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부화 (1)
날뛰는 여름여왕과 그녀를 막으려는 청화도. 검무신을 뒤쫓는 레드 드래곤과 포탈을 열며 도망치려 하는 창무신.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린 싸움 속에서.
외인부대는 이대로 계속 판에 섞였다가는 정말 위험해지겠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갈 곳을 잃은 여름여왕의 분노가 막 다른 곳으로 번지려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잃은 용은 그 어떤 적보다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끝까지 남아 보상을 받으려는 몇몇 용병들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그 속에는.
판트와 에도라도 섞여 있었다.
* * *
“형님, 이래도 되는 거유?”
판트는 저 멀리 보이는 전장을 보면서 조금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일단 연우가 떠나자고 했으니 오긴 했는데.
이렇게 그냥 떠나려니 영 뭔가 찝찝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가 천둥벌거숭이처럼 앞뒤 생각지 않고 날뛰는 성격이라지만, 그래도 계약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특히 이런 일에는 ‘맹약 선언’ 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맹약 선언. 피차간에 계약 관계로 묶여 계약 내용을 불이행하게 되면 그만큼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마법 계약이었다.
다행히 연우 등은 맹약 선언에 묶여 있지 않았다. 연우가 가져온 정보가 워낙에 대단했던 데다가, 판트 남매가 무왕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수뇌 측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벼운 맹약은 이뤄진 상태였고, 그것을 빌미로 물고 늘어진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야. 오히려 레드 드래곤에서는 너희들이 이 정도쯤에서 빠진 걸 고마워할 테니까.”
판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우?”
“이번 기습에서 외뿔부족이 나타나지 않았잖아.”
“음?”
판트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연우는 더 이상 대답하기 귀찮은지 전장을 한 차례 보다가, 말없이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에도라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기습에서. 왜 우리 부족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야 포탈이 갑자기 열렸…… 음? 그러고 보니 그래도 그새 연락은 갔을 텐데?”
판트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자신들의 일족은 오히려 이런 자리를 더 좋아했으니까.
난장판에 개입해서 더 난장판으로 만드는 걸 아주 환장해하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무왕은 말할 것도 없었고.
게다가 청화도의 군영에서 쿠람까지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그들 간에 나눈 텔레포트 스크롤을 사용한다면 곧바로 지원을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외뿔부족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청화도가 반파(半破)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아버지는 더 이상 청화도와의 동맹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파기를 하셨을 거야. 어쩌면 레드 드래곤에서 따로 일족 쪽으로 사람을 보냈을 수도 있고.”
판트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개입을 하지 말라고?”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보다는 좀 더 부드럽게 말했겠지. 레드 드래곤도 우리 일족이 부담스러울 테니까. ‘달라지는 상황에 따라 올바른 판단을 하길 바란다’, 뭐 그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아버지 자존심 건드리면 전부 수포로 돌아가니까.”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레드 드래곤은 쿠람을 정복당하고 나서도, 외뿔부족에게는 따로 응징을 하지 않았을 만큼 그들을 신경 썼다.
그 오만하기로 유명하다는 레드 드래곤이 말이다.
그만큼 외뿔부족을 신경 쓰고 있었으니. 이번 습격도 벌어지기 전에 미리 손을 썼을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랬을 거라고 에도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드 드래곤도 우리가 알아서 빠져 주면 고마운 거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아니, 정확하게는 더 이상 일족과 연관되어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청화도와의 전쟁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를 수습하는 것도 한창 길게 이어질 게 분명할 테니, 그동안 외뿔부족과 엮일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피하려 할 것이다.
그들을 관리하던 바할도 죽어 버렸고.
에도라는 그런 말을 입 언저리까지 담았지만,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게다가.
혜안이 활짝 열린 그녀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난리를 부리는 여름여왕. 그녀의 왼쪽 목덜미 아래쪽에 박혀 있는 드래곤 하트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롭게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놈의 정치란 게 뭔지. 참 어렵다, 어려워.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냥 단순하게 살면 될 걸. 으휴.”
판트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에도라는 그런 오빠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정치란 것도 결국에는 딱 한 가지로 귀결되니까. 오빠가 만약 왕이 된다면. 그것만 지키면 될 거야.”
“응? 뭔데, 그게?”
판트는 그렇게 좋은 게 있냐는 듯한 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봤다.
에도라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단단해진 눈매는 이미 저만치 내려가고 있는 연우의 뒷모습을 좇고 있었다.
“힘.”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지.”
* * *
연우와 판트 남매는 옆으로 새지 않고 곧장 쿠람으로 돌아갔다. 외뿔부족은 이미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어. 왔냐, 아들 딸?”
무왕은 판트와 에도라를 보면서 시큰둥하게 손을 높이 들었다. 부족원들도 이쪽을 보면서 인사를 건넸다가,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두 사람 뒤에 멀뚱하게 서 있던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저는 인사 받아 주지 않으십니까?”
무왕은 팔짱을 끼면서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놈이 무슨 인사가 필요해? 사고, 잘 치고 왔냐?”
연우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
무왕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연우를 위아래로 가볍게 훑었다. 그러다 가만히 연우의 눈을 응시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뭐 그새 또 좋은 거 처먹은 거냐? 넌 어째 매번 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휙휙 달라져? 체격도 좀 달라진 것 같고. 냄새도 달라졌는데?”
판트는 ‘또?’라는 얼굴이 되었고, 에도라는 혜안으로 비치는 연우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이번에도 숨긴다고 최대한 숨겼는데. 용의 비늘도 감추고, 용의 기질도 최대한 갈무리해서 겉보기는 달라진 게 없게 만든다고 만들었건만.
역시나 무왕의 예리한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러던가. 그래도 좀 좋은 거 있으면 나눠 달라고. 혼자서 먹지 말고, 이것아.”
연우은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계속 쏟아지는 무왕의 타박이 영 낯설기만 했다.
사실 연우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무왕 앞에 있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부족을 떠나기 직전. 무왕이 곰방대로 그의 머리를 후려치면서 내뱉던 꾸중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했으니까.
조금, 아니, 많이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나쁜 감정은 아니었다.
헤노바나 피닉스를 만났을 때처럼. 자신이 돌아올 수 있는 곳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집’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것 같았다.
무왕은 더 이상 타박하지 않겠다는 듯, 이만 나가 보라며 손사래를 쳤다.
연우는 인사를 하면서 나오다가.
“그런데.”
잠깐 무왕이 부르는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칫거리며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하려던 일은. 잘 끝났냐?”
연우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무왕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질문은 어딘지 모르게 묘했다. 피닉스의 원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다른 뭔가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연우는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그래? 그럼 됐다.”
무왕은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자기 할 일에 다시 몰입했다.
연우는 그런 무왕을 빤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 * *
외뿔부족은 11층을 떠나 다시 마을이 있는 탑 외 지역으로 이동했다.
연우는 그들과 함께하면서 여러 가지 뒷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첫째는 그와 에도라가 짐작했던 것처럼 쿠람에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사절이 몇 번씩 다녀갔었다는 것.
내용도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레드 드래곤은 본격적으로 청화도를 칠 생각이니, 만약 전력 차이가 크다 싶으면 참전하는 데 다시 고민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청화도에서는 동맹 체재를 즉각 이행해 줄 것이며, 무왕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 검무신과 창무신이 위기에 잠겼으니 부디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무왕은 청화도의 사절이 있는 자리에서 딱 한 마디만 했다고 한다.
불가(不可).
자신들이 마을을 벗어난 것은 어디까지나 청화도가 외뿔부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자격을 지녔다고 판단을 했고, 왕족인 창무신이 뿔을 내놓겠다는 맹세를 했기에 나선 것일 뿐.
별반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퇴를 하고 만 청화도는 더 이상 부족의 동맹 집단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덧붙여, 검무신은 무왕의 제자였지만 이미 파문된 지 오래 된 자였고, 창무신은 더 이상 일족과 관련이 없는 부외자가 되었으니 도와줄 이유도, 의리도, 없다고 했다.
그런 무왕의 대답을 듣고,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붙이와 제자도 단칼에 쳐 내는 그의 단호함이 대단하기보다는 차갑게만 느껴졌으니까.
특히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 짓는 모습에서. 연우는 무왕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저것이 어쩌면 외뿔부족에 다시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왔다는 무왕의 진면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지금 당장은 무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지만, 만약 완전히 틀어졌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노라고.
그리고 여태 무왕과 대립각을 세울 수 뻔했던 때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참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왕이 그를 많이 배려해 줬다는 사실도.
그리고.
‘이제는 그런 배려를 더 이상 바랄 수 없겠지.’
무왕은 만약 일족을 이끄는 데 있어 연우가 방해가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내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청화도의 잠적과 레드 드래곤의 추격이었다.
창무신과 검무신은 다행히 전장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심한 중상을 입은 만큼, 레드 드래곤에서는 추격조를 편성해서 뒤를 쫓기 시작했다.
몇몇 전투 부대와 하이 랭커들은 아예 청화도의 본단이 위치한 ‘섬’을 공습하기도 했다.
‘돌 때문이야. 청화도를 샅샅이 뒤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찾고 싶겠지. 뒤져 봐야 아무것도 안 나오겠지만.’
한동안 레드 드래곤은 없는 돌을 찾느라 허튼 시간을 소비하며 진땀을 빼야 할 게 분명했다.
그사이. 창무신과 검무신은 아예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정말 탑에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샅샅이 뒤졌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만큼 종적이 묘연했다.
전장에서 겨우 살아남은 청화도의 잔당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각자 알 수 없는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몇몇은 청화도의 후신을 자처하면서 부흥을 꿈꾸기도 했지만, 곧 찾아온 레드 드래곤에 의해 번번이 박살이 나고 말았다. 청화도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은 이제 금기어로 통할 정도였다.
때문에.
대부분은 다른 클랜들로 흩어졌다. 정말 충성심이 깊었던 이들은 두 무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은거를 선택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그들이 숨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악착같이 쫓아서 두 무신의 행방을 묻고, 모른다면 바로 죽였다.
잔당들에 대한 주살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결국.
이것들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
청화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8대 클랜을 형성하고 있던 한 축이 갑작스레 무너지면서, 탑 내에는 곳곳에서 지각 변동이 일어나려는 조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거대 클랜들은 청화도가 누리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손길을 뻗쳤다. 여러 중소 클랜들은 새로운 청화도가 되어 보고자 날갯짓을 시작했다.
이번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충돌은 앞으로 닥칠 큰 혼란의 서두에 불과했던 셈이었다.
그리고.
연우는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빠르게 변하는 탑의 세계를 바라보며 다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할 건 많아. 용체에 재적응해야 하기도 하고. 새롭게 얻은 용의 권능을 다시 정리할 필요도 있어.’
이번에 바할과 싸우면서 깨달은 점은 확실히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었다.
용체가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아직도 크게 감이 잡히질 않았으니까. 그걸 바로잡아야만 했고, 권능의 사용도 익숙해져야 했다. 빨리 하나하나씩 깨우칠 필요가 있었다.
그 외에도 할 건 많았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환수의 알. 어비스 터틀이 남긴 퀘스트. 리언트, 바할의 심문. 돌에 대한 조사. 팔극권 단련.
그리고 미뤄 둔 층계 공략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전부 하나같이 허투루 다룰 것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우는 무왕이 다시 내어 준 식객의 별관에서, 우선순위 들을 차례대로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얼추 순서가 정해졌다.
‘먼저, 알을 깨우는 것부터.’
하지만 알을 깨우려면 외뿔부족이 가진 달의 씨앗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건 이미 무왕의 퀘스트를 거절하면서 사라진 상태.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4대 신수의 가호.’
연우는 손을 활짝 펼쳤다.
화악-
손바닥 위로 성화, 허무, 심연, 백토. 네 개의 서로 다른 기운이 자유롭게 얽혔다. 신수들의 힘을 가공한 결정체였다.
이것이라면.
처음 생각했던 대로. 알을 충분히 깨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