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부화 (4)
“크와앙! 크와앙은 어떨까?”
“아니지. 아까 그 멋진 모습 못 봤어? 그런 모습에는 커형이지. 커헝! 아니면 크엉이나.”
“난 으르릉, 추천!”
언제부턴가 외뿔부족의 마을은 시장 바닥처럼 어수선해져 있었다.
연우가 탄생시킨 마룡이 화두에 오르면서부터였다.
연우가 지어 줬던 이름이 대차게 까였다는 사실이 전해진 뒤. 마을 사람들 사이에 마룡의 이름을 지어 주는 게 놀이가 된 덕분이었다.
“쯧쯧. 이것들이 하루 종일 쌈박질만 해 대더니 센스라고는 죄다 똥통에다 집어넣었구만.”
“으잉? 그렇게 말하는 너는? 좋은 센스가 있냐?”
“당연하지!”
“뭔데?”
“나비!”
“…….”
“자고로 이런 이름은 딱 눈에 들어오는 게 좋…… 야! 무시하지 마!”
부족원들은 좀처럼 의견을 규합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이름 짓는 건 너무 어려워. 나도 11층에서 환수 깨우고 난 뒤에 이름 제대로 못 지어 줘서 고생했는데.”
“그래도 마룡이! 환룡도 아니고, 난생처음 보는 존재가 태어났는데! 뭔가 그럴싸한 걸 지어 줘야지!”
마룡이란 존재는 오랜 세월을 이어 온 외뿔부족에서도 처음 보는 형태의 환수였다.
신수 급에 해당하면서 마수의 힘을 같이 풍기는 오묘한 존재.
튜토리얼에서 아카샤의 뱀과 부딪쳐 본 적이 있던 몇몇은 아카샤 뱀을 떠올리기도 했다. 풍기는 느낌은 그보다 훨씬 격이 높았지만.
그렇다 보니 외뿔부족은 기록상으로 남을 최초의 마룡에게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골머리를 쥐어 싸맸지만.
사실 외뿔부족은 하나같이 강해지는 것과 싸움에만 관심이 가득할 뿐. 다른 일에는 전혀 무관심한 족속들이었다.
“끄응.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크르릉이 좋은데 말이지.”
“어라?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나? 확실히 하나같이 그것만 못해.”
“다들 같은 생각이군.”
“이렇게 된 거 다시 카인에게 그 이름을 권고해 보라고 할까?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은 나올 수가 없어.”
에도라는 웅성대는 소리를 듣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렇게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바보들이 여태 탑에서 최강의 일족이니 뭐니 하면서 불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는 하루였다.
* * *
결국 마룡의 이름은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기로 결정했다.
후보군을 잔뜩 뽑아서 하나씩 불러 댈 때마다 마룡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한숨뿐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정말 이런 걸 좋다고 내놓는군. 하아! 더 생각해 봐라. 주인, 내가 널 ‘응애’나 ‘차 놈’이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떻겠나? 그런 것과 같은 거라고. 더 고민하고 불러!』
마룡은 이제 짜증을 낼 기력도 없다는 듯이 투덜거리고, 돌 속에서 깊은 잠에 들었다.
부화를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럴까.
마룡은 자신에게 주어진 4대 신수의 힘과 환룡의 기운을 모두 소화할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니 작업이 마무리되는 동안, 연우더러 좋은 이름을 지어 두란 뜻이었다.
결국 연우는 한참 동안 골머리를 쥐어 싸매다가, 작명을 반쯤 포기하고 말았다.
당장 이것저것을 떠올려 봤자 또 대차게 까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천천히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환룡 때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 줄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건 정작 본인이 거절했으니.
애완동물을 키워 본 적도 없던 연우로서는 어렵기만 한 숙제였다. 사실 의사소통이 가능한 환수를 애완동물처럼 여길 수도 없었지만.
그래서 연우는 정리해야 할 것 중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어비스 터틀의 후임을 찾을 것.’
연우는 퀘스트 목록에서 어비스 터틀이 남겼던 히든 퀘스트를 떠올렸다.
[히든 퀘스트 / 어비스 터틀의 시험]
내용: 어비스 터틀은 피닉스와 허무룡의 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당신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이어서 시험을 내리고자 합니다.
어비스 터틀은 복수보다 자신들을 대신해 북쪽을 도맡아 줄 후임자를 찾고자 합니다. 어비스 터틀의 후임이 될 만한 자격을 가진 환수를 찾아 신수로 각성시키세요.
보상:
1. 머리 거북이의 등껍질 조각
2. 꼬리 뱀의 허물
3. ???
자웅동체였던 어비스 터틀은 피닉스처럼 후손을 남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를 만들어 달라는 퀘스트를 남겼다.
하지만 사실 이건 난이도만 따지자면, 30층대나 40층대의 시련과 비교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신수 만들기가 그렇게 쉬웠다면. 이미 아무나 다 그만한 신수를 만들었었겠지.’
신수는 10층대를 비롯해서 탑의 세계를 상징하던 존재였다. 그만한 존재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물론, 퀘스트의 내용이 어비스 터틀에 가깝게 만들라는 건 아니었다. 그만한 자격을 보유한 녀석을 찾아서 자리에 앉히면 된다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난이도가 비슷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도 있었다. 짹짹이와 마룡이 있긴 하니까.
하지만.
‘떨어지라고 하면 당장 나부터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아니, 애초에 내가 그럴 생각도 없긴 하지만.’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
‘강제로 만드는 수밖에.’
다행히 방법은 있었다. 그리고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 사실을 털어놓자, 에도라와 판트가 흔쾌히 돕겠다면서 나선 것이다.
“오라버니의 말씀은, 곧 태어날 저희의 환수를 신수로 만들자는 뜻이죠?”
“맞아. 너희들의 꿈을 먹고 자라날 환수라면 그만큼 잠재력도 풍부할 테고. 여기에 신수의 힘을 조금씩 나눠 준다면 충분히 자격을 갖출 수 있을 테니까.”
연우는 마룡에게 부여했던 것처럼 이미 하나로 융합된 신수의 힘을 나눠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덤으로 심연의 구슬과 신수결초도 같이 넘긴다면.’
[심연의 구슬]
분류: 잡화
등급: A+
설명: 허무룡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탄생시킨 구슬. 허무와 심연에서 퍼 올린 정수를 한데 집약시켰다. 가공 시, 어둠 계통의 속성을 다루는 플레이어에게는 뛰어난 아뮬렛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수결초]
분류: 영약
등급: A
설명: 외뿔부족의 대장로가 오랜 연구 끝에 탄생시킨 약초. 이걸 먹고 자라는 환수는 몇 단계 이상으로 진화할 잠재력을 얻게 된다고 한다.
심연의 구슬은 허무룡의 퀘스트를 수행한 뒤에 얻은 보상이었고, 신수결초는 얼마 전에 대장로가 달의 씨앗과 함께 넘긴 보상이었다.
둘 모두 뛰어난 재료들이었다.
심연의 구슬은 아티팩트의 재료로 훌륭했고, 신수결초는 짹짹이와 마룡을 더 크게 성장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두 가지를 모두 아낌없이 내놓기로 결심했다.
이미 4대 신수의 힘을 모두 흡수한 이상, 심연의 구슬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다른 보상인 허무룡의 역린으로 보호구를 만드는 게 좋았다.
신수결초도 마찬가지. 아직 짹짹이와 마룡 모두 자신들이 가진 힘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마당에, 더 많은 영약을 주게 되면 도리어 탈이 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단순히 어비스 터틀의 후임이 아니라, 다른 4대 신수들의 후임까지 될 수 있다면. 그때 주어지는 공적치나 보상은 어떨까?’
11층을 지키던 네 신수가 모두 스러진 이때. 그리고 뛰어나다는 다른 환수들도 거의 전멸한 이 상황에.
죽은 신수들이 부활을 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동안 11층의 생태계는 엉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신수들은 11층을 지탱하는 기둥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연우는 4대 신수가 맡고 있던 역할을 새롭게 태어날 신수에게 전부 몰아줄 생각이었다.
아무도 해내지 못한 새로운 업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여태껏 지켜봤던 탑의 시스템은 새로운 업적을 취할 때마다. 뛰어난 성취를 보일 때마다 그에 준하는 보상을 확실하게 보였어. 그렇다면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
연우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이만한 일은 아무도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보상이 주어질지는 도무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올림포스의 보고를 열었을 때에 비해도 절대 낮지 않을 거란 거지.’
연우는 들뜬 마음을 겨우 가라앉혀야 했다.
더구나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업적이나 보상만 따르는 게 아니었다.
11층의 생태계를 손에 쥔 신수를 옆에 둔다는 것은 11층 자체를 손에 넣는다는 것과 똑같았다. 환수와 마수, 신수들이 살아가는 세계. 환계(幻界)라는 세상을.
아직 확실한 가닥은 잡히지 않았지만, 한 개의 층계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건 앞으로 큰 메리트가 될 게 분명했다.
연우는 이러한 생각 중 일부만 밝혔다.
하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판트 남매 역시 아직 11층을 끝내지 못한 상태. 뛰어난 공적치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외뿔부족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대장로를 비롯한 장로들은 마룡의 알에 이어 새로운 연구거리가 생겼다면서 크게 좋아했다. 마룡의 부화를 지켜본 것도 신기한데, 이번에는 신수를 만들어 본다는 사실이 기가 막히다면서.
저대로 두면 장로원이 통째로 11층으로 넘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소란스러워졌다. 몇몇 부족원들은 벌써 새로운 신수의 이름을 지어 보자면서 떠들어 대기도 했다.
그렇게 떠들썩한 마을을 보면서.
연우는 가볍게 웃음을 흘리다가, 곧바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갔다.
* * *
연우는 잠시 폐관수련을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마을을 벗어났다.
지금부터 할 일은 그로서도 조심스럽고, 최대한 비밀리에 진행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고대하던 순간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건, 바할과 리언트를 쥐어짜는 거로군.”
연우는 과연 천여 마리의 망령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컬렉션 속에서, 바할 등이 어떤 꼴이 되었을지 궁금했다.
분명 의식은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다. 하이 랭커나 그에 준할 만큼 뛰어난 녀석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망령의 세계는 더 답답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안에서 저들끼리 실컷 치고받고 싸웠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래 봤자 물리적인 행사력이 없어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할 테지만.
연우는 허공에다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츠츠츠.
잿빛 안개가 한데 뭉치면서 두 마리의 사귀가 나타났다. 원래 격이 높아서 그런지 흑기를 조금만 불어 넣어도 금세 진화할 수 있었다.
「이…… 곳은?」
「밖?」
의식을 되찾은 바할과 리언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하려던 그때.
휘리릭!
지면에 깔렸던 그림자들이 촉수처럼 뻗어 나와 두 녀석을 넝쿨처럼 칭칭 감았다. 사지를 결박하고, 목과 몸을 묶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었다.
미리 그들과 함께 나와서 대기하고 있던 괴이들이 나선 것이다. 두 녀석이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도록.
「크윽!」
「제기랄! 이게 뭐야아!」
덕분에 멍하니 있다가 묶여 버린 두 녀석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렬한 사념이 풍기면서 어떻게든 괴이들을 떨쳐 내기 위해서 마구 저항했다.
특히 바할의 주변으로는 붉은 불꽃이 튀어 오르면서 괴이들을 태워 버리고자 했다. 저항할 때마다 그림자 촉수도 자꾸 위아래로 들썩거렸다.
「감히! 이깟 버러지들 따위가아!」
강렬한 사념이 요동쳤다.
연우는 힘들어하는 괴이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역시. 이걸로도 힘들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하이 랭커는 탑의 세계에서도 최고 순위에 오른 자들. 당연히 영혼이 가진 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우가 바할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어부지리를 취해서이지, 그의 실력이 바할을 능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괴이들이 바할을 감당하기란 요원할 수밖에.
그나마 이렇게라도 버틸 수 있는 건, 사귀와 괴이 간에 주어지는 격차가 크기 때문일 뿐. 이렇게 계속 둔다면 괴이들의 결박도 끊어질 게 분명했다.
다만, 연우는 짐작을 하고 있으면서도 바할의 힘이 어느 정도일까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이렇게 계속 뒀다가는 이야기하기가 불편해진다.
결국 연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가락을 한 번 더 튕겼다.
그러자 컬렉션에 있던 모든 괴이들이 밖으로 소환되었다. 훨씬 많은 그림자 촉수들이 튀어나와 바할을 미이라처럼 더 두껍게 감쌌다.
「크아아! 차정우! 차정우우우! 너 따위가 나아아알! 잘도 이딴 꼴로오오!」
바할은 결국 바닥에 강제로 끊려진 채로 분노를 잔뜩 토해 냈다.
연우를 노려보는 눈길에서 불똥이 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죽기 직전에 가졌던 공포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뭐? 차정우라고?」
연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리언트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사념이 잘게 떨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상태였다.
혼란스러워하는 녀석들을 보면서.
연우는 쓰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둘은 경악을 내뱉었다.
바할은 공포를 잊기 위해 더 크게 분노를 토했고, 리언트는 두려움을 잔뜩 안으면서 몸을 덜덜 떨었다. 새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우는 녀석들이 풍겨 대는 혼란스러운 사념을 잔뜩 받아들이면서.
“너희들.”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과 관련된 것. 레드 드래곤이 청화도를 급습한 이유. 말해 줘야겠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