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1화. 오행산 (1)
연우는 순간 뭔가 자신이 착각을 했나 싶었다.
그의 상식으로 칸은 절대 여기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도일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겠다면서 리타이어를 했던 녀석이, 여기서 나타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튜토리얼이 새롭게 열렸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기질이 비슷한 녀석인가 싶었지만.
『카인! 카인 맞지?』
반갑게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녀석은 칸이 분명했다.
『음? 뭐야? 막내 녀석이 아는 사람이었어?』
『으흐흐. 그럼 더 좋은 거 아냐? 더 많이 부려 먹을 수 있단 뜻인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다른 목소리들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연우의 정신은 칸에게 쏠려 있었다.
『정말 카인 맞네. 야! 너 어떻게 여기에 온 거야? 이야아. 뭐야. 때깔도 좀 좋아졌는데?』
칸은 연우의 주변을 뱅글뱅글 맴돌면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우는 살짝 눈살을 찡그렸다. 경망스러운 태도를 보니 칸이 확실했다. 정신 사납게 만드는 건 여전했다.
그러다 어떻게 녀석에게 말을 건네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어기전성. 의념을 실어서 전달하는 어떤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원리만 알면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초감각은 안에만 내재되어 있는 육감을 밖으로 방출하는 행위. 자아를 해방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의념을 내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연우는 감각을 세밀하게 조절해서 칸에게 집중시키고, 거기다 의념을 구체화해서 실으려고 했다.
칸은 그런 연우의 기색을 느꼈는지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달랬
『야. 야. 보니까 이제 의념 형성을 깨달은 것 같은데. 이걸 구체화하려면 좀 어렵…….』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지만 너는 해내네. 그렇지. 너는 원래 그런 놈이었지.』
칸은 어느새 어기전성을 구현하고 있는 연우를 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념을 집중시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스킬 ‘어기전성’이 생성되었습니다.]
[어기전성]
숙련도: 0.0%
설명: 의념을 집중해서 특정 대상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 숙련도에 따라서는 다양한 변칙적 활용도 가능하다.
연우는 메시지를 아래로 내리고, 칸을 확인했다.
산발처럼 마구 헝클어뜨린 머리칼. 거적때기 같은 옷. 날이 다 빠진 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산에 있었던 건지 전체적으로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기세가 숨겨져 있었다.
튜토리얼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자신을 제어할 줄 모르는 미숙함이 숨겨져 있었다면, 지금은 자신을 잘 갈무리할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칸은 다시 반가워하는 얼굴이 되어 연우를 얼싸안았다.
『그러게. 크!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은 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만날 줄은 몰랐다고, 브로(Bro).』
브로. 녀석이 심심하면 입에 담던 단어. 확실히 칸이 맞았다.
『너 그동안 제법 많이 유명해졌더라? 튜토리얼에서도 사고 많이 치고 다니더니. 어? 여기 와서도 사고 치고 다니고. 크크.』
쫑알쫑알. 말도 여전히 많다.
연우는 집중이 흐트러질까 봐 감각을 세밀하게 조절했다. 어기전성을 능숙하게 사용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도일은 어디에 있고?』
『그게…….』
칸이 조금 묘한 표정으로 뭐라고 설명을 하려는데.
『흐흥. 막내야. 너만 인사 나누고, 우리는 소개 안 시켜 주려고?』
콧소리가 살짝 섞인 간드러지는 목소리. 애교가 가득한 여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칸은 가증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할망구. 얘한테 무슨 되도 않는 짓을 할 거면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 으갸갸갹!』
칸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벼락은 그 뒤로 몇 번 더 내리쳤다.
우르르, 콰쾅!
『그, 그만! 그만하라고!』
『호호호. 쓸데없는 소리 한 번만 더하면 그 주댕이를 찢어 놓을 줄 알아라. 알겠니?』
『……넵!』
칸은 재빨리 허리를 쭈뼛 세우면서 우렁차게 대답했다.
연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초감각을 열어 놓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떨어진 낙뢰. 비록 위력을 조절했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절대 가볍지가 않았다.
‘룬 마법.’
신대 문자인 룬어를 사용한 마법은 아주 까다로울 텐데. 그걸 이렇게나 말끔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탑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리로 데려오렴.』
칸은 연우에게 눈치를 줬다. 같이 좀 가 달라는 신호.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녀석은 여전했다.
* * *
초감각이 열린 뒤로, 더 이상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빠르게 칸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그의 성격상 그냥 가자고 하면 가지 않았을 테지만. 다섯 번째 산에 머무는 사두들이 어떤 사람들일지 내심 궁금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 꽤 강해졌는데.’
연우가 칸의 뒷모습을 보면서 느낀 생각은 딱 하나. ‘어떻게?’라는 것이었다.
사실 연우가 봤을 때, 지금 칸이 이룬 성취는 말이 안 될 정도였다.
잘 갈무리된 기세 속에 웅크려진 힘은 아주 날카로웠다. 지금은 검집에 담겨 있는 것처럼 조용하지만, 한 번 검집을 나오면 크게 휘몰아칠 것 같았다. 혈검이라는 별칭이 아깝지 않을 만큼.
튜토리얼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진 성취. 그건 분명히 좋은 일이었다.
칸은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높은 향상심을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용종의 축복이라는 어드밴티지를 갖고서 빠른 성장을 이룬 자신과 다르게, 칸은 사실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만한 성취를 이뤘다면?
그만큼 각고의 노력을 했다는 뜻이겠지.
물론, 칸이 지금 연우보다 강하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판트와는 겨뤄 볼 만할 정도로 성장한 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판트가 위험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판트와 에도라를 꺾어 보고 싶어 하더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새롭게 열린 튜토리얼을 통과하고, 쉬지 않고 탑을 공략하면서 부단히도 수련을 했을 게 분명했다.
층계를 이렇게 빨리 통과해서 연우보다 먼저 20층에 와 있던 건, 연우가 11층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에 이뤄진 것일 테고.
그래도 바깥일에서 완전히 관심을 거둔 건 아니었는지, 연우가 그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야. 근데 넌 그동안 대체 뭘 먹고 살았기에 이렇게 강해진 거야? 뭘 읽을 수가 있어야지. 혹시, 어디서 용이라도 잡아먹은 거 아냐?』
연우가 칸을 보면서 신기해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칸은 연우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위아래로 훑었다.
질려 하는 기색도 역력했다.
「흐흐. 저 느낌이 뭔지 내가 아주 잘 알지.」
샤논이 실실 웃어 댔다. 녀석은 칸이 나타날 무렵에 검은 팔찌가 아니라 그림자 속으로 숨은 상태였다. 연우가 감지한 사두들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연우는 속으로 샤논에게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고, 칸에게 말했다.
『반쯤 용이 되긴 했지.』
『……재미없거든?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농담할 줄을 몰라.』
칸은 연우가 한 말이 진실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사이, 두 사람은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정상에는 이미 연우가 올 걸 느끼고 있었던지, 곳곳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연우를 맞은 사람들은 둘. 칸을 포함하면 셋이었으니, 연우가 처음 감지한 다섯 사람 중 절반은 모여 있는 셈이었다.
『흐응. 가면?』
『호오. 그런데 옷차림이 아주 평범한걸. 수련을 쌓을 생각으로 왔나?』
한 명은 새하얀 은발을 발목까지 늘어뜨린 여인이었다. 전체적으로 몸매의 굴곡이 심하고, 가슴이 풍만해서 요염함을 폈다. 주요 감각을 닫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색기가 강하게 흘렀다.
그녀를 따라 갖가지 마법이 상시적으로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룬 마법. 방금 전에 칸에게 떨어졌던 벼락을 부른 마법사가 분명했다.
반면에 다른 한 명은 키가 아주 작은 남자 아이였다. 방실방실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지만 연우는 달리다 말고 아주 잠깐 흠칫거렸다.
연우가 초감각을 열었을 때 감지했던 두 하이 랭커. 그중 한 명이었다.
남자 아이는 악동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맹렬하게 사나운 뭔가가 담겨져 있었다. 맹수 같았다.
다만, 무왕과 차이점이 있다면, 무왕은 들판을 호령하는 백수(百獸)의 왕 같다면, 남자 아이는 그것과 정반대로 혼자서 숲 속을 나돌며 먹이를 찾는 야수에 가까웠다.
아니, 흉포함만 따진다면 악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억지로 눌러 담긴 했지만, 맹렬한 기세는 가다듬어진 구석이 전혀 없었다.
마기(魔氣).
흔히 악마들이 주로 다룬다는 기운. 그것이 도사리고 있었다. 웃고 있는 낯이 싹 사라진다면, 마기가 바로 튀어나올게 분명했다.
‘붉은 신목(神木) 빅토리아와 역귀 킨드레드.’
연우는 일기장을 토대로 두 사람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빅토리아는 룬 마법에 능통한 마법사 겸 주술사였다. 신의 문자라고 불리는 룬은 사용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편이었다.
뜻이 박힌 글자를 통해 법칙을 구성하기 때문에, 획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마력 유동이 쉽게 흔들리고, 룬의 조합이 잘못 되면 큰 부작용이 따를 때도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통달을 하게 되면 여러 방면으로 쓸 수 있었다.
대부분의 아티팩트 제작자나 버퍼들이 룬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로 통달하게 된다면?
보통 마법사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낼 수가 있었다. 빅토리아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명성은 자자했지만, 동생과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어서 여기에 있는 게 신기한 랭커였다.
반면에 킨드레드는 달랐다.
이름도 모를 마신을 신봉한다는 광신도 집단, 마군(魔軍). 녀석들은 마신의 뜻을 집행한다는 대주교 아래에 9명의 주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녀석들은 저마다 마신을 떠받드는 방식이 달랐다.
킨드레드는 그중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2번째 주교로, 주로 20층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뭔가를 계속해 찾는 중이었다. 마군 출신인 친구 녀석 말로는 어떤 성유물과 관련이 있다고 했었는데, 단순한 추측일 뿐, 정확한 내막은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그 물건을 찾기 전까지 킨드레드는 절대 20층을 벗어날 생각이 없다는 것.
우리가 통과하고, 나설 때까지. 마군과 전쟁을 치를 때까지도 녀석은 얼굴 한 번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까. 정체를 알게 된 것도 우연한 계기가 전부였었다.
‘그런데 아직도 있단 말이지. 알려진 것만 벌써 10년이 넘을 텐데. 이렇게 불편을 겪으면서까지 찾는 물건이 뭘까?’
연우는 킨드레드에게 깊은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녀석이 마군의 주교라는 건 비밀인 데다가, 괜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게 했다가는 앞으로의 계획이 꼬일 수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되도록 킨드레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반가워, 잘생긴 오빠.』
와중에 고맙게도 빅토리아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녀는 연우가 근방까지 오자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녀 역시 앞이 안 보일 텐데도, 마치 앞이 보이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중이었다.
바람을 타고 희미한 박하 향도 섞여 왔다. 뭇 많은 남자들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향기였지만.
칸은 그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가면 쓰고 있는데 뭘 보고 잘 생겼다는 거야? 그리고 얘랑 할망 나이 차이를 알기나 하…… 쿠엑!』
칸은 갑자기 눈앞에서 터진 불덩이에 얻어맞고 산비탈을 따라 데구루루 굴러갔다.
『호호. 너는 다른 건 다 좋은데 그 쓸데없는 주둥이가 문제라는 걸 알아야 해. 알겠니?』
빅토리아는 송곳니를 살짝 드러내면서 웃었다. 그녀를 따라 사라진 룬의 잔상이 작은 입자가 되어 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연우는 다시 눈을 반짝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미처 마법이 발동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룬이 사라진 순간, 곧바로 법칙이 뒤틀리면서 마법이 발현되어 칸을 후려친 것 같았다.
‘미리 룬을 준비해 두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는 건가?’
연우는 감각을 세밀하게 좁혀 빅토리아의 오른쪽 손목에 감긴 팔찌를 살폈다. 팔찌의 표면에는 아주 작게 룬 문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분명 불덩이를 소환할 때 즈음, 그녀는 검지로 팔찌를 훑었다. 그러자 팔찌에서 글자 하나가 사라지면서 마법이 발현되었다.
보통 마법사들이 위기 시에 빠른 마법 발현을 위해 미리 숙지해 놓는 스킬, 메모라이즈를 응용한 아티팩트인 것 같았다.
‘확실히. 빅토리아는 룬 마법에 능통한 만큼, 뛰어난 아티팩트도 잘 만든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듣기로 세공술 하나만으로도 헤노바와 같이 5대 명장에 꼽힌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메모라이즈 방식으로 미리 저장해 놨다가,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꺼낼 수 있는 마법이라. 저런 거라면 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여러 전투를 겪고, 매번 시련을 공략하면서 느낀 점은 단순히 스킬이나 육체적 능력에만 의존할 건 아니란 점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마법이나 정령술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마력회로의 사용도 무공에만 국한하기에는 너무 낭비였다.
다만, 무공에 집중하기에도 너무 바빠서 마법에까지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만약 저런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무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마도공학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했기도 하고. 현자의 돌이든, 회중시계든, 수리를 하려면 더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훔쳐 배울 수라도 없을까 싶었는데.
『흐흥. 잘생긴 오빠. 탐구심이 많은 건 좋은데, 자꾸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내가 부끄럽다구.』
『……!』
연우는 갑자기 바로 코앞에 빅토리아가 싱긋 웃으면서 나타나자 화들짝 놀라 크게 떨어졌다.
방금 전 연우가 있던 자리에 빅토리아가 요염하게 웃으면서 서 있었다. 그러지 말라며 한쪽 눈을 다시 찡긋거리기까지 한다.
연우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날, 읽었어.’
룬 마법의 작용을 확인해 볼 수 있을까 싶어 의식을 집중했었는데. 그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긴 연우보다 더 예민할 게 분명한 육감을 넓게 퍼뜨리고 있는 사람인데. 그걸 파악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연우의 간담을 더 서늘케 하는 건, 자신의 감각이 읽혔다는 것보다 상대가 너무 쉽게 근처까지 접근했다는 점이었다.
그녀를 따라 또 다른 룬이 사라지고 있었다. 블링크(Blink). 좁은 거리를 단번에 이동시켜 주는 마법이었다.
초감각을 열었어도 그것을 아주 쉽게 가르면서 나타난다. 마법은 이런 점이 무서웠다. 법칙을 직접 건드리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현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막을 방법은 단 하나. 마법이 펼쳐지기 전에 마법사를 빠르게 제거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빅토리아를 보니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를 따라 감도는 이질적인 기운들. 위험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발현될 방어용 결계가 틀림없었다.
문제는 이런 빅토리아마저도 다섯 번째 산에 있는 다섯 사두 중에서 칸을 제외하면 가장 약한 힘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마굴이 분명했다.
그나마 좋은 점을 딱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딱 하나.
이런 괴물들이 머물고 있을 만큼, 이곳이 수련하기에 알맞은 장소라는 것. 연우는 바로 여기에 당분간 머물면서 음검을 수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와 있는 세입자들에게 잘 보여야겠지. 이런 사람들 틈에 섞여 있으면, 그들이 지나가면서 툭툭 던지는 한 두 마디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룬 마법은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해서 그만.』
연우의 사과에 빅토리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
『흐흥. 그런 거라면야. 그래도 앞으로 조심하라구.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이라서 자기들 훔쳐보는 거에 되게 예민하거든. 그런데 룬 마법에 흥미가 있나 봐?』
『예. 조금.』
『그럼, 가르쳐 줄까?』
이렇게 쉽게 가르쳐 주겠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기에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연우는 이유 없는 선의는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빅토리아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빅토리아도 그런 연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걱정 말라는 듯이 씩 웃었다.
『물론, 공짜로는 안 되지. 딱 한 가지 조건이 있긴 해.』
『뭡니까?』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
빅토리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맛있는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강렬했다.
『혹시 우리 집에서 라면이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