용하지 않더라도 용도에 대해서는 미리 파악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짹짹이가 쉬는 장소이기도 해서 더 마음에 걸렸다.
그 다음에는. 샤논이나 부에게 아주 좋은 양식이 되겠지. 아니면 괴이들에게 나눠 줘도 될 테고.
연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것으로 목적은 확실하게 전부 다 이뤘다.
바할과 리언트를 잡았고,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싸움을 극대화시켰다. 레드 드래곤이 크게 패퇴를 하든, 청화도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든 간에, 양측이 입은 피해는 모두 컸다.
더 이상 연우가 개입할 요소는 없었다.
오히려 머뭇거리다가는 오해만 사기 쉽겠지.
아직 두 집단 내에 처리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리다가는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직은 자신을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연우는 괴이 두 마리를 꺼내 판트와 에도라에게 보냈다. 자신의 메시지를 담아서.
“둘에게 이만 여기서 철수한다고 전해.”
* * *
『이건…… 설마?』
여름여왕은 주제도 모르고 다시 검을 휘두르며 덤비는 검무신에게 브레스를 쏟아부으려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흉악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름여왕은 적잖게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용언 계약(Draconic Contract)’을 통해 레드 드래곤의 간부인 81개의 눈 개개인과 심령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위치나 행방은 물론, 대략적인 표층 심리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중 한 개의 연결 고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그것도 리언트를 쫓으라고 보냈던 바할과의 연결 고리.
용언 계약은 법칙에 결속되기 때문에 계약 당사자의 자유의사로는 절대 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을’의 위치에 해당하는 81개의 눈은 여름여왕이 부리는 사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끊어졌다는 뜻은 단 하나.
바할이 죽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건 바할이 리언트의 뒤를 쫓고 있었고, 레드 드래곤에서도 손꼽히는 정예인 플레임 비스트가 바할을 돕다가 같이 증발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결국 ‘돌’의 행방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당장 드래곤 하트가 부서질 듯 말 듯 위태롭기만 한 상황 속에서. 그녀로서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입은 셈이었다.
그래서 여름여왕은 분노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마력을 억지로 쥐어짜면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찾아온 마당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말았다.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그런 여름여왕만큼이나 검무신도 당황하고 있었다.
의념으로 사선검을 조종하던 중에 갑자기 오른쪽 팔뚝에 하얀색 팔찌가 착 하고 감겼다.
궁그닐. 리언트에게 빌려줬던 ‘칼’이 돌아왔다. 원래 귀속 아티팩트였기 때문에 원주인이 원할 시에 언제든지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었지만, 검무신은 궁그닐이 돌아오길 바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단 하나. 리언트가 죽어서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돌의 행방이 감쪽같이 사라진 셈이었다.
『네놈들이, 끝까지……!』
사자 탈 아래, 검무신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검무신에게 있어 레드 드래곤은 정말이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녀석들이었다.
갑자기 전쟁을 걸어오질 않나, 도무신을 이용해서 4대 신수의 내단을 허공으로 날려 버리질 않나, 이제는 돌까지 앗아 갔다.
게다가 이번 습격으로 청화도는 너무 큰 피해를 입었다. 전력 중 절반 이상이 날아갔고, 무신은 두 명이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피해는 과거 아르티야와 전쟁을 치렀을 때에나 입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었는지 떠올려 본다면.
아니, 그때보다 타격이 크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울분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돌’이 저쪽으로 넘어갔다는 생각이 든 순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검무신은 궁그닐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름여왕을 잡아 어떻게든 족쳐야만 돌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지금부터 궁그닐을 개방할 것이다. 나를 도와 다오.』
검무신은 입술을 달싹여 창무신과 궁무신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리언트가 사용하던 것과 다르게, 궁그닐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력을 가공하고, 법칙에 간섭할 대기 시간이 길었다.
그동안 창무신과 궁무신더러 시간을 벌어 달라는 의미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행동은 즉각 이뤄졌다.
창무신은 왼손으로 허리춤을 뒤지더니 또 다른 창을 하나 더 꺼내 쥐었다.
오른손에는 장창, 왼손에는 단창을 움켜쥐고서 땅을 거세게 박차 여름여왕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공간을 접어서 공격을 퍼붓는 굴공창에 이은 〈연쇄창〉까지. 그는 화려한 창술을 선보이면서 여름여왕을 쉴 새 없이 타격해 시야를 교란시키는 근접전 역할을 맡았다.
반면에 궁무신은 창무신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후방에서 여름여왕이 창무신과 검무신을 제대로 공격할 수 없게 화살을 계속 날려 여름여왕을 견제하고, 이따금 강한 일격을 날려 급소를 노리는 방식이었다.
콰콰콰-
창무신이 창을 휘두를 때마다 공간이 갈라져 나갔다.
쩌걱. 쩌걱.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단층이 높게 치솟으면서 여름여왕의 몸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나갔다. 날아오는 용의 발길질이나 꼬리는 재주 좋게 피해 다녔다.
궁무신은 사일동궁을 계속 잡아 당기면서 빛줄기를 잇달아 토해 냈다.
화살이 한 번 쏘아질 때마다 갈라져서 만들어지는 수십 개의 빛줄기는 일정한 방향이나 궤적 없이 날아들다가 꺾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늘어난 빛줄기가 수백 수천 개.
빛줄기들은 계속 여름여왕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시야를 잔뜩 어지럽히다가, 창무신이 여름여왕의 목젖을 노리는 사이에 상공 한가운데로 모여 들었다.
창무신은 그 빛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일동궁의 힘을 한곳에 집합시켜 날리는 〈낙일시(落日矢)〉는 태양을 떨어뜨렸다는 전설을 담고 있는 신 이예의 스킬.
저 정도라면 궁그닐이 완전히 개방되기 전에 여름여왕의 뒤통수에다 구멍 하나쯤은 쉽게 낼 수 있겠다고.
그렇게 모인 빛 뭉치는 단단히 압축되면서 뜨거운 열기를 뿜었다.
마치 새로운 태양이 하늘에 맺힌 것처럼 찬란한 열광을 토해 내다가, 아래로 내젓는 궁무신의 신호에 따라 폭발했다.
길쭉한 빛의 기둥이 그대로 사위를 갈랐다.
이대로 눈이 멀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화려한 이펙트를 남기면서.
그리고 그 빛줄기는 여름여왕의 머리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검무신에게 작렬했다.
검무신은 궁그닐을 개방하느라 모든 의념을 그쪽에다 집중하고 있었던 까닭에 미처 빛의 기둥을 막을 새가 없었다.
아니, 애초 이쪽으로 날아올 거라고 예상도 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궁무신이 갑자기 돌변할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이 설사 여러 계략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검무신이라고 하더라도.
다행히 검무신은 감각적으로 몸을 최대한 틀어 낙일시에 완전히 노출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부 피할 수도 없었다. 왼팔이 그대로 허공으로 튀었다가 녹아 사라졌다. 쓰고 있던 사자 탈이 으스러지면서 경악과 치욕에 가득 찬 잘생긴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궁그닐에 집중되던 마력이 힘을 잃고 샅샅이 흩어졌다.
“궁무시이인!”
창무신이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뒤돌아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여태껏 가졌던 의문의 조각들이 창무신의 머릿속에서 하나둘씩 짜 맞춰졌다.
갑자기 도무신이 날뛰었던 이유. 도무신에게 리언트가 돌을 갖고 있다면서 언질을 주고, 아들의 눈과 손가락을 몰래 가져다 놓을 수 있었던 세작.
설마 그게 궁무신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조각이 맞춰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창무신의 시선이 여름여왕에게서 궁무신에게로 돌려진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빈틈을 크게 노출하고 말았다.
여름여왕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꼬리를 채찍처럼 거세게 휘둘렀다.
콰앙!
창무신의 몸뚱이가 너무나 가볍게 튕겨 났다. 늑골이 죄다 으스러지면서 내장도 크게 파열되었다. 입가로 핏물이 잔뜩 쏟아졌다.
여름여왕이 머리를 뒤로 크게 젖히면서 빠르게 원소의 힘을 잔뜩 응집시켰다.
용의 5단계 권능, 브레스.
의념만으로 특정 원소를 잔뜩 응집시키고, 이것을 가장 순수하고 파괴적인 형태인 숨결로 표현하는 힘이 그대로 창무신과 검무신을 휩쓸었다.
콰콰콰-
창무신은 어떻게든 마력을 쥐어짜 굴공참을 이용해서 브레스의 방향을 옆으로 돌리고, 가까스로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전신은 뜨거운 고열로 잔뜩 화상을 입고, 식도와 내장은 푹 익어 버렸다.
몸이 이대로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창무신은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무신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검무신은 어느새 울혈을 토해 내면서 제자리에 쓰러지고 있었다. 낙일시와 브레스, 거기다 궁그닐의 개방을 실패하면서 생긴 반발 작용까지.
마력 순환이 역류를 일으키면서 내상이 크게 도졌다. 아니, 오히려 폭주를 일으킬 조짐마저 보였다. 주화입마. 마력이 통제를 잃고 마구 날뛰었다.
사선검은 브레스를 겨우 막아 내는 것으로 모든 힘을 잃고 땅바닥에 추락했고, 정신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더 브레스가 작렬한다면 정말 모든 게 끝나 버릴 수가 있었다.
‘안 된다. 너만큼은……!’
창무신은 절대 그런 꼴을 볼 수가 없었다.
검무신은 청화도의 중심이며 왕이다. 그리고 좁은 우물 안에 갇혀 지내던 그를 넓은 세상으로 같이 데려와 준 은인이기도 했다.
또한, 둘도 없을 친구였다.
남들은 그를 잔혹하다느니 패도적이라느니 평가할지 몰라도. 창무신으로서는 도저히 눈앞에서 친구가 죽는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설사 자신이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창무신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뼈 마디마디가 박살 나고, 척추도 망가져서 움직일 수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지만. 아니,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창무신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달렸다. 쓰러지는 검무신을 가까스로 부축하면서 자리를 이탈하고자 했다.
검무신만 살 수 있다면.
그만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면.
청화도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과 검무신이 처음 외뿔부족을 벗어날 때에 다짐했던. 그때 함께 나눴던 꿈을 대신 이뤄 줄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창무신은 그렇게 믿었고, 거기에 자신의 남은 생명을 모두 던졌다.
“막아라! 어떻게든!”
창무신의 처절한 외침에. 청화도의 플레이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여름여왕에게로 달려들었다.
상대하고 있던 대상이 있더라도. 마력이 전부 소진되어 쓰러질 것 같더라도.
그들은 휘두르던 칼의 방향을 돌렸고, 여름여왕에게 스킬을 전개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불나방처럼 여름여왕에게 도전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어떻게든 창무신과 검무신이 이 자리를 탈출할 수 있도록 창무신의 마지막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감히. 미물들 따위가 감히!』
여름여왕은 이깟 놈들이 자신에게 칼을 들이댄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다시 한 번 더 브레스를 뿌렸다.
그녀로서는 돌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검무신과 창무신을 이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이번에 녀석들을 놓친다면 언제 다시 돌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 몰랐다.
콰콰콰콰-
수백 명에 달하는 플레이어들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랭커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아!』
여름여왕은 분노를 잔뜩 드러내면서 두 무신을 쫓으려 했지만. 계속된 불나방들의 훼방에 발이 묶여 도저히 진전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창무신은 검무신을 안은 채로 달리고 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