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앉은뱅이 세 여신 (1)
“벌써 올라가시려고요, 오라버니?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내 말이.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안타까워하는 에도라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리는 판트. 판트도 아쉬운 마음에 하는 소리였다.
연우는 그런 남매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남들에게는 무서운 호환 마마처럼 보이는 녀석들인데. 자신에게는 이렇게 순한 양처럼 구는 모습이, 정말 형제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무왕이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고 선언한 뒤, 연우는 곧바로 다시 층계를 오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물론, 무왕이 진짜 연우에게 가르칠 게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스스로 궁리하고, 경험하며, 터득하면서 발전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탄탄한 기반은 닦아 줬으니, 그 위는 알아서 쌓으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무왕이 시키는 대로 바로 움직이고자 했다.
다만, 판트와 에도라는 아직 신수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덜 끝났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단순히 시련만 마칠 생각이라면 금방 끝낼 수 있겠지만, 신수를 탄생시킨다면 두 사람에게도 커다란 전력이 되기 때문에 간단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당분간 마을에 남아 알을 돌보는 한편, 여태껏 미뤄 뒀던 자기 수련도 병행할 예정이었다.
수많은 랭커들이 뛰어다니고, 여름여왕과 검무신 등이 칼을 휘두르던 지난 전쟁이 커다란 자극이 된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그냥 헤어지려는 게 못내 아쉬운지, 판트와 에도라는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했다.
연우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덩치는 산만 한 판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말했다.
“천천히 가고 있을 테니 빨리 와라.”
* * *
연우는 잘 가라는 부족원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외뿔부족의 마을을 벗어났다.
하지만 연우는 곧장 탑으로 향하지 않았다.
잠시 발걸음을 옆으로 틀어서 탑 외 지역 내에 있는 시장 쪽으로 향했다.
수많은 인파들을 지나, 그가 멈춘 곳은 망치와 모루가 같이 그려진 어느 허름한 대장간이었다.
전에 떠났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
다만, 허름하기만 하던 이전과 다르게, 지금은 안쪽에서 시끄러운 망치질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후끈한 열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와 버렸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연우는 문 앞에 잠깐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그가 찾은 곳은 헤노바의 대장간.
사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연우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앞으로 험난한 길을 걸으려는 그에게 있어, 동생 때처럼 헤노바에게 다시 큰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다시 되돌아온 이유는 너무 단순했다.
‘잘 계시려나.’
궁금해서.
그리고 바할의 죽음을 듣고 상심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헤노바는 인연을 끊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바할은 한때 그의 밑에서 쇠와 불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던 제자였다. 헤노바가 동생에게 정을 줬던 만큼 마음을 열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연우는 그런 바할을 죽였다. 그리고 바할이 청화도와의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은 그동안 암암리에 퍼져 나가 있는 상태였다. 헤노바도 들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이 바할을 어떻게 했다고 고백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헤노바가 상심에 잠겨 있지는 않을지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금 조급한 마음에 찾아온 것인데. 막상 이렇게 찾아오니 마음이 걸리기도 했다.
연우는 몇 번이고 문손잡이를 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다,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돌아섰다.
확실히 그와 만나서 좋을 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끼익-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쇳덩이를 한가득 들고 걸어 나오던 헤노바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뭐야? 거기서 뭐하는 거냐?”
헤노바가 곰방대를 문 채로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가면 아래, 연우는 어색한 눈빛으로 볼을 긁적였다. 이렇게 마주쳐 버렸으니 그냥 돌아가는 것도 영 이상했다.
“오랜만입니다, 헤노바.”
* * *
“뭐, 손님이라고 내어 줄 건 없고. 이거나 마셔.”
헤노바는 연우를 적당한 자리에 앉혀 놓고 탁상에다가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갓 데운 커피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대고 있었다.
연우는 머그잔을 받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그대로인 겉모습과 다르게 안쪽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진열장에는 반짝이는 도구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바닥은 청소를 마친 듯 윤기가 흘렀다.
새롭게 제련한 무구들도 꽤 많이 보였다.
“꽤 많이 바뀌었습니다.”
연우가 아는 헤노바는 이렇게 정리정돈을 잘하고, 청소를 꼼꼼하게 하는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다른 누가 돕기라도 하는 걸까?
헤노바는 짧은 다리로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코웃음을 쳤다.
“전에 네 녀석이 한바탕 일 치르고 간 놈들, 기억나느냐?”
“나이트 워치, 말씀이십니까?”
레드 드래곤이 시키는 대로 이따금 헤노바의 대장간에 행패를 부리던 암흑가 클랜.
연우가 한 번 정리를 하면서 헤노바의 대장간을 잘 살피라고 경고를 하기는 했었다.
“그놈들이 이따금 찾아와서 청소를 하고 간다. 뭘 그렇게 귀찮게 해 대는 건지. 덕분에 내가 암흑가 놈들과 결탁했다는 소문이 쫙 돌아서 얼마나 짜증이 났는데. 미친놈들.”
아무래도 그 뒤로도 줄곧 시키는 대로 일을 잘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재개하신 겁니까?”
“혼자서 자리 지키고 있어 봤자 할 것도 없으니까. 심심풀이로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심심풀이로 시작했다는 말과 다르게, 일거리는 꽤 많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연우는 그게 아주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동안 아르티야와의 관계 때문에 사람들이 회피를 해서 그렇지, 사실 헤노바는 탑의 세계에서도 5대 명장으로 통할 만큼 뛰어난 장인이었다.
그런 사람의 가게가 여태껏 파리만 날리고 있었던 게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아르티야의 일이 있기 전에 헤노바가 만든 무구라고 하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비싼 값에 거래될 정도였다.
그래서 장사를 재개한 지금도 그때처럼 소수로 의뢰를 받고, 그것을 제작해 주는 형태를 띠는 것 같았다.
“그런데 네놈은 언제 내려 왔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요즘 꽤 시끄럽게 만들더만.”
“별것 아닙니다.”
“흥! 네놈답지 않게 겸양은 무슨. 원래 하던 대로 굴어.”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조금 무거운 마음을 갖고 와서 그런지, 예전과 다르게 그와 살짝 거리가 있는 느낌이었다.
헤노바도 그렇게 느꼈는지 곰방대를 피워 대는 내내 찡그린 미간을 펴질 않았다.
탁!
그러다 곰방대를 뒤집어 남은 재와 불똥을 치우고, 살짝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말했다.
“안부나 물으러 온 거면 그냥 돌아가. 괜히 시간 때울 필요 없으니까.”
연우는 난감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바할에 대한 것을 직접적으로 묻기는 힘들다. 헤노바 성격상 속내를 잘 표현하지도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읽기 어렵다.
그래서 어쩔까 잠깐 고민을 하던 도중, 다른 생각에 미쳤다.
한령. 녀석에게 줄 칼이 아홉 자루나 필요했지. 인트레니안에 있는 것으로는 사실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물었다.
“칼 제작을 부탁드리고 싶은데,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 * *
“크기는?”
“대략 이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재질은?”
“따로 찾는 건 없습니다. 다만, 단단한 내구도가 최우선이 되었으면 합니다.”
“무식하게 단단할수록 좋다?”
“예.”
“그럴 거면 차라리 몽둥이를 찾는 게 빠르지, 뭣하러 칼로 만들려고 해?”
“그래도 이왕이면 날카로웠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보도 급으로요.”
“뭐어? 보도?”
“힘듭니까? 음. 그래도 한때 5대 명장이시라고 스승님께 들었었는데…… 아무래도 나이가 드시니 기력이 많이 달리시나 봅니다.”
“이 새끼가! 내가 어딜 봐서 기력이 달린다는 게야? 네놈 눈깔은 장식으로 들고 다니는 거냐? 이 근육 안 보여?”
“너무 작아서 안 보입니다만.”
“이놈이 그래도?”
처음 느껴졌던 거리감은 금세 메워졌다.
연우는 예전처럼 능글맞게 헤노바의 속을 벅벅 긁어 댔고, 헤노바는 금세 반응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다 연우가 보도를 한 자루도 아니고 아홉 자루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헤노바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이 되었다.
“뭐어? 아홉 자루우?”
“역시 힘드시나 봅니다.”
“이 새끼가, 나 기력 안 달린다고! 아니, 그보다 뭐가 그렇게 많이 필요해? 어디 들고 가서 보따리 장사라도 하려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그만큼 왜 필요해? 칼도 제대로 못 다루는 놈이?”
헤노바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숱한 플레이어들을 상대해 왔던 헤노바의 눈으로 봤을 때, 연우는 무술을 어느 정도 익히긴 했어도 ‘달인’ 급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았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보도를, 그것도 크기도 종류도 가지각색인 서로 다른 칼을 그렇게 많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연우가 가진 비그리드와 마장대검만 하더라도 절대 다른 아티팩트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지금 얼핏 보니 관리도 잘 되어 있었다. 예전에 배운 야장술을 잘 써먹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냥 필요해서요. 하지만 아무래도 제가 굳이 무리한 부탁을 한 모양입니다.”
“이 새끼가, 진짜 끝까지……!”
헤노바는 주먹을 꽉 쥐면서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 신경질적으로 곰방대를 확 낚아채 다시 불을 붙였다.
예나 지금이나 참 사람 심기를 긁어 놓는 데는 대단한 능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헤노바는 잠시 곰방대를 깊게 빨아들이면서 머릿속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괜히 녀석의 페이스에 휘말리면 자신만 손해였다.
그래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괘씸했다.
오랜만에 찾아와서 허투루라도 잘 지냈냐고 물어보지는 못할망정, 자기 할 말만 쏙 내뱉는 꼴이라니. 참 한결같은 녀석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연기를 길게 내뱉으면서. 헤노바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급한 것이냐?”
“빠를수록 좋긴 합니다.”
“그럼. 열흘.”
“……?”
어리둥절한 눈빛을 한 연우를 보면서, 헤노바는 답답하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열흘 뒤에 찾아오라고, 화상아.”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홉 자루의 칼을, 그것도 보도 급으로 만들어 달라는 의뢰다. 하루에 한 자루를 만드는 것도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때까지 가능하시겠습니까? 다른 의뢰들도 밀려 있을 텐데…….”
“흥. 뭘 먼저 수락하든지 간에 그건 내 맘이지. 내가 만들 물건, 내가 알아서 순서 정하겠다는데 누가 지랄을 해 대? 마음에 안 들면 도로 갖고 가라고 하면 그만이야.”
연우는 역시 헤노바답다는 생각에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신을 이렇게 도와주려 하는 헤노바의 마음이 감사했다.
“감사합니다.”
“흥! 정말 감사한 마음이 있긴 하고?”
“그럼 이왕에 하시는 김에, 소드 브레이커도 하나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자루 추가한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죠?”
“이 새끼가!?”
뒤늦게 샤논의 무기까지 떠올려서 내뱉은 말에 결국 헤노바는 참지 못하고 뒷골을 쥐어 싸매야만 했다.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골로 가실 수 있는 연세이십니다.”
“으으. 저 새끼가 진짜 끝까지.”
헤노바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곰방대의 끄트머리에는 잇자국이 잔뜩 남았다.
그러다 헤노바는 연우가 의뢰하고자 하는 열 자루의 검과 도에 대해서 상세하게 물었고, 연우는 검은 팔찌를 통해 전해지는 샤논과 한령이 바라는 요구 사항을 그대로 읊었다.
그러다 헤노바는 아예 창고에서 도화지를 가져와 도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우도 그것을 보면서 말하는 게 편해 자잘한 부분까지 상세하게 요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 모든 이야기가 끝날 때쯤에는 이미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에잉, 별것 없다더니 뭘 이렇게 요구하는 게 많은 건지! 내 살다 살다 너처럼 이렇게 깐깐한 놈은 처음 본다, 이놈아.”
헤노바는 그림과 글자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화지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태껏 그냥 좋은 옵션이 내장 된 아티팩트만 요구하던 손님들과 다르게, 연우가 의뢰한 것들은 전부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은 단순한 보도가 아니었다.
요도(妖刀).
혹은 마검(魔劍).
의뢰한 대로만 만든다면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결과물들이 만들어질 게 분명했다.
간만에 재미있는 걸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헤노바는 벌써부터 손끝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보통 이런 까다로운 요구 사항 들은 무술에 능통하거나, 무기에 통달한 ‘달인’ 혹은 ‘명인’ 급 이상이 요청을 하는 편인데.
어떻게 연우가 이런 것들을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 열흘이면 되겠습니까?”
“열흘하고 이틀! 무게 균형이 이상한 것들이 많아. 그때 찾아와.”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약금은…….”
“거기 아무 데나 두고 가.”
헤노바는 벌써부터 제작에 들어가려는 건지, 화로에 불을 붙이고 풀무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떠나려는 연우에게 손짓만 했다.
연우는 역시 그답다는 생각에 살짝 웃다가, 근처 탁상에다가 주머니를 올려 뒀다.
희귀한 보석들이 가득 든 주머니.
인트레니안에서 꺼낸 것들이니만큼 하나하나가 모두 비쌌다. 요도와 마검을 만드는 의뢰비로 충분하다 못해 넘칠 터였다.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야.’
연우는 그런 헤노바의 모습에서 바할에 대한 그림자를 찾을 수 없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방해가 될까 싶어 조용히 문을 열고 대장간을 벗어나려는데.
“아, 참 그리고.”
“……?”
헤노바가 부르는 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뒤로 돌아보니 헤노바는 끓는 쇳물에 시선을 고정해 이쪽은 보고 있지도 않았다.
“앞으로는 굳이 쓸데없이 오지랖 부릴 필요 없다. 이 나이쯤 되면, 헤어짐은 그냥 일상다반사니까. 다음부터는 귀찮게 찾아오지 마.”
“…….”
연우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대장간을 벗어났다.
그날 밤.
헤노바 대장간의 문에는 작은 팻말이 걸렸다.
Closed.
당분간 손님 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