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오행산 (2)
맹렬하게 반짝이는 눈. 남자를 유혹하는 눈빛이었다. 웬만한 남정네들이라면 가슴이 두근거릴 만하지만.
‘이 세상에 라면이란 게 있었나?’
연우는 별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만약 있다면 먹어 보고 싶긴 하다는 생각도 같이. 한국 음식이 귀한 아프리카에서 연우가 가장 애타게 찾던 음식이 라면이었다.
『으으. 아파 죽겠네. 야! 카인, 그 할…….』
『씁!』
『……누님한테 속지 마. 아마 뜨거운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해 놓고, 바로 묶어 놓은 다음에 너를 실컷 모르모트로 부려 먹을 걸?』
칸이 시커멓게 탄 얼굴로 다시 올라오면서 말했다. 빅토리아의 도끼눈에 도중에 말까지 바꾸면서.
빅토리아가 농염하게 웃었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잖아? 뜨거운 밤은 보냈었다고.』
『그리고 황천 갈 뻔했지.』
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연우더러 저 겉모습에 절대 속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연우가 가볍게 피식 웃었다.
『너는 당했었나 보군.』
『크흠! 그런 건 대충 넘어가고.』
칸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연우의 말을 흘리고, 고개를 돌려 빅토리아를 바라봤다.
『하여간 다들 이 친구는 괴롭히지 마. 나한테는 은인이기도 하니까.』
빅토리아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유혹하는 눈빛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호기심이 자리 잡았다.
『흐응? 그럼 설마 이 오빠가?』
『어. 맞아. 그때 말했던…….』
바로 그때였다.
여태껏 나무 꼭대기에 앉아 말 없이 묵묵히 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아이, 킨드레드가 가볍게 나뭇가지를 박차면서 연우가 있는 쪽으로 날아들었다.
쐐애액-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로 멀리 물러섰다.
‘갑자기 왜? 내가 누군지 들키지는 않았을 텐데?’
초감각의 옵션으로 달성되어 있는 자동방어기제 덕분에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동시에 여태껏 봉인시켰던 마력 회로가 가동되었다. 360개의 코어가 맹렬하게 돌아가면서 마력을 한껏 방출시켰다.
화아악-
연우를 따라 마력 폭풍이 동심원 모양을 그리면서 산자락 전체를 뒤덮었다. 초감각의 영역 안쪽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마력과 초감각이 한데 뒤섞이면서. 더 세밀하고 위압적인 힘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산을 뒤덮고 있던 영역 안에서.
연우는 여태껏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한 세상을 직관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의 내부를 보는 것처럼 모든 게 선명했다. 마나가 흐르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만큼 아주 세밀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세세하게 읽혔다.
칸은 연우의 감각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것이 훨씬 더 무거워지자 경악했다.
여태 마력이 실리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마력 속에 섞인 열풍은 대기가 지글지글 끓을 정도였다.
빅토리아는 다시 한 번 더 블링크를 써서 그들이 있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마력 폭풍이 너무 놀라웠던 건지, 아니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눈치챈 건지, 방어용 결계를 다섯 겹이나 두르면서 충격에 대비했다.
연우 앞까지 다가온 킨드레드는 살짝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다 곧 재미나다는 듯이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라 웃고, 마치 고양잇과 짐승처럼 다섯 손가락을 가볍게 구부리면서 크게 휘둘렀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시험해 보기만 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정도라면 조금 더 실력을 확인해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이 찢겨져 나갔다. 찢긴 다섯 개의 틈 사이로 붉은 칼바람이 불면서 연우의 전신을 날려 버리려 했다.
그런 갖가지 행동과 생각들이 속속들이 읽혔다. 그들이 내뿜는 사념도 엿보였고, 행동 방향도 보였다.
그런 갖가지 정보들이 한데 뒤섞이니, 그다음에는 곧이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절로 ‘예측’이 되었다.
예측이라.
연우는 이것이 바로 초감각이 주는 가장 큰 효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와 환경을 전부 한꺼번에 읽어 내면서 다음 상황을 추론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역으로 선점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다음 공격을 짐작하기 힘든 허초를 파훼하기 위해서는 육감을 깨달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그보다 월등히 뛰어난 초감각은 더 세밀한 계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우가 이곳에서 터득한 넘버링 스킬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느낌인데. 만약에 남은 오감까지 전부 개방하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살기는 없어. 그냥 날 시험하려는 거야. 그렇다면!’
팟-
예측은 끝났다. 역공을 위한 계산도 끝났다. 전투 의지를 이용한 신속한 판단, 그 뒤에 이어질 마력회로를 이용한 과감한 공격까지. 전부 연우가 자랑하는 주특기였다.
연우를 따라 퍼져 나간 시뻘건 열풍이 아지랑이와 함께 푸르게 변하면서 불의 날개가 되어 그를 감싸 안았다.
동시에 크라슈나의 단검을 상수로 쥐면서 옆으로 크게 휘저었다.
성화가 화려하게 폭발했다.
콰아앙!
킨드레드가 내리그었던 공격이 갑자기 부서져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지체하지 않고 허공에서 몸을 팽이처럼 뒤틀면서 오른손으로 연우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연우는 옆으로 몸을 틀면서 크라슈나의 단검을 연거푸 찔러 넣었다.
팔극권의 숙련도가 50%를 넘으면서 어느새 갖가지 연계기(連繫技)도 가능해진 상태였다.
쉬쉬쉭-
퍼퍼펑!
연우가 빠르게 휘몰아친 검이 킨드레드의 손날과 연거푸 부딪치면서 폭발도 같이 일어났다.
워낙에 강렬한 성화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 폭발과 함께 일어나는 불똥 때문에 칸은 훨씬 더 멀리 뒤로 떨어져야만 했다. 빅토리아는 한 겹 더 결계를 둘렀다.
콰아앙!
그러다 킨드레드가 쳐올린 어퍼컷을 옆으로 쳐 내는 것과 함께 연우의 몸뚱이가 뒤로 크게 주르륵 밀렸다.
우웅, 웅-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오른손은 크게 찢어져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크라슈나의 단검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크게 휘었다.
그만큼 킨드레드가 휘두른 공격에 포탄이라도 연속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땅이 내내 울리는 마당에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으니까.
만약에 초감각으로 단련된 투로 예측과 전투 의지를 이용한 사고 가속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버틸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이 이상으로 가게 된다면 자신의 밑천을 전부 내보여야만 했다. 그리고 설사 그런다고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킨드레드는 재미난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씩 이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어 댔다.
분명 겉보기엔 귀여운 모양이었지만, 연우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마치 탐욕스러운 악마가 혀로 입맛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다.
상대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저 정도면 한령의 전성기 때라고 해도 안 될 것 같은데. 킨드레드가 이렇게 강했었나?」
그림자 속에서 연우의 싸움을 지켜보던 샤논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킨드레드가 입을 열었다.
『기습을 펼쳤는데도 막을 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호오. 제법이로구만.』
시험은 끝났다.
그래도 연우는 이상하게 안심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빈틈을 보이면 킨드레드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킨드레드는 줄줄 흘려 대는 투기를 전혀 거두지 않은 채.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면서 물었다.
『그런데 자네, 검무신과 무슨 관계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
연우는 아주 잠깐 킨드레드와 검무신 사이에 어떤 연관이나 접점이 있나 생각해 봤다. 하지만 일기장에 그런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라고는 못할 텐데. 자네가 펼치던 검술. 조금씩 변형된 부분은 있어도 분명 검무신의 것과 똑같았어.』
연우는 그제야 킨드레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잘못 알고 계십니다.』
『무슨…….』
『제 스승님은 무왕이십니다.』
이번에는 킨드레드가 눈을 크게 떴다. 이제 상황이 끝났나 싶어 이쪽을 보고 있던 빅토리아와 칸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여태 연우가 보였던 실력보다 더 놀란 눈빛.
『무왕? 설마 외뿔부족의?』
『그렇습니다.』
『흠. 그렇다면 말은 되는군. 원래 검무신, 그놈도 무왕에게서 진전을 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놈’ 이후로 다시는 제자를 거두지 않을 거라고 큰소리치던 놈이 새로운 제자라…….』
연우는 킨드레드가 말한 ‘그놈’ 이 무왕이 말하지 않았던 두 번째 제자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무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관계일까. 친분? 악연? 지금 킨드레드의 태도로 봐서는 어떤 관계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킨드레드는 아주 잠깐 고민에 잠기다가 자세를 풀고 뒷짐을 졌다.
투기는 가라앉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잔재 기운은 남아 대기 중에 둥둥 떠돌아다녔다.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까무러쳤을 만큼 살벌했다.
『의념을 이제 막 깨우쳐서 얼마나 실력이 있을까 싶었었는데. 아무래도 기본기는 있는 모양이군. 막내가 침이 튀도록 칭찬할 만해.』
킨드레드는 칸이 뭔가를 말하자마자 곧장 연우에게 달려들었다. 대체 칸은 그동안 연우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했던 걸까?
『너도 혹시 이곳 오행산에서 수련을 할 생각이냐?』
아무래도 이 다섯 번째 산에서 실질적인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건 킨드레드인 것 같았다.
어쩌면 그에게서 뭔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연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좋아. 합격.』
킨드레드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훌쩍 떠났다.
다행히 같이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은 받았지만. 빅토리아와 킨드레드를 겪어 보니 아무래도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리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어중이떠중이면 아마 받아들이지도 않았을걸? 저 양반, 자기 성에 안 차면 바로 쫓아 버리거든.』
칸은 연우에게 그가 머물 만한 곳을 소개해 주겠다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헤어지기 전에, 빅토리아는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었다. 정말 뜨거운 밤을 같이 나눠 보자면서. 물론, 연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사두들은 원래 다 저런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데.』
칸은 연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가볍게 웃었다.
『아니. 아마 네가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가 맞아. 개인주의적이고, 금욕적이면서, 외부와는 일절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는. 대부분 자기 수련에나 집중하지, 다른 사람들 일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아 해. 나타나지 않은 다른 두 사람만 봐도 알잖아?』
『그럼, 킨드레드와 빅토리아는?』
『두 사람도 같아. 원래 오지랖 넓게 안 굴어. 자기들이 간섭받는 것도 엄청 싫어하고. 다만, 저 두 사람은 여기 너무 오랫동안 있었던 터줏대감들이라. 조금 심심한지, 신입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때만 잠깐 관심을 가져.』
『그렇군.』
『어. 다만, 킨드레드는 근처에 수준 낮은 수행자가 오는 걸 극도로 혐오해. 꼴통이 옆에 있으면 자기도 같이 꼴통이 된다나? 그래서 꽤 많은 놈들이 쫓겨났었지.』
덕분에 내가 지금 막내 생활을 하고 있는 거고. 칸은 그렇게 작게 중얼거렸다.
‘정확하게는 어중이떠중이가 와서 방해받는 게 싫은 거겠지.’
연우는 킨드레드에 대한 말을 속으로 삭였다.
『그래도 다들 나쁜 사람들은 아니니까 걱정 마. 방해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친인으로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지나가면서 던져 주는 조언들도 도움이 될 때가 많아. 나도 덕분에 꽤 빨리 강해질 수 있었고.』
연우는 칸이 왜 이렇게 갑자기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저런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다 보면 발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지.
『탑에는 언제 들어온 거지?』
『음. 얼마 안 됐어. 대략 두 달 전쯤? 여기 올라올 때쯤엔 네가 한창 레드 드래곤에 들어가서 뛰어다닌다는 말을 들었었고.』
연우가 탑에 들어온 지도 벌써 제법 시간이 흘렀다. 예상했던 대로 전쟁에 집중하는 동안, 새로운 튜토리얼이 열렸었던 모양이다.
『야. 근데 네가 남긴 기록들은 죄다 말이 안 되더라. 명예의 전당에 비공개라고 적힌 1위 기록들. 그거 전부 너 맞지?』
연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때문에 올라오는 내내 기록을 갱신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그냥 올라가는 데에만 집중했지. 도중에 한 번 너 찾아서 인사라도 해 볼까 싶었었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언젠가는 만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지금 만나긴 했다.
『그동안 잘 지냈었냐?』
『그럭저럭. 너는?』
『나야 늘 똑같지, 뭐. 사실 그때 리타이어하고 나서 많이 고민했었다.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을지. 길을 찾고 싶었거든.』
연우가 F구획에서 그들을 구해 줬을 때. 칸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은 우물처럼 너무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좁은 우물을 어떻게든 깨고 싶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탑을 꾸준히 올랐고, F구획에서 봤던 연우를 쉴 새 없이 떠올리면서 자신을 혹독하게 밀어붙이다가 우연찮게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칸은 단언할 수 있었다.
연우가 자신의 세계관을 확 뒤집어 놓았다면, 이곳은 뒤집힌 세계관을 다시 다져 준 고마운 장소였다.
『도일은?』
그러다 연우가 그동안 피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을 때. 칸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궁금하겠지. 연우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친형제 못지않게 항상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었으니까.
『없어. 여기엔.』
하지만 칸은 답답한 속내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자 했다. 비록 감정은 연우의 초감각에 다 읽혔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그놈이랑 갈라선 지 꽤 오래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