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부화 (3)
쩌거거걱!
부화는 계속 진행되었다. 마치 타일 조각이 떨어지듯이 껍질이 하나둘씩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드문드문 안쪽에 들어 있던 짙은 주황색 비늘과 돌기가 보였다.
그러다가 녀석이 크게 몸을 뒤틀면서 알을 완전히 깨뜨렸다. 몸을 크게 일으키면서 밖으로 튀어 나왔다.
쾅!
크오오-
녀석은 뱀처럼 길쭉한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슴을 닮은 듯한 뿔에 파충류의 눈을 하고서, 길게 몸을 내빼며 허공을 그대로 미끄러져 연우의 주변을 따라 크게 똬리를 틀었다.
녀석이 비늘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러자 몸을 축 누르던 습기가 단번에 증발하면서 갓 부화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빛무리가 가시면서 화려하게 빛나던 비늘의 색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딘지 모르게 검붉은색도 드문드문 떴다.
드래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환수 중에서도 최상위종이며, 차라리 신수에 가깝다는 환룡을 많이 닮은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면 또 말로만 듣던 환룡과도 생김새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에도라와 판트는 어딘지 모르게 연우의 환수가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도라, 저거…….”
“어. 맞아. 아카샤의 뱀도 닮았어.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두 남매가 튜토리얼 스테이지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 잡았던 아카샤의 뱀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어쩌면 주인의 꿈을 먹고 태어난다는 환수의 특성상, 연우의 뇌리 속에 깊이 남아 있었던 아카샤 뱀의 형체를 빌린 건지도 몰랐다.
게다가 녀석에게서는 환룡에게서 풍긴다는 신성하고 고귀한 느낌보다, 묵직하고 날카로운 느낌이 강했다.
‘마기(魔氣).’
사실 마기는 사기나 귀기, 독기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후자의 세 기운은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파생시킬 수 있었지만, 마기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힘에 해당했다.
98층에 머무는 악마들이 부린다는 힘.
마기는 성질을 타락시키고 포악하게 만든다는 특성이 있지만, 반대로 그만큼 맹렬한 특징이 있어 공격적이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 중에는 극한의 마기를 추구하는 자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8대 클랜의 마군이었다.
그런 마기를 품고 있는 신수 급의 환수라. 이런 건 마수라고 하는 게 옳았다.
외뿔부족원들 중 어느 누구도 11층에서 이런 마수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 풍기는 힘은 대단한데도.
아직은 갓 알에서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한 느낌도 있었지만. 잠재력이 무척 뛰어나 언제든지 화려하게 꽃을 피울 수 있었다.
특히 4대 신수의 정기가 모두 깃들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전혀 어우러질 수 없는 4종의 힘이 마기 아래에 철저하게 통제되어 부드럽게 순환하고 있었으니까.
600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지만, 그때는 그래도 신수들의 시험을 통과한 자가 해낸 결과였을 뿐.
지금은 신수들의 근원을 합쳐 놓은 형태였으니. 업적의 정도만 따진다면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가 없었다.
탑이 생긴 이후로,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이적이었다.
장로들은 자신들의 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바로 눈앞에서 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혹여 뭔가 하나라도 놓칠까 싶어서 눈에 불을 켜며 마수를 꼼꼼하게 살폈다.
몇몇은 바쁘게 무서고 쪽으로 뛰어가 비슷한 성질을 가진 종이 있는지 사례를 찾으려 했다.
“환룡과는 정반대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으니. 마룡(魔龍)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려나.”
대장로는 마룡과 대화를 나누는 연우를 보면서 안경을 고쳐 썼다.
주변에 마력으로 방어막을 둘러쳐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애틋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리고.
무왕의 눈빛은 왠지 모르게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연우는 마룡이 깨어나자마자 곧바로 주변에다 마력을 둘러쳤다.
예전이라면 랭커 급 인사들이 어렵지 않게 파장을 읽어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겠지만, 각성을 이뤄 용의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결계에 가까운 방어막을 구축하는 게 가능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과의 대화 내용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니, 정확하게는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
처음에는 ‘설마’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분명 환룡은 죽어야만 했으니까.
환룡은 신수에 가까운 최상위 환수답게 뛰어난 힘을 지녔다.
모든 속성을 먹어 치울 수 있었고, 흡수한 속성으로 자유롭게 변환해서 그것을 이용해 다양한 공격기를 부릴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도 보유했다.
동생이 처음 환룡을 깨웠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탑이 떠들썩해졌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또한, 계약자를 물색하던 고룡 칼라투스의 눈에 동생이 처음으로 들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환룡은 그런 뛰어난 힘만큼, 사실 여러 가지 제약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자신을 깨운 주인의 분신이라는 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의식 속에 여러 개의 인격을 갖고 태어난다. 환룡은 그중 하나가 빚어 나와 용의 형상을 갖추게 된 형태였다.
그렇기에 때에 따라서 얼마든지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었고, 주인의 성향을 많이 따르는 편이었다. 때로는 주인의 잠재력에 갇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분신이다 보니 본체가 사라지면 같이 스러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래서 연우는 당연히 동생의 환룡도 어딘가에서 눈을 감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리언트가 내단을 갖고 있었기에 더더욱 확신을 가졌다.
알에서 환룡의 느낌이 강렬하게 풍기기 시작했을 때에도, 비슷한 기질을 지녔거나 같은 종이라도 전혀 다른 개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이 알을 깨고 일어났을 때.
연우는 여태 했던 생각을 도로 접어야만 했다.
비록 현재 갖고 있는 모습은 일기장 속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달랐지만, 풍기는 느낌은 똑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깊은 곳에서. 육체를 버리고, 깊은 어둠에 잠겨, 그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마룡의 눈동자는 짙은 애수에 잠겨 있었다. 슬픔과 원망, 그리고 반가움이 뒤섞인 눈.
『그대는 나더러 떠나라고 했었지만. 연결을 끊으면서까지, 내가 그대와 분리되어도 살 수 있도록 했지만, 그래도 나는 믿고 있었다. 그대가 돌아올 것이라고. 다행히. 그 믿음은 저버려지지 않은 것 같구나. 다행이야.』
연우는 마룡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짐작하기는 했지만. 녀석이 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을 통해 동생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보아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예전이었다면 시끄러울 정도로 방방 뛰었을 텐데, 지금은 왜 이렇게 과묵해졌지?』
“…….”
『하긴. 그런 일들을 겪고 나면 성격이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으려나…… 그런데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기질이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마룡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연우를 위아래로 수없이 살폈다.
『때문에 내 새로운 육체도 이전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무튼 무슨 말이라도 해 보아라. 답답하지 않은가.』
연우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어둠 속에서 깊은 잠에 들며 동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을 녀석.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있어 부푼 마음을 안고 깨어난 녀석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미안하다.”
『음?』
“나는 네가 찾던 사람이 아냐.”
『그게 무슨……?』
마룡의 눈이 커졌다.
연우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주변에 뿌렸던 마력을 거뒀다. 그리고 무왕을 보며 말했다.
“스승님. 이 아이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무왕은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룡에게 달라붙어 이것저것 조사할 기대에 부풀어 있던 장로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연우는 장로들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하고, 순보를 밟아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짹짹이가 같이 가자며 바로 뒤따랐다.
마룡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인상을 굳히면서 몸을 꿈틀거리며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바다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룡이 연우를 쫓아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외진 숲이었다.
연우는 감각 영역을 넓게 퍼뜨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주변에서 가장 높은 나무의 끄트머리에 섰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네가, 네가 아니라니?』
연우는 대답 대신에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사실 마장철면에 부여된 인식 방해 마법이 마룡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룡은 연우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과 똑같은 얼굴. 비록 예전에는 밝았던 데에 비해 지금은 풍기는 느낌이 많이 차가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전에 그가 겪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마룡은 연우를 꼼꼼하게 살피다 서서히 갸웃거렸던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의문이 맺혔던 눈동자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그러다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마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악다문 입술 사이로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하울링이 퍼져 나갔다.
『너는. 누구지?』
연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연우.”
『연…… 우?』
마룡은 미간을 좁혔다. 뭔가 떠오를 것처럼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그러다 곧 이어지는 연우의 말에 눈을 크게 떠야만 했다.
“정우의 형이다.”
『……!』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마룡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정우와 나는 쌍둥이 형제야. 얼굴이 똑같은 건 그 때문이고. 여기에 오게 된 건…… 정우를 해친 녀석들을 잡기 위해서다.”
연우는 그동안 동생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 날 동안 있었던 오해부터. 탑에 들어오면서 겪게 된 일들까지, 전부.
그리고 마룡은 연우와의 연결 고리를 통해 연우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기억들을 모두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
『…….』
마룡은 깊은 침묵에 잠겼다. 충격이 너무 큰 듯, 요동치는 눈동자가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겠지.
연우는 마룡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켰다.
* * *
『……그럼, 그대가 여기에 온 건. 그때의 그놈들을 모두 치워 버리기 위해서라는 건가?』
마룡이 다시 입을 연 건,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이 지난 뒤였다.
많은 생각이 있었던 듯, 두 눈은 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환룡을 상징하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광기마저 어려 있었다.
너와 같이 서서, 주인을 그런 꼴로 만든 놈들을 씹어 삼키고 말겠다는 광기.
“일단은.”
『일단?』
마룡은 연우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이빨을 훤히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렸다. 당장이라도 공격을 할 것처럼 보였다.
“가능하다면 탑까지 부술 생각이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분이 풀릴 테니까.”
『뭐? 하핫! 하하하핫!』
마룡은 뭐가 그리 재미난지 껄껄 웃어 댔다.
눈동자에서 광기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대신에 광소가 퍼져 나왔다. 마기가 들썩이면서 대기를 진동시켰다.
녀석이 가진 힘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대는 정녕 미쳤구나. 하긴. 그만큼 미쳐 있어야 함께할 만하겠지. 확실해. 그대와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룡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새로운 주인. 나는 그대를 따르고 싶다. 나를 받아 줄 수 있겠는가?』
“물론.”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룡과 함께한 후, 동생은 누구보다 빠르게 강해졌다. 비록 그로 인해 많은 이들로부터, 심지어 동료들에게도 질투를 사고 말았다지만. 그래도 환룡이 가진 힘은 진짜였다.
그리고 마룡으로 부활한 녀석은 그때의 능력에 더해 4대 신수의 가능성도 같이 가지고 태어났다.
아직은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육체가 성체가 되질 않아 잠재력으로만 남아 있다지만. 그 정도 제약쯤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치울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이 함께한다면. 그리고 짹짹이가 옆에 있다면. 샤논과 부, 앞으로도 더 크게 성장할 여러 괴이들이 따른다면.
언젠가 모든 복수를 마칠 수 있었다.
느리지만, 아주 조금씩. 전력은 차분하게 갖춰지고 있었다.
『그럼. 나에게 새로운 이름을 다오.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하니. 그대에게 귀속되려면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연우는 짧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 * *
마룡과 대화를 마친 연우는 금세 돌아왔다.
“마룡은요?”
“일단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쉬고 싶다고 들어와서 쉬고 있어.”
연우는 심장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은 묵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짹짹이와 마찬가지로, 돌 속에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짹짹이는 드디어 친구가 깨어나서 같이 놀 수 있다면서 즐거워했다.
“에도라.”
“네?”
“혹시 내 작명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나?”
“…….”
에도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 슨 일, 있으셨어요?”
“이름을 지어 줬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계약을 거부하던데. 그래도 떠날 건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그럼 계약을 수긍하겠다고 했어.”
에도라는 난감하다는 듯이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왠지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불에 보듯 훤했다.
“뭐라고 지으려고 하셨는데요?”
“크르릉.”
“…….”
에도라는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