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고행의 산 (2)
“어? 저 사람?”
“독식자?”
“독식자가 여긴 왜…….”
“설마 저놈도 현상금을 노리는 건가?”
“아냐. 독식자는 아직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라고 했어. 그러니까 시련을 깨러 온 것일 수도…….”
산어귀에 이르렀을 때쯤.
연우는 북적대는 인파를 볼 수 있었다. 딱 봐도 수백 명은 될 것 같은 숫자. 그들의 시선이 전부 연우에게로 쏠렸다.
연우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20층에서는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조용히 통과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처음 시련을 시도하는 플레이어들은 그러기가 힘들었지만. 그 외에는 대부분 개인 수련에 집중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저절로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귀에 모인 사람들은 꽤 소란스러웠다. 그중에서 산을 오르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였다.
연우는 감각 영역을 확장시켜서 그들을 쓱 훑어봤다.
대부분 20층을 통과했을 것 같은 실력자들. 수련을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여기는 왜 온 걸까?
살짝 의문이 스쳤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었기에 관심을 거뒀다. 현재 연우는 어떻게 하면 음검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궁리할 뿐이었다.
연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인파가 저절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이미 연우가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에서 큰 활약을 벌이고, 세미 랭커를 꺾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연우를 경계하면서도 부딪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연우는 인파 사이를 가로질러 산어귀에 들어섰다.
그러자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첫 번째 산에 입장했습니다.]
[첫 번째 고행, 시각 차단이 진행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 홀로 켜져 있던 촛불을 확 꺼 버린 것처럼 시각이 저절로 닫혔다.
갑작스러운 암전 때문에 살짝 놀랐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어두운 게 불편하긴 하지만.’
연우는 아예 눈을 감고 다른 감각에 집중했다. 마력이 넓게 퍼지면서 공감각이 일어났다.
주변에 있는 사물의 생김새와 분포, 지형 지리 따위의 여러 정보들이 뒤섞이면서 머릿속에 새로운 지도를 그려 냈다.
[감각 강화]
연우는 튜토리얼의 A구획에서부터 공감각을 사용해 화살들의 움직임을 읽어 낼 정도로, 감각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거기다 용의 감각까지 곁들어지면서 감각 강화의 숙련도는 80%에 달해 있었다. 그에게는 패시브 스킬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시각이 차단되었어도 그만큼 다른 감각들이 저절로 일어나면서 움직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쉬운데.’
일기장에는 분명히 20층에서 아르티야 멤버들 대부분이 고생을 했다고 나와 있었다.
잘 활용되던 감각이 갑자기 차단된다는 것은 그만큼 큰 멍에를 지고 가는 것과 같았으니까. 그리고 플레이어의 기량을 시험하는 곳인 만큼 ‘불편’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하지만 연우는 예상했던 것보다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해 시큰둥했다.
이래서는 고행이 되지 못할 텐데. 다른 산을 계속 건너다 보면 괜찮아지려나.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연우처럼 갓 산을 오르려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으! 젠장. 역시 불편해 죽겠네. 이래서 대체 어떻게 움직이라는 건지.”
“시간은 많으니 일단 천천히 움직이자고. 서로 인지 영역이 혼란스럽게 엮이지 않도록 주의하고.”
“이쪽에 길이 있는 것 같다.”
플레이어들은 자신들끼리 부딪치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을 벌리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장님이 초행길을 걷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익숙해진 뒤에야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20층까지 왔다면 감각을 어느 정도 단련한 상태일 텐데. 시각에 저렇게 의존을 하고 있다고? 말이 되나?’
다만, 연우는 그런 플레이어들이 쉽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단순히 시각 하나 차단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더듬거리는 것일까.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벌린 채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저래서야 누군가와 싸울 때. 아니면 시련을 극복할 때에 돌발 상황으로 눈이 멀어지게 되면 제대로 대처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로 간에 몸을 멀찍이 떨어뜨리는 건, 감각 영역이 겹치면 혼란스러워지니 조심하기 위한 차원인 것 같은데. 그런 모습도 한심스럽기만 했다.
자신의 감각 영역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로 어떻게 그 많은 시련들을 통과한 건지. 이해를 못할 정도였다.
연우는 순보를 밟아 그런 녀석들 사이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
“뭐가 지나갔어?”
“바람 아냐?”
멀어지는 녀석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순보에 속도를 더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어귀에 있던 사람들과 비슷한 광경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사실 연우는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연우가 한심해하는 것과 다르게 다른 플레이어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지나면서 봤던 몇몇 플레이어들 중에는 세미 랭커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꽤 괜찮은 실력자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시각 정보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외부 정보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비록 플레이어가 되어 여러 수련을 거치면서 다른 감각들의 상승으로 그 비중이 커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시각 정보에 의지하는 비중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편을 겪는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산에서부터 많은 플레이어들이 고역을 면치 못하는 것이고.
실제로 20층의 시련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 중 절반 이상이 첫 번째 산에서 발이 묶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만, 그들도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고, 실제로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아 다음 산으로 넘어갔다.
방법은 간단했다.
바로 적응이었다.
그래도 20층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자질과 재능, 감각을 지니고 있다는 뜻.
그렇다 보니 시각이 차단되었어도 처음에만 불편을 느낄 뿐.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 나가며 산을 오르는 속도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시각에만 의존했던 버릇을 버리고, 다른 감각을 세밀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때 흔히 강해지는 감각이 청각.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다음 산에서는 청각을 닫음으로써 다른 감각을 더 세밀하게 다룰 수 있도록 만든다.
그다음에는 후각과 미각의 순서대로 이어지다, 촉각까지 닫히면서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되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그럴 때마다 더 많은 적응의 기간을 필요로 한다. 물론, 식량을 구하는 건 알아서 처리해야 할 몫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렇듯 여러 힘든 과정들을 모두 헤치고 나왔을 때. 20층을 통과했을 때에 플레이어들은 한순간 확 풀리는 감각 때문에 큰 현기증을 느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깊은 환희에 잠기곤 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여러 세계를 만끽할 수 있게 되니까. 감각도 그만큼 세밀해져 마력도 더 섬세하게 다룰 수 있고, 스킬의 컨트롤도 그만큼 세밀해져 높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20층은 얼마나 잘 적응을 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떻게 ‘버텨 내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불편을 감수하는 인내를 기르고, 한계마저 뛰어넘었을 때에 주어지는 환희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다른 층계들처럼 못 해낸다면 도태되기 마련이었지만.
다만, 연우는 이미 이런 과정을 처음부터 숱하게 겪었었기 때문에, 별다르게 다가오질 않았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해 냈다.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바로 다음 한계에 도전해서 다시 뛰어넘는 것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반복했다.
연우는 이미 하루하루가 늘 고행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게 익숙해져서 크게 자각만 하고 있지 않을 뿐. 20층이 주는 고행은 언제나 있는 일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으로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 연우는 너무 쉬워서 하품만 나오는 이 시련을 어떻게 해야 그 난이도를 높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음검을 수련할 수 있을 거란 부푼 마음을 안고 왔다가, 별다른 소득도 없이 실망만 잔뜩 얻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연우는 차라리 스스로에게 족쇄를 걸기로 했다.
입고 있던 모든 아티팩트를 인트레니안에다 집어넣었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환복하고, 손에는 크라슈나의 단검만 쥐었다. 가면도 처음 탑에 들어올 때 썼던 평범한 것으로 바꿨다.
그러자 여태껏 육체에 힘을 불어넣던 여러 옵션이 사라지면서 몸이 축 가라앉았다.
연우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외부로 넓게 확장시켰던 감각 영역을 축소시켜서 자신에게만 국한했다.
외부 정보가 사라지면서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던 모든 그림이 저절로 사라졌다. 선명하던 모든 게 사라지니 무거운 뭔가로 가슴을 꾹 누른 듯 저절로 답답해졌다.
마력회로도 걸어 잠갔다. 쉴 새 없이 유동하면서 육체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던 힘이 사라져 공허함만 남았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펼쳐지던 모든 스킬 작용이 사라지고, 용의 감각도 사라지면서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강한 연우를 이루던 모든 것을 벗어던졌을 때. 그를 외부로부터 보호하던 모든 장벽이 사라졌을 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크라슈나의 단검을 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임의로 마력회로의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경고! 외부로부터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릅니다. 마력을 운용하십시오.]
[임의로 감각을 차단했습니다.]
[임의로 스킬을 차단했습니다.]
[임의로…….]
……
털끝이 팽팽하게 섰다. 세포가 빳빳하게 일어나는 것 같았다. 허리가 저절로 쭈뼛 서서 주변을 쉴 새 없이 경계했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크게 방망이질을 쳤다.
그는 언제나 감각 영역을 활성화시켜 자신을 보호해 왔다. 그래서 외부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스스로를 보호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 사라지니 가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그저 조금 강한 인간밖에는 되지 않았다. 여전히 강한 육체적 능력은 남아 있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어디서 기습이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감.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앞으로는 어떤 위기가 닥쳐도 미리 예측하거나 인지하지 못하고 임기응변으로만 대처해야 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다. 탑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처음 열었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마치 처음에 기초 훈련만 받고 아프리카로 파병되었을 때 같았다. 눈 먼 총알이 수없이 날아다니고,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테러는 늘 죽음의 위기를 친구처럼 두게 했다.
지금이 딱 그랬다.
그래서 연우는.
‘이제야 조금 낫군.’
조금 기뻤다.
여태껏 새로운 힘을 얻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이지, 이렇게 육체를 처음부터 단련해 볼 생각은 한 번도 가지지 못했으니까.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시도해 볼 것을.
하지만 반대로 이런 것을 처음 시도해 보기 때문에 더 얻을 수 있는 게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연우는 적이 아주 많았다. 언제 어디서 그에게 원한을 품은 녀석들이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에 바짝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어떻게 보면 위험을 자초하는 것으로도 보이겠지만. 아니, 그것이 맞았지만.
연우는 도리어 크게 만족해하면서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 * *
공감각을 일절 차단시키고, 오로지 제한된 감각만으로 산을 오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돌부리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도 넘어져 굴러 떨어질 수 있었고, 자잘한 나뭇가지 따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몸에 생채기도 많이 남았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더듬거리면서 천천히 움직이긴 해도, 연우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일단 용체로 각성한 덕분에 스스로 제약을 걸어도 기본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들과 피지컬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체력은 두말할 것 없거니와, 코와 귀도 예민해서 웬만한 위험 요소는 특별한 문제가 되지 못했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육체적 제약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익숙해진다는 것 역시 연우가 어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래서 연우는 첫 번째 산의 정상을 찍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음검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단단히 주의하는 건 잊지 않았다. 발이 삐끗하기라도 하면 절벽 아래로 추락할 수 있었으니.
‘음검은 보통 무공들과는 현저히 궤를 달리해.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도저히 깊게 파고들 수가 없어.’
보통 무공은 크게 형(形), 식(式), 초(招), 의(意)라는 네 단계로 이뤄진다.
형은 형태를 뜻한다. 무공에 필요한 수십 수백 개의 세세한 동작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것들이 모여 의미 있는 흐름인 식을 이루고, 다시 식이 뭉쳐서 본격적인 힘을 발현하는 초를 형성한다.
그러다 초가 합쳐지면, 그 속에 숨겨져 있던 커다란 의미가 나오게 된다.
퍼즐이 따로 나눠졌을 때에는 무슨 그림인지 모르지만, 하나로 합쳐지면 커다란 그림이 되듯이. 무공이 가진 진짜 의미를 파악하면 그때부터는 다양한 응용과 변칙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음검은 반대였다.
순서가 역순이었다.
의, 초, 식, 형. 의미부터 먼저 파악해야만 음검을 이루는 전체적인 흐름을 짚을 수 있고, 점점 더 세밀하게 안쪽으로 파고들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안쪽에 있는 모든 끝자락을 잡았을 때. 비로소 그때부터 음검을 습득할 수 있었다.
‘보통 수련을 꾸준히 하면서 의미를 조금씩 깨닫기 마련인데. 이건 정반대니 도전할 엄두부터가 나질 않아. 게다가 내용은 스님들 선문답처럼 뜬구름으로 보일 뿐이고. 아니, 차라리 신화나 성경에 가깝나?’
-시초에 거인이 일어나 모든 것을 갈랐다. 위로 오른 것은 빛이 되어 아래를 비추고, 아래로 내린 것은 저들끼리 뭉쳐 세상을 단단하게 떠받쳤다. 그런 단단함은 경직을 불러와 오늘날의 세상을 구축하고, 꽃을 틔우면서 여러 개의 열매를 맺었으니…….
대체 여기 어디에 의미가 숨어 있고, 초식이 담겨 있다는 건지. 에도라가 익혔다는 양도의 내용은 모르지만 아마 이것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에도라는 대체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가 있었을까?
연우는 살짝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궁리에 잠겼다. 그는 어느새 첫 번째 산행을 끝내고, 두 번째 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번째 산에 입장했습니다.]
[두 번째 고행, 청각 차단이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