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49화 (149/862)

24화. 고행의 산 (3)

청각까지 닫힌 순간, 연우는 아주 잠깐 자신이 밀실에 갇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이 눈 다음으로 가장 많은 외부 정보를 받는 기관이 바로 귀. 거기다 이미 마력까지 닫았으니 의식이 꽉 닫힌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연우는 아주 잠깐 주춤거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 도움 없이 한 걸음이라도 옮기는 게 너무 위험했다.

첫 번째 산은 바람이 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나 갖가지 나무와 꽃냄새를 통해 거리를 분산할 수 있었다지만.

청각이 닫힌 지금은 아예 그럴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후각에만 의존한 채 움직인다는 것은 그만큼 미친 짓이었다.

촉각과 미각도 있다지만, 이 두 감각이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는 보통 직접 접촉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질 못했다.

이미 비슷한 상황을 A구획에서도 겪어 봤으니까. 당시에 제일 많이 성장한 감각은 사실 시각과 청각이었다.

때문에 바짝 긴장이 되었지만.

반대로 그만큼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연우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다시 익숙해질 때까지 음검에 대해 고민하는 건 미뤄야 할 것 같았다.

* * *

예상했던 대로, 후각에만 의존한 채 산을 오른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짓이었다.

냄새로 사물의 거리와 위치, 모양을 감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서 냄새가 짙어질 수도, 범위가 넓어져서 못 맡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최대한 상체를 아래쪽으로 낮추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장애물에 대비했다. 여기에 몇 번 능선 아래로 구를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 조금씩 해결 방법을 찾았다.

그건 크게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촉각이었다.

바람은 산자락을 타면서 여기저기로 부딪치고 꺾이면서 갖가지 냄새를 실어 온다. 예민해진 후각은 이것을 바탕으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대략적으로 감지하고, 촉각은 바람의 세기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다.

물론, 몇 안 되는 정보를 세세하게 분석해서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지만, 다행히 깊어진 사고 능력은 매번 빠르게 결과를 내놓았다.

그러다 잘못된 판단이 내려지면 이리저리 구르고 넘어지다가 수정되어 알맞게 안착되었다.

다만, 그 과정이 조금 험난해서 연우의 입에서는 처음으로 단내가 퍼졌다.

* * *

세 번째 산에 들어섰다.

코가 마비되었다. 여태껏 외부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던 마지막 주요 감각이 사라지자, 움직임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오로지 이리저리 부딪치며 날아온 바람을 피부로 느끼는 것만이 연우가 길을 읽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니,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는 건 하나 더 있었다.

‘각 물체가 가진 파장.’

두 번째 산을 겨우 넘어 아래로 내려올 때쯤, 연우는 촉각을 통해 아주 희미하게나마 이질적인 다른 뭔가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바람에 섞여 오는 수많은 것들이, 사실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느낌을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미세한 차이라서 크게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바람에 꽃가루나 비슷한 다른 뭔가가 섞여서 느끼는 것일 뿐이겠거니 하고 여겼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고,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가속화된 사고 능력으로 분석을 거듭하면서 분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것은 파문 모양으로 퍼지고 있었다. 어떤 것은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고, 또 어떤 것은 좌우로 좁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차이점들을 간파하고, 구분을 짓다 보니, 어느새 각 물체마다 독특하고 고유한 파장을 뿌려 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차이는 사고 능력을 가속화시키면서 촉각에 그만큼 집중하지 않으면 곧바로 놓쳐 버릴 만큼 아주 미세했다.

그래서 연우는 계속 전투 의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의식을 자신만의 세계에 가둔 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연우는 외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체크할 겨를이 없었다.

해가 지고 뜨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는 데다가, 가속화된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외부와 거의 유리되다시피 했으니까.

[‘전투 의지’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는 중입니다. 31, 32%…… 45, 46%…….]

[스킬을 유지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계속된 사고 가속으로 뇌에 막중한 부담이 갈 수 있습니다. 자칫 정신과 육체 간에 시간적 괴리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권고합니다.]

[스킬을 유지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사고 과부하에 잠길 수 있습니다.]

……

[위험합니다. 자동적으로 용의 지식에 접촉하여 사고 능력을 대폭 향상시킵니다.]

……

[‘전투 의지’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62.2%]

하루?

이틀?

어쩌면 한 달이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연우가 체감하는 시간은 그보다 한참이나 길었다. 사물이 뿌려 대는 고유 파장에만 의지한 채로 천천히 걷고, 또 걸었다.

사실 그건 연우로서도 조금 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그동안 오감을 여러 가지로 뒤섞는 공감각을 통해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빠르게 판단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마력을 넓게 퍼뜨리면서 사물을 판별해 공감각을 극대화시켰다.

언제나 그가 주체가 되어 감각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이를 통해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주변의 변화를 빠르게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언제나 활성화되었던 감각은 모두 닫혔고, 도움을 주던 마력도 스킬 유지 외에는 되도록 쓰지 않았다.

오로지 외부의 정보를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다. 피동적인 입장이 되어 주변 상황과 변화를 파악했다.

그러다 보니 여태껏 마력이나 오감으로도 감지할 수 없었던 파장이 보였다.

파장은 여태껏 연우가 살면서 느꼈던 것들과는 크게 이질적이었다.

각 물체가 뿌려 대는 고유 파장은 그 모양도 다 달랐지만, 세기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어떤 것은 무겁고, 어떤 것은 가볍고. 또 어떤 것은 빠른 것 같으면서 다른 어떤 것은 너무 느려서 미처 감지를 하지 못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공통적인 특징은 있었다.

강한 건 강하고, 약한 건 약했다.

아무리 높다란 나무라도 속이 썩어 문드러진 것이면 파장이 약했고, 작은 바위라도 단단하고 무겁다면 파장이 아주 강했다.

연우는 왜 그런 차이가 날까 고민을 하다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존재감.’

연우는 머릿속으로 개념을 정리해 나갔다.

‘사람과 사물은 누구나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

다른 말로는 기세라고도 한다.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자는 기세만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어. 위엄으로 다른 사람을 이끌 수도 있고. 반면에 존재감이 약한 자는 언제나 잡아먹히는 입장이 되지.’

생명체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이런 존재감을 감지할 수가 있다. 상대에게서 풍기는 존재감에 악의가 섞이면 자기도 모르게 위압감이 들거나, 상대와 나의 차이를 빠르게 판단 내리는 게 바로 그런 대표적인 예였다.

연우가 지금 감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존재감이었다.

‘하지만 보통 생명체가 느끼는 존재감은 다른 감각적 정보도 뒤섞여서 혼탁해.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근본이야.’

[계속된 단련을 통해 영혼을 일부 감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압(靈壓)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더 많은 단련을 통해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룰 것을 권고합니다. 영압을 깨달아야만 격을 이룰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게 영압이란 건가?’

영압에 대해서는 연우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강한 영혼일수록 풍기는 파장은 커지기 마련이며, 격이 상승할 때마다 파장은 무게까지 더해져 공간을 짓누르기까지 한다.

쉽게 말해, 영압이란 영혼의 무게라 할 수 있었다. 격을 갖춘 자들이 반드시 이뤄야 하는 힘. 그리고 상대의 영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하이 랭커가 싸움에 임할 때 가장 먼저 밟아야 하는 수순이었다.

여태껏 연우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하면서 그런 강렬한 것들을 느껴 오기만 했다.

특히 무왕과 여름여왕 같은 절대자들이 내뿜던 위용은 등골을 서늘하게까지 만들었다.

덕분에 격이 높은 존재들에 대해 파악하는 건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반대로 격이 한참 낮은 것들에 대한 건 그렇지 못했다.

보다 작은 것을 느낄 수 있어야. 아주 세밀하게 파고들 수 있어야 상대의 근본을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뜻하지 않게 감지 범위를 넓힐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래서 연우는 더 세세하게 각 물체들의 내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파장을 통해 물체가 어떤 상태인지 대략적인 유추를 할 수 있었다. 아직 시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생명체가 가지는 사고 판단도 어느 정도 파문으로 유추하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정보 창이나 용마안으로 파악할 수 없었던 범위까지. 겉이 아닌 속까지 더 깊숙하게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파장에 자극을 받을 때마다, 점차 적응이 되면서 사고 속도도 빨라짐에 따라, 연우의 내부에서도 뭔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상황에 놓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단순한 위기감이었지만, 영압을 세세하게 구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위기감도 세밀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위기감은 보통 살아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본능에 가까운 감각이기 때문에 위협이 있을 때 빠르게 감지해서 몸을 반사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오감과는 전혀 별개인 감각.

평소에는 절대 인위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감각이 아니었지만, 기회가 주어진 지금이라면 충분히 단련을 해서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 경험을 통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감각을 의지만으로 다룰 수 있다면.

또 다른 시야가 열릴 것이라는 걸.

* * *

「오? 벌써 육감을 단련하고 있다고? 여유가 났을 때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단련할 줄이야.」

연우는 처음으로 허기가 지자 근처의 작은 토굴에 자리를 잡고, 인트레니안에서 식량을 꺼내 가볍게 끼니를 때웠다.

그리고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서 샤논과 한령을 소환해서 대화를 나눴다.

수련은 누군가의 피드백이 있을 때에 더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샤논과 한령은 무술에 있어서는 연우보다 월등히 뛰어난 경지를 디뎠던 자들. 자신이 지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게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육감?’

두 데스 나이트와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은 육성이 아닌 심어로 대화를 하는 존재들이었으니까.

연우도 이들과의 연결 고리로 생각만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샤논은 연우의 반문에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새 잊었나? 허초를 파악해야 할 때에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고 했던 감각.」

‘기억나지, 당연히. 다만, 이게 육감일 줄은 몰랐어. 그저 영압을 이용한 기술로만 생각했으니까.’

「영압?」

샤논이 그게 무슨 뜻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연우는 자신이 터득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했다. 최근에 감지하기 시작한 물체의 파장, 영압. 그리고 영압을 역으로 이용해서 새로운 감각을 깨운 것까지.

그런데 설명이 이어질수록, 샤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말은 하지 않아도 사념이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은 딱 하나. 경악.

연우는 이해를 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육감을 깨달았다면 좋은 것인데, 왜 저런 사념을 풍기는 거지?

그래서 한령 쪽으로 의식을 돌렸는데.

「…….」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한령은 더 깊은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뭔가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진중한 성격인 그도 사념이 살짝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한령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확실히 육감이 본능과 무의식을 이용하는 것이니 만큼, ‘영력(靈力)’으로 가는 관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순서를 반대로 짚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이런 미친……!」

연우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눈살을 찌푸렸다.

‘둘 다 쉽게 설명해. 영력은 또 뭐지?’

한령이 고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압이 격에 따라 성장하는 영혼의 무게라면, 영력은 거기서 파생되는 힘을 뜻합니다. 흔히 마나 스트림에서 마나를 끌어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영력이기 때문에, 영력이 강할수록 마력의 등급도 높기 마련이지요.」

한령이 말을 이어 나갔다.

「다만, 이 영력은 철저한 무의식의 영역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깊숙하게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경지가 오르면서 이것을 열고자 하고, 그러기 위해서 무의식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육감을 열게 됩니다.」

육감은 본능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에 위치한다.

육감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다면, 비로소 무의식을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다만, 무의식은 전체 의식 중에 80%를 달할 정도로 너무나 깊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자칫 잘못 다뤄서는 자아가 망가지거나, 입마에 빠질 염려도 크기 때문에 아주 조심히 다루지요.」

연우는 한령의 말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무의식에 들어야만 비로소 영혼에 닿을 수 있고, 그때부터 아주 조금씩이나마 영력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나는 관문도 열지 않았으면서, 영력을 이용해 거꾸로 안쪽에서 관문을 열어 버린 셈인가?’

샤논의 새된 비명 소리가 퍼졌다.

「그게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건, 어? 쉽게 말해서 그런 거라고. 너, 건물에 들어갈 때 어떻게 해?」

‘뭘 어떡해? 당연히 정문으로 들어가겠지. 방해꾼이 있으면 치울 테고.’

「그래.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쪽문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겠지? 그런데 너, 주인, 인마. 너는 지금…….」

소드 브레이커를 잡고 있는 샤논의 손길이 부르르 떨렸다.

「먼저 옥상으로 훌쩍 뛰어넘어 갔다가, 도로 1층으로 내려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 *

[98층의 여러 신과 악마들이 당신을 신기한 눈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몇몇 신들이 허탈하게 웃습니다.]

[몇몇 악마들이 당신을 두고 진지한 논의를 나눕니다. 누군가가 강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헤르메스가 흐뭇한 미소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우르드가 분노 섞인 눈빛으로 당신을 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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