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고행의 산 (1)
“빌…… 어먹을……!”
“마지막으로 할 말은?”
“운명의 저주가 널 따를……!”
퍽!
연우는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발에 힘을 주어 마지막 남은 사제의 머리를 부쉈다.
그리고 주변을 홱 하고 둘러봤다.
키아아!
이미 주변은 전부 괴이 군단으로 싹 정리가 된 상태였다.
300명도 넘는 플레이어들이 전부 기이한 형태로 죽어 있었다. 팔다리가 강제로 꺾이거나, 뾰족하게 솟은 그림자 가시에 꿰뚫린 채로.
공통점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단 점이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언데드들에 의해 당해 버렸으니.
그들은 전부 앉은뱅이 세 여신의 교단들에서 파견한 추격대였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 그들의 칼이 된다는 성기사들.
성전을 선포한답시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연우에게 칼조차 휘두르지 못했다.
괴이 군단의 등장에 이리저리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용의 권능은 깨울 필요도 없었다.
스르르.
괴이들은 시체들을 안고 땅속으로 스며 사라졌다. 핏자국도 모두 지워져 주변은 언제 격렬한 전투가 있었냐는 듯 깨끗해졌다.
「이놈들로는 너무 심심하다고, 주인. 이것밖에는 없어?」
샤논은 재미없다는 듯이 칼을 어깨에 떠억 하니 걸치면서 투덜거렸다.
투구 아래에는 머리가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을 것 같았다.
한령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내리면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아홉 자루의 칼을 전부 꺼내지도 않았다. 두 자루면 충분했다.
아마 이런 하류들과 칼을 겨뤘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앞으로 더 많은 놈들이 올 테니. 걱정 마.”
「뭐, 주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음에는 좀 더 좋은 놈들이 있을 때 불러 달라고.」
샤논은 그렇게 말하고 한령과 함께 다시 검은 팔찌 속으로 사라졌다.
* * *
그 뒤로도 몇 번의 추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녀석들은 대패를 했고, 연우는 제자리에 앉아 영혼들을 대거 수확하면서 괴이들을 계속 강화시킬 수 있었다.
녀석들이 많은 전력을 가지고 오면 가지고 올수록 연우에게는 더 좋았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앉은뱅이 세 여신의 교단들은 결국 추적을 중지해야만 했다.
전력적 열세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신력을 되찾기는커녕, 그들의 교단이 뿌리째 뽑힐 지경이었다.
그동안 고용한 용병 집단이나 자객 집단도 너무 많아 자금적 소요가 컸다. 게다가 연우의 활약상이 소문이 나면서 어떤 곳들은 아예 의뢰 내용을 알고 거부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니더라도 우선 교단부터 정비를 하고 쫓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연우는 그마저도 당분간은 여의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쿨드 신전의 과오. 죽어 버린 우르드의 사도. 그리고 몇 안 되는 전력인 성기사들도 죽었다. 베르단디 신전이 아직 남아 있다지만, 그들은 다른 두 교단과 운명 공동체였다.
당연히 세 교단의 신망은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말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신도들도 등을 돌리는 실정이었다.
신의 힘은 위엄에서 나온다.
그런 위엄을 잃었으니 당분간 세 교단은 쓸쓸한 겨울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연우에게 시비를 걸 만한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만한 힘도 없을 테고.
‘그럼 이제 이 신력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연우는 햅번의 영혼에서 강제로 뽑아낸 신력을 유심히 살폈다. 이것을 어떻게 다루는 게 좋을까 잠깐 고민했다.
우르드의 힘이 담겨 있는 결정체다. 당연히 이것이 지닌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검은 팔찌의 권속들이었지만, 성향이 정반대이니 독밖에는 되지 않는다. 짹짹이와 마룡도 마찬가지. 녀석들도 악의 성향을 띠기 시작해서 신력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장 효율적인 곳에 써야 한다.
결국 판단은 쉽게 내려졌다.
‘비그리드.’
수많은 영웅들의 저주를 받은 이 마검이라면.
신력으로 충분히 떼를 씻고, 보다 원래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 아이기스와 성화의 영향으로 저주가 많이 씻겼다지만, 그래도 비그리드에 뿌리 깊게 박힌 저주의 근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우는 오른손에 비그리드를 쥐고, 안쪽으로 신력을 조금씩 흘려 넣었다.
하나도 새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빠른 속도로 정화가 이뤄집니다. ‘비그리드’가 신력을 무서운 속도로 흡수합니다. 35, 36, 37%…… 61, 62%…….]
[저주에 가려져 있던 성검의 힘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비그리드의 검면을 타고 흐르던 핏빛 광채와 녹색 저주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대신에 그 위로 새하얀 서광이 올라오면서 검면에 적혀 있던 룬의 문양을 또렷하게 빛냈다.
동시에 여태 어중간한 길이를 자랑하던 검신이 아주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검의 정화.
저주를 모두 씻어 내고 숨겨졌던 성능을 모두 깨우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더 걸릴 테지만.
이 정화 작업이 끝난 뒤 비그리드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뭇 많은 영웅들이 그토록 탐내했다던 성검의 진짜 모습은 어떨지.
연우는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 * *
연우는 16층에 다다랐을 때처럼 다시 빠른 속도로 층계를 돌파했다.
이미 랭커에 버금가는 힘이 있다. 필요할 때에는 일기장의 내용과 용의 지식을 활용해도 된다. 당연히 하위 층계인 10층대는 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연우는 절대 허투루 층계를 공략하지 않았다.
스테이지를 꼼꼼하게 훑고 다니면서 필요한 히든 피스를 모두 독식했고, 공적치를 잔뜩 모아서 각 층계의 기록을 전부 싹 갈아 치웠다.
물론, 명예의 전당에는 여전히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 사이에 20층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이곳은 20층, 고행오산(苦行五 山)의 관입니다.]
‘왔다. 여기까지.’
연우는 스타트 존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다섯 개의 산을 바라 봤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다섯 개의 산은 일렬로 길쭉하게 쭉 서 있었다. 하나하나가 가진 높이도 높아서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특히 뒤로 갈수록 산의 높이는 더 높아져 갔다. 세 번째 산부터는 산허리부터 새하얀 만년설까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전부 푸르른 숲으로 가득해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탁 트일 정도였다. 한 폭의 절경이 따로 없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유람하기 좋은 곳으로 보일 테지만.
사실 이곳은 플레이어들이 항상 난색을 표하는 곳이었다. 다른 층계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곳들은 하나같이 잘 찾아보면 얻을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 달랐다.
얻는 곳이 아닌 시험하는 곳. 그들이 여태 이룬 성취를 확인하는 곳이었다.
10층, 백색의 관에서처럼. 탑은 매번 10개의 층계 단위마다 그 전까지 플레이어가 쌓은 기량을 모두 시험한다. 10층은 1층부터 9층까지, 20층은 11층부터 19층까지 쌓은 것들을 전부 시험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20층의 고행오산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사는 거주민들은 ‘오행산’이라고 부르는 이 산들은 5개의 산을 전부 건널 때까지 쉼 없이 플레이어들을 시험하기 때문에, 제대로 건너기 위해 다시 하위 층계부터 시작하는 자들이 속출할 정도였다.
그렇게 악명이 높은 곳이었지만.
사실 보통 플레이어들과 다르게, 20층은 연우가 기다리는 몇 개 안 되는 층계 중 하나였다.
[20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신에 귀의하고자 하는 자는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혹독하게 몰아붙여 한계를 극복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이곳에 있는 다섯 개의 산은 그런 당신의 고행(苦行)을 도울 것입니다.
눈을 가려 현혹으로부터 떨어지게 할 것이고, 귀를 닫아 고요한 평정심을 갖게 할 것입니다. 냄새와 맛이 사라진 세상은 집착으로부터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며, 사라진 자극은 오롯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만들어 줄 겁니다.
하나의 산을 건널 때마다 하나의 고행이 주어질 것입니다. 다섯 개의 모든 고행을 극복하여 완전한 나를 갖추십시오.]
20층의 다섯 산은 각각 다섯 감각을 뜻한다. 하나의 산을 오를 때마다 정해진 감각이 하나씩 사라지는 식이었다.
첫 번째 산에서는 시각이, 두 번째 산에서는 청각이, 세 번째 산에서는 후각이, 네 번째 산에서는 미각이, 다섯 번째 산에서는 남은 촉각이 사라진다.
사람은 누구나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서 생각을 하고 판단을 내려 움직인다. 이것을 일절 차단시킨 순간에 남는 것은 오로지 자아뿐이다.
그런 자아만을 가지고 저 험준한 마지막 산을 건너야 하는 것이다.
본인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여러 플레이어들은 그런 제한된 감각에 익숙해지지 못해 리타이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어렵게 통과한다고 해도, 학을 떼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너무 어렵기만 한 장소일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었다.
스스로를 단련하는 수도자들이 그러했다. 경지가 높을수록 고행오산이 주는 압박감은 더 클 수밖에 없으니까.
그만큼 스스로를 혹독하게 내몰아 더 단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20층은 하위 층계 중에서는 랭커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이곳은 더욱 더 강해지고자 하는 연우에게도 알맞은 장소였다.
특히 무왕이 내준 숙제를 하기에는 더더욱.
연우는 인트레니안을 살짝 열어 안쪽에서 책자를 꺼냈다.
외뿔부족을 떠나기 전에 무왕이 선물이라면서 던져 줬던 비급. 여태껏 틈이 날 때마다 읽어 봤지만, 용의 지식을 빌려도 도저히 난해하기만 했던 절세신공.
〈음검(陰劍)〉
원래 음검은 무왕의 시험을 통과한 후에 추가 보상으로 받기로 된 무공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무왕은 연우가 아직 익히기 어렵다면서 지급을 미뤄 왔었고, 하산을 인정하게 된 그때에야 내준 것이다.
연우는 20층까지 오르면서 틈이 날 때면 비급을 꼼꼼하게 살폈다.
팔극권의 성취가 깊어지면서 비기도 조금씩 탐독하기 시작한 이때. 새로운 무공을 접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연우는 무서고를 몇 번 털었던 전적이 있을 만큼 뛰어난 이해력과 암기력을 가지고 있다. 당연히 비급의 내용을 몽땅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점이었다.
암기는 되는데,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미 무공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갖고 있고, 용체를 각성하면서 사고 능력도 비등하게 발전을 했을 텐데.
그런데도 첫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울 만큼, 너무 어려웠다.
연우는 떠나기 전에 무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실, 음검은 양도(陽刀)와 함께 우리 일족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비원이다.
-비원이라니요.
-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긴 한데. 쉽게 말하자면. 음. 그래. 너 혹시 우리 일족의 기원에 대해서 혹시 아냐?
-소호 금천이 탑을 열면서 그를 따라온 이주 종족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얼추 맞아. 우리는 소호 금천에서 비롯된 선주 종족이고, 그분이 남긴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지. 그게 무공과 진법 같은 것들인데…… 유일하게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을 쓰지 못하는 게 딱 하나 있어. 빌어먹게도.
-설마?
-그래. 음검과 양도. 소호 금천께서 부리셨다던 ‘태극혜 반고검(太極慧盤古劍)’으로 갈 수 있다는 두 무공을 성취해서 합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비원이다.
태극혜 반고검.
그것을 말할 때에 보였던 무왕의 기이한 광기는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무왕은 말했다.
천재인 자신도 여태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한 게 바로 음검과 양도라고.
외뿔부족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무왕마저도 익히지 못한 무공. 당연히 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덧붙여 무왕은 설명했다.
양도는 다행히 혜안을 단련한 에도라가 어떻게든 계승할 수 있었지만, 음검만은 아직 아무도 손을 쓰지 못했다고.
그러니 제자인 네가 계승을 해 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서.
연우는 무왕이 여태껏 음검을 맡아 줄 인재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뿔부족에서는 계승자가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외부에서 제자를 들여서라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아마 이전에 받았다던 두 제자들이 후보군이었겠지. 검무신과 그에 버금가는 재능을 지녔다는 사람.
‘그리고 둘 다 실패했겠지.’
어쩌면 연우도 실패할지 모른다. 외뿔부족이 지난 수천 년 동안 공을 들여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무공이니 만큼, 연우로서도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급을 받았다는 건 최소한의 자격은 있다는 뜻이고, 연우는 음검이 탐났다.
아니, 음검뿐만 아니라 양도, 그리고 그 너머에 있다는 태극혜 반고검까지 탐났다.
탑을 열었다는 3인, 트리니티 원더의 소호 금천을 있게 했다는 무공.
손에 넣고 싶었다.
‘해 보자. 어떻게든.’
그리고 이곳 고행의 산은 그런 수련을 하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생각을 정리한 연우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첫 번째 산자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