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44화 (144/862)

19화. 앉은뱅이 세 여신 (3)

“여, 여기 있습니다.”

커피 잔을 내려놓는 비스터의 손길이 잘게 떨렸다.

거의 다 무너져 가던 나이트 워치를 이제 탑 외 지역 암흑가의 제일 세력으로 만들 만큼 뛰어난 수완가인 그였지만, 차마 연우는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동안 혹시라도 실수한 게 없나 싶어 이곳에 오기 전에 수하들을 닦달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그동안 수하들은 헤노바의 대장간을 건드리기는커녕, 근처를 보고 오줌도 싸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이전에 연우가 줬던 충격이 끔찍했단 뜻이겠지.

그래도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힐 수 있기 때문에. 비스터는 연우가 조용히 커피 잔을 들 때까지도 시선을 함부로 떼지 못했다.

덩치가 불어났으니 반항을 해 볼까 하는 마음은 애당초 들지도 않았다.

처음 연우와 만났을 때 받았던 충격이 워낙에 컸던 데다가, 그동안 연우의 활약상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절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연우는 가볍게 커피를 마시면서 주변을 쓱 훑었다. 확실히 자신이 깽판을 쳤을 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꽤 많이 변했군.”

“더, 덕분에 조금이나마 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이라.

피식. 연우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꺼내는 비스터를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비스터에게는 더욱 큰 공포로 다가왔다.

탁연우는 커피 잔을 조용히 내려 놓고, 턱을 괴면서 비스터를 응시했다. 비스터가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쭈뼛 세웠다.

“어차피 이야기가 길어져 봤자 피차간에 피곤해지기만 할 테니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지.”

“마, 말씀하십시오.”

비스터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하나 찾고 싶은데.”

“어떤……?”

“브라함.”

“브, 브라함이라면. ‘추방자’를 말씀하시는지요?”

“맞아.”

브라함은 원래 지고종(至高種)이나 초월종(超越種)으로만 구성 되었다는 ‘엘로힘’의 소속원이었다. 다만,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엘로힘에서 쫓겨난 탓에, 항상 추방자라는 단어를 꼬리표처럼 달고 살아야만 했다.

문제는 브라함이 오히려 그 단어를 아주 좋아했다는 점이지만.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아저씨였다.

8대 클랜 중 하나인 엘로힘은 멤버를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딱 하나.

종족.

혈통이 어디에 있는지만 따지며, 그 혈통도 순혈인지 아닌지를 가리고, 그 속에서도 계급을 철저하게 따진다. 또한, ‘위대한 피’는 오로지 태생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라고 여기는 우생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기도 했다.

반마족이나 타천, 바니르, 프로토게노이 등으로 이뤄진 지고종과 용종, 거인족 따위로 구성된 초월종.

그들은 개개인 모두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격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에, 아등바등하면서 힘들게 탑을 오르는 플레이어들을 깔보는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쉽게 말해, 탑의 세계에서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브라함은 바로 그런 엘로힘에서 쫓겨난 자였다.

거기다 널리 알려지기로 엘로힘에서도 아주 고위 서열에 해당하는 종족의 후손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하지만 브라함은 어딜 가든, 언제든 그런 자신의 출신을 쓸데없다며 비웃고 다녔고, 오히려 엘로힘에서 쫓겨나며 얻었던 ‘추방자’라는 별칭을 마치 훈장처럼 좋아했다.

무엇을 하던 자유분방하며, 어딘가에 갇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면서 냉소적인 성격도 있기 때문에 그는 어딜 가던지 눈에 쉽게 띄는 편이었다.

“사흘. 사흘만 주십시오. 그럼 바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비스터는 현명하게 브라함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오래 살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똑똑한 녀석이었다.

“좋아. 그럼 찾는 즉시 이걸로 연락해.”

연우는 아공간에서 반지 모양을 한 아티팩트를 꺼내 비스터에게 던졌다.

마법 창고 인트레니안에는 현자의 돌을 위한 재료들 말고도, 금은보화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여러 아티팩트들이 들어 있었다.

이 반지는 위치가 어디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거리를 넘어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는 통신용 아티팩트였다.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고, 사용 횟수에 한계가 있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지만.

연우는 애당초 자신의 물건이 아니었으니 쉽게 내놓을 수 있었다. 물론, 출처가 레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싹 다 지워 둔 상태였다.

“그리고 이건 착수금.”

반지에 이어 연우는 탁상 위에 주머니까지 올려 뒀다. 제법 묵직한 소리가 났다.

비스터는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어 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안에 금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통신용 아티팩트에 이어 이렇게 많은 의뢰비라니. 연우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더구나 브라함의 정보는 수소문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얻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사흘이나 요청한 것도 혹시 갑자기 종적을 감췄을 경우를 대비해서였을 뿐이지, 사실 그것도 하루면 충분했다.

“이, 이렇게까지 주실 필요는…….”

“그냥 챙겨. 그만큼 빨리 찾아 달라는 의미니까. 앞으로도 헤노바를 잘 보호해 주면 좋고.”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잘 쓰겠습니다.”

비스터는 벌떡 일어나 허리를 바짝 숙였다.

이 순간 녀석의 머릿속 계산기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저승사자만큼 무서운 작자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연우는 앞으로도 나날이 유명세를 떨칠 게 분명한 실력자였다.

그렇다면 지난날에 있었던 원한을 잊어버리고, 그와 앞으로도 거래를 틀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클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연우도 많은 금화를 보여 주면서 금력을 자랑하고, 넌지시 앞으로도 계속 거래를 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내비친 거고.

연우는 자신이 하려는 말을 재빨리 알아내는 비스터를 보면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가 빠른 놈이니 자신에 대한 정보를 다른 곳에 흘리지 말라는 것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브라함을 찾고, 의뢰한 칼을 받을 때까지 층계에만 집중하면 되겠어.’

연우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높다랗게 우뚝 선 탑에 고정되었다.

* * *

[이곳은 16층, ‘삶의 물레’의 관입니다.]

연우는 다시 찾은 익숙한 광경에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곳곳에서 보이지 않는 시선이 여럿 달라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왕에 올 것, 그때 미리 완수해 둘 걸 그랬나?’

자신이 등장한 순간, 이미 시선의 주인들은 다급하게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각자 소속된 신전으로 향하는 것이겠지.

연우는 이미 스쿨드의 신전에다 행패를 놓았었다. 또다시 나타난 그로 인해, 신관과 사제들이 바짝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귀찮았다.

한빈을 끌고 올 때에는 청화도의 추적이 있을지 몰라 급히 빠져나왔었던 거였는데.

막상 지금이 되니 이렇게 자신을 경계하는 자들이 많은 이상, 시련을 쉽게 마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니.

연우는 생각을 정리하고 세 개로 나눠진 갈림길에서 세 번째, 스쿨드의 신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한 번 길을 정하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는 규칙 때문에 이곳밖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래의 신전(스쿨드)으로 향할 수 없습니다. 신전의 주인이 출입을 불허합니다.]

문제가 생겼다.

미래의 신전 측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신전에 깃든 신 스쿨드가 연우를 거부하는 중이었다.

‘강제로 뚫어야 하나?’

이래서는 시련을 마칠 수가 없다. 억지로라도 길을 뚫을 생각에 등에 매단 비그리드 쪽으로 손을 가져가려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연우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이곳은 신성한 신의 영역입니다. 날붙이는 되도록 자중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뒤로 돌아보니 새하얀 법복을 입은 누군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로브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목소리가 여자였다.

황금색의 물레가 그려진 법복. 과거의 여신, 우르드를 상징하는 법복이었다.

“넌?”

“인사가 늦었습니다. 여신 우르드의 사도, 햅번이라고 합니다.”

가면 사이로 비치는 연우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우르드란 이름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세 여신. 중에. 맏이를. 주의. 하라.

관리자 라플라스의 입을 빌려 전해졌던 어떤 악마의 전언.

악마의 이름은 아직도 모른다. 관심도 없었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만, 우르드의 사도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은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사도는 신의 대행자였다. 98층을 벗어날 수 없는 그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니, 사도가 찾아왔다는 건 직접 우르드와 대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행히 햅번은 연우를 적대시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하려고 해도 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도의 힘은 주인인 신에게서 비롯된다. 운명을 내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 힘도 없는 우르드의 사도이니 힘도 빈약할 것이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랭커에 필적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겠지만.

연우는 스스로 웬만한 랭커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아니, 하이 랭커나 그에 준하는 급이 아니면 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햅번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태도는 아주 정중했다.

“그러니까. 우르드의 사도가 여기는 왜?”

하지만 그런 정중한 태도에도 연우는 여전히 우르드의 사도가 찾아온 이유는 절대 좋은 뜻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경계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햅번도 당연하다는 듯이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여신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날?”

“예.”

“해코지라도 하려는 건가?”

“저희에게 그럴 힘이 없다는 건, 당사자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여신께서는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만약 그래도 믿기 힘드시다면, 이 자리에서 신의 이름을 걸고 맹약을 해 보이겠습니다.”

이름을 내건다는 것. 신과 악마들을 묶는 틀이라는 인과율로부터 저촉된다고 해도 충분히 감수를 하겠다는 의미였다. 높은 존재일수록 그런 제약은 더 심했다.

그런데도 만나고 싶어 한다? 연우는 우르드와 햅번의 생각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이렇게 된 마당에 안 갈 수도 없었다.

보나 마나 베르단디의 신전으로 가는 길목도 막혔겠지. 시련을 마치려면 우르드의 신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연우는 순간 짜증이 났다.

설사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강제로 끌려 다녀야만 하는 상황은 불쾌하다.

하물며 상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는지 알 수 없을 때에는 휘둘리기 십상이었다.

눈만 돌려도 잡아먹히기 쉬운 탑의 세계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저들을 먼저 자극한 건 연우이긴 했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이 한 일에 떳떳했다. 스쿨드 신전에서 벌어지던 일은 절대 좋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스륵-

그래서 연우는 검은 팔찌에다 마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햅번의 그림자가 살짝 일렁이더니 위로 길쭉하게 치솟았다.

햅번이 아차 싶어 한 발자국 물러서려 했을 때에는 이미 초승달 모양의 그림자 낫이 그녀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리고 후드의 한쪽이 잘려 나가면서 숨겨졌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새하얀 피부. 뾰족한 귀. 잔뜩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폭포수처럼 떨어져 황금색으로 출렁이는 머리칼.

“하이 엘프?”

연우는 의외라는 듯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황금색 머리카락은 미의 여신 프레이야로부터 신혈(神血)을 물려받았다는 증거였으니까.

하이 엘프는 엘프나 다크 엘프 등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조상이다. 또한, 후손을 거의 낳을 수 없다는 특성 때문에 개체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중이었다.

때문에 탑 내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며, 그나마 남아 있는 이들도 대부분 나이가 1천 년 이상을 먹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지고종에 해당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햅번의 턱 밑에 드리운 그림자 낫을 거두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놀랐다고 해서, 햅번이 우르드의 사도가 아닌 건 아니었으니까.

도리어 연우는 내심 잘 되었다 싶었다.

사도는 신의 일부이다 보니 죽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간다. 하물며 하이 엘프 같은 지고종이 죽는다면 자칫 격이 저하될 수도 있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그만큼 높단 뜻이었다.

항상 하이 엘프의 주변을 따라 다닌다는 정령들이 이리저리 부딪치는 게 느껴졌지만, 괴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햅번은 연우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신의 맹약을 건다고 해도 그쪽을 완전히 믿을 이유는 못 되니까. 일이 끝나면 풀어 주도록 하지. 어차피 네 말대로 아무 해코지도 않을 거라면, 너도 다칠 일이 없잖아?”

햅번은 더 크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안색을 풀고 반대로 홱 돌아섰다.

“여신께서 계신 곳으로 안내해 드리죠. 따라오세요.”

휙-

햅번은 그 말만 남기고 지면을 박차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림자에 맺힌 괴이도 같이 움직였다.

알아서 쫓아오라는 건가.

참 소심하게 복수를 한다는 생각에, 연우는 가볍게 헛웃음을 흘리고 햅번이 사라진 방향으로 순보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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