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부화 (2)
연우는 판트, 에도라와 함께 마을 중심가 쪽에 위치한 장로원으로 향했다.
아직 알은 장로원에서 관리를 하는 중이었다.
들어 보니 대장로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장로들이 알에서 떨어지질 않는다던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로원이 있는 마당에 발을 들였는데.
“……으음?”
“영감님들, 왜 이러신대?”
“그, 글쎄.”
연우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판트와 에도라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장로들은 전부 이마에 시뻘건 두건을 두르고, 다 같이 손을 잡고 나란히 마당에 누워 있었다.
“갖고 가지 마라, 알!”
“새로운 신수가 태어날지 모른다.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니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
“그래그래. 아직은 너무 이르다고! 11층 시련도 마쳤다면서! 조금 더 조사를 할 수 있게 해 줘!”
“아니. 그보다 달의 씨앗도 없잖아! 어떻게 깨우려고!”
“그래도 깨우겠다면! 우리를! 우리를 밟고 지나가라아!”
“…….”
가면을 쓰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연우는 황당해하고 있었다.
‘어제 부탁을 거절한 것 때문인가?’
어젯밤에 연우는 장로원에다 미리 알을 되찾으러 가겠다는 말을 전해 뒀었다. 곧 부화를 시킬 거란 말도 함께.
여기에 장로원에서는 슬쩍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안 되겠냐는 부탁을 했다.
특히 평소에는 말이 없던 대장로까지 직접 나서서. 최근에 밝혀 낸 몇 가지 사실이 있으니 그것만 추가적으로 확인하고 부화를 시키면 안 되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연우로서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11층의 시련도 끝난 지 오래. 굳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잠만 자는 녀석을 깨우지 않고, 그냥 외뿔부족에다 맡겨 두는 게 편했다.
하지만 최근에 연우는 알에게서 연결 고리를 통해 여러 가지 사념을 받고 있었다.
이만 깨어나고 싶어 하는 사념.
아니, 정확하게는.
‘내게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연결 고리를 통해 의사소통을 나누는 게 아니라, 그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한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여태껏 깊은 잠을 자다가 이따금 배가 고플 때만 깨어나 칭얼거리던 걸 생각해 본다면, 정말 큰 변화였다.
갑자기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확 자란 느낌. 뭔가가 내면에서 큰 변화를 맞은 것 같았다.
대체 언제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을까.
‘환룡의 내단을 되찾았을 때부터.’
연우는 문득 떠오른 사실을 되짚어보다가, 다시 장로들을 바라봤다.
장로들은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로 요지부동이었다.
확실히 그동안 알을 연구하는 건, 장로들의 호기심을 달래기에 아주 좋았을 것이다.
듣기로는 여러 고전을 뒤지고 갖가지 실험을 하면서, 환수의 알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신비한 사실도 여럿 알아낸 것 같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연우가 갖고 있던 알은 단순한 환수의 알이 아닌, 신수의 알이라는 것.
그러니 무공이나 개량하면서 심심함을 달래야 했던 장로들로서는. 재미난 소일거리를 빼앗긴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겠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반대로 정신은 어려진다더니. 딱 그런 모습이었다.
정말 이대로 뒀다가는 전부 일어날 때까지 한세월일 것 같았다. 연우는 가만히 서서 이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에도라는 슬쩍 그런 연우의 눈치를 보면서 장로들을 타이르려 했다.
그런데.
『주인. 얘들 날려 버릴까?』
연우의 사념을 읽은 짹짹이가 나타나서 어깨 위에 올라탔다. 연우가 용체 각성을 이룬 뒤에 녀석도 영향을 받아 크기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오오! 저건 난조가 아닌가?”
“피닉스의 새끼가 샤벨 타이거의 영혼을 흡수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신수가 성장을 하면 저런 형태를 띠는군. 그런데 확실히 주인의 성향 때문인지, 기록된 것과는 생김새가 많이 달라.”
“검은색 줄무늬라. 이런 건 따로 기록을 해 둬야겠어. 추후에 계속 성장하는 데 어떤 변화를 보일지에 대한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이 방면에서는…….”
장로들은 짹짹이를 발견하자마자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면서 우르르 몰려들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열망으로 눈이 반짝였다.
『얘들 이상해…… 날려 버리면 안 돼?』
짹짹이는 흠칫 놀라면서 지레 겁을 먹었다.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날려.”
『응! 알았어!』
짹짹이는 잘되었다 싶었는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오!’ 감탄사를 터뜨리던 장로들은 곧 불어닥치는 강풍에 휩쓸려 가을철 마당에 나뒹구는 낙엽 꼴이 되어야만 했다.
『흥! 까불고 있어!』
연우는 짹짹이의 귀여운 거드름을 듣고 피식 웃으면서 마당을 가로질렀다. 판트와 에도라는 뒤를 따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도라는 여전히 부끄러운지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곧장 걸어간 연우가 알이 보관 된 별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안에는 대장로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종이에다 뭔가를 기록하다 말고, 고개를 슬쩍 뒤로 돌렸다.
“왔나? 장로들이 꽤 많이 시끄럽게 굴었나 보군.”
장로들은 문가에 서서 원통하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만, 안쪽에는 대장로가 예리하게 눈을 뜬 채로 노려보고 있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중이었다.
무왕을 제외하면 대장로가 부족 내에서 최고 실세라더니. 아니, 무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족원들이 그를 무서워한다더니. 확실히 소문이 맞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내가 따로 한 소리 하도록 하지.”
“괜찮습니다.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니었으니. 그보다, 이 녀석입니까?”
연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대장로 옆에 놓인 알을 바라봤다.
알은 이전에 봤을 때보다도 더 커져 있었다. 4미터 남짓한 높이에 크기도 거기에 맞게 훨씬 넓어져 한쪽 벽을 거의 다 채우다시피 하는 수준이었다.
표면에 그려진 무늬도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
마치 악어가죽 무늬처럼 청록색과 검은색이 뒤죽박죽 섞인 것 같지만, 묘하게 일정한 흐름을 갖고 있었다.
‘수박 같다고 하면 화내려나.’
연우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대장로에게 물었다.
“이놈을 깨우면, 덩치는 얼마만큼 클까요?”
“글쎄. 알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몸체의 두께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길이만 따져도 5미터는 훌쩍 넘겠지.”
“그럼 밖에 나가서 깨워야겠군요.”
“그래 주면 고맙지. 저 못난 친구들도 구경 좀 할 수 있을 테고.”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림자가 길게 쭉 늘어나면서 알을 돌돌 말아 허공에다 띄웠다.
“호오?”
대장로는 이전에 봤던 사령이 아닌 괴이의 등장에 살짝 눈을 반짝였다.
언데드의 기운을 풍기면서 보통 평범한 언데드와는 느낌이 많이 달라 확인해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연우는 알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장로들이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대장로와 가볍게 대화를 나눴다.
“자네가 없는 동안, 알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봤다네. 일단 신수인 건 확실한 것 같아. 개체가 가진 힘도 대단하고, 맷집도 단단하더군. 잠재 능력도 고른 편이고. 특히 항마력 부분이 아주 높았어.”
연우의 눈이 반짝였다.
항마력이라면, 대외 마법 저항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갖가지 마법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니 확실한 장점이었다. 다만, 반대로 이야기하면 버프나 치료 계통의 마법 역시 잘 먹히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었다.
다만, 맷집이 뛰어나고 힘이 좋다면, 물리적인 능력으로 단점을 커버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도저히 속성도 그렇고, 생김새를 파악할 수가 없어. 뭔가 단단한 거체가 들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은 알아낼 수가 없다네. 뭔가 확인하려 할 때마다 항마력 때문에 튕겨 나기 일쑤이니.”
대장로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여태 알려진 신수는 네 마리가 전부. 그들은 모두 특정 속성을 띠고 있었고, 지배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권능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알에 담긴 신수가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도무지 말이 되질 않았다.
“사실 장로들이 아직까지 부화를 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세. 부화가 다 된 것 같아도 그런 게 아니라면. 강제로 깨우는 꼴이 된다면 정말 큰일이니까 말일세.”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던 장로들이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연우가 도중에 생각을 바꿔 주길 바라는 눈빛이었지만.
“깨어날 때가 된 건 맞습니다. 녀석이 이제 슬슬 나오고 싶다고 칭얼거리고 있으니까요.”
연우는 그들의 기대를 단칼에 잘라 버렸다.
장로들은 더 이상 연우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을 느꼈다. 대장로는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주인이 그런 것이라면 그런 것이겠지. 그런데 깨우기는 어떻게 깨울 생각인가? 사실 달의 씨앗은 없지 않은가.”
“생각한 방법이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상관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받게.”
대장로가 주머니를 뒤지다가 갑자기 뭔가를 꺼내 휙 던졌다. 연우는 얼결에 그걸 받았다가 살짝 놀랐다.
[서든 퀘스트(참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보상으로 외뿔부족과의 친밀도가 150만큼 상승했습니다. 외뿔 부족으로부터 같은 부족원이라고 해도 될 만큼 깊은 신뢰를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달의 씨앗’을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신수결초’를 획득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대장로나 무왕에게 요구하십시오.]
[달의 씨앗]
분류: 잡화
등급: A++
설명: 오랜 시간에 걸쳐 동굴 속에서 달빛의 정기를 받아 자란 성련(聖蓮)의 씨앗. 특정한 방식으로 가공한 후에 삼킬 경우 뛰어난 영약이 된다.
“이건?”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분명히 외뿔부족에게서 이탈해 레드 드래곤 측에서 참전을 했었는데?
“판트와 에도라도 같은 일족이니까.”
“예?”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반문을 했다.
대장로가 재미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두 사람도 외뿔부족원이지 않나. 그것도 왕족. 그들과 함께했으니, 사실 퀘스트를 실패한 건 아닌 셈이지.”
연우는 그제야 말뜻을 알아채고 쓰게 웃었다. 시스템의 맹점을 이용한 것이다.
사실 퀘스트는 결과가 애매한 경우, 내어 준 사람이 판단하기에 따라 성공 유무가 가려지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냥 여태 판트와 에도라를 잘 돌봐 준 선물이라고 해 둠세. 내 권한으로 한 뿌리쯤은 쉽게 가져 올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물론, 족장이 알면 자기도 달라고 땡깡을 부릴 게 뻔하니 비밀로 해 두고.”
대장로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슬쩍 다른 장로들을 노려봤다. 말하면 각오하라는 듯이.
장로들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가 곧 합죽이가 되었다.
“뭐, 개인적으로, 학자로서 신수가 어떻게 부화하는지 과정이 궁금하기도 하고 말일세.”
“감사합니다.”
연우가 정말 고마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면서도 추가 보상으로 주어진 신수결초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름만 봐서는 환수나 신수에게 아주 좋은 영약인 것처럼 보였다.
대장로는 다시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안경 아래 비치는 두 눈은 이지적으로 빛나면서 뒤에 벌어질 일을 아주 궁금해하고 있었다.
* * *
짹!
『나! 친구 빨리 보고 싶어!』
연우는 재촉해 대는 짹짹이의 턱 밑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다.
곧 부화를 시작할 거란 소문이 퍼졌던 건지, 어느새 장로원 주변은 부족원들로 가득 차 들썩이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연우의 알은 부족 내 최고 관심사였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알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몇몇은 뭐가 태어날지에 대해서 가볍게 내기를 하기도 했다.
무왕도 어느새 나타나 팔짱을 끼면서 어서 시작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연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돌려 알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부터. 녀석에게서 전해지는 사념은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생각과 감정이 구체화되어 고스란히 전해졌다.
덕분에.
연우는 녀석이 누군지 어렴풋하게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그동안 부화를 미뤄 왔는지도.
단순히 연우의 꿈을 먹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그동안 ‘때’가 되지 않아서였다. 부활을 할 때가.
그랬다.
녀석은 ‘부화’가 아니라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주 긴 시간을 지나서. 언젠가 사라졌던 조각이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연우가 찾아와 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조각은.
‘환룡의 내단.’
연우의 오른손에 있었다.
연우는 달의 씨앗을 손에 꽉 쥐었다. 그 속에다 4대 신수의 힘을 불어넣었다.
성화의 불씨가 가장 먼저 깃들고, 그 위로 허무와 심연의 기운이 덧칠되었다. 마지막으로 백토로 주변을 갈무리해 씨앗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손을 활짝 펼치자, 희뿌연 결정체로 변한 달의 씨앗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연우는 이번에 왼손을 펼쳤다. 손바닥 위로 금색 기운이 거미줄처럼 얽히더니 둥근 구슬의 형태를 떴다.
환룡의 내단. 비록 리언트가 궁그닐을 개방하느라 태반이 날아갔지만, 그래도 다행히 핵은 남아 있었다.
내단도 같이 허공에 떠올라 달의 씨앗과 부딪쳤다. 새하얀 서광과 찬란한 금광이 뒤섞이면서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 이상한 결정체가 되었다.
팟!
결정체가 고스란히 환수의 알에 스며들었다. 알이 기다렸다는 듯이 크게 부르르 떨렸다. 표면 위로 빛무리가 반짝였다.
그리고.
쩌걱.
쩌거걱-
껍질을 따라 조금씩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금이 서로 연결되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히다가, 곧 커다란 균열이 되어 하나둘씩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가장 위쪽에서 거칠게 튀어나오는 머리 하나.
거친 주황색 돌기와 비늘.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
그건 전장에서 봤던 여름여왕의 본체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많이 달랐다. 허무룡의 생김새와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지구에서 흔히 벽화로 많이 보던 동방의 용을 닮은 모습.
“……환룡?”
그 모습을 본 에도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고, 외뿔부족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어수선해진 상황 속에서도.
연우는 녀석의 황금색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이 격랑처럼 일렁였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가 다시 불러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