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오행산 (4)
나에게 오러는 여러 가지로 만들기가 어려운 에너지 형태였다.
고농도로 농축시킨 마력은 보통 흩어지려 하거나, 폭발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념’을 필요로 했다.
의념이라니. 실체도 없는 정신적 에너지를 이용해서, 마력을 일정한 물리적 형태로 만든다는 개념 자체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나 발데비히는 곧잘 다루는 걸 봐서는 불가능한 것도 아니어서…… 나는 머리만 쥐어짤 뿐이었다.
사실 연우는 오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일기장에 기초적인 개념에 대해서는 적혀 있었지만, 말 그대로 개념적인 내용이 전부였다.
동생이 유일하게 접근하지 못한 분야가 오러였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타고난 특성은 만통(萬通). 세계에 구성되어 있는 모든 요소들과 근본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었기 때문에, 녀석은 지구 출신이면서도 마나를 곧잘 다뤘다.
그래서 마력 다루는 법을 빠른 속도로 터득할 수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튜토리얼을 통과할 때쯤에는 아르티야 내에서 마력을 가장 잘 다루는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마법, 정령술, 강체술 등, 단 한 가지만 파고들어도 대성하기가 힘들다는 여러 분야에 능통해질 정도였다.
헤븐윙이라는 별칭을 가져다 준 ‘하늘 날개’ 스킬도, 그렇게 마력을 이용한 여러 기예들의 조합으로 탄생한 것이었다.
마력을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접근해, 근본부터 자유롭게 다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근본을 다루기 때문에 오러에는 접근을 할 수가 없었다.
오러도 마력을 이용한 응용 기술 중 하나였지만, 그보다는 가공된 에너지에 가까웠으니까.
게다가 동생은 물리적인 실체를 띠지 않는 ‘의념’이라는 개념을 너무나 어려워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우도 본격적으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정작 오레를 다루겠다는 생각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미 그가 익힌 무공 수준만 해도 부족하지 않은 데다가, 오러 말고도 집중할 무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성장 방향과 숙련도가 보이는 다른 스킬들과 다르게,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오러는, 제대로 익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아니, 무엇보다 순수한 마력을 다루는 마력회로로 오러를 구성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 따윈 전부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인체에 어울리지 않던 마력회로를 코어라는 개념을 더해 알맞게 고쳤다. 오러도 어떻게든 해내야만 했다.
샤논과 한령의 말마따나 우선 검술을 최소 달인 급까지 끌어 올려야만, 다시 음검에 도전할 만한 자격이 생길 것 같았으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성취가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20층에서 수련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에게는 뛰어난 스승이 둘이나 있다는 점이었다.
샤논은 랭커는 되지 못했어도 검술에 있어서만큼은 달인 급의 실력자였다.
한령도 마찬가지. 아홉 자루의 칼을 이용한 변화무쌍한 무예는, 무예 자체만 따진다면 검무신도 한 수 접어 줘야 할 정도였다. 명인 급과 진인 급 사이. 배울 게 아주 많았다.
다만,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샤논은 레드 드래곤 내에서 체계적인 무술 지도로 정도를 걸어 왔던 것과 다르게, 한령은 어렸을 때부터 전장을 전전하면서 경험으로 무술을 몸소 터득하는 사도를 걸었다는 점이었다.
정도와 사도. 두 상반된 특징을 가진 기예와 경험을 동시에 전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팔극권의 비기를 완성하는 데까지 노력한다면.
‘어떻게든 오러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동생은 만통이라는 특성 때문에 오러를 습득할 수가 없었지만, 이미 무공에 완전히 익숙해진 연우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연우는 크라슈나의 단검을 꽉 쥐었다.
결국 남은 건 수련밖에 없었다.
* * *
「사실 오러라는 건, 쉽게 설명을 하면 육감을 터득한 후에 뒷단계로 얻을 수 있는 힘이야.」
‘육감을 얻은 후에?’
「육감은 머릿속, 그것도 무의식 중에만 내재되어 있던 의념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이지. 오러는 그것을 마력이라는 기반을 이용해서 물리적 실체로 바꾼 형태야.」
샤논이 던져 준 한마디로, 연우는 머릿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방출한 것과 형상화한 것의 차이.
이미 육감보다 더 위의 단계인 초감각을 깨달은 연우였기 때문에, 더욱 쉽게 개념을 잡을 수가 있었다.
확실히 초감각의 영역 내에 있는 것들은 전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하게 볼 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무형적인 것을, 유형적인 형태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마력과의 적절한 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때의 마력 또한 아주 강해야 하지요.」
한령이 덧붙인 설명이었다.
연우는 마력을 고농축으로 압축시키는 건 걱정하지 않았다. 마력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게 아니었으니까. 용종이 괜히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인 게 아니었다.
결국 한 가지 사안만 해결하면 되는 거였다.
‘그럼 의념이란 건 뭐지?’
문제는 여기서 둘의 대답이 엇갈린다는 점이었다.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
「이기고자 하는 집념.」
샤논은 말했다. 검술이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자신이라는 인격체를 칼처럼 날카롭게 갈고 닦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령은 여기에다 두고 다르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좋은 미사여구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결국 검이란 건 상대를 해하는 무기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자리에서 어떻게든 상대를 꺾고 이길 생각을 해야지, 진다면 어쩌겠느냐고 말이다.
결국 한령은 승리하는 것만이 검술의 모든 것이라고 딱 잘라 설명했다.
쉽게 말해, 향상심과 승부심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와 사도의 다른 시각차가 바로 여기서 보이고 있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에, 연우는 두 가지 논점을 끌어안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렇다면 연우에게 가장 알맞은 의념은 무엇일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모든 걸 부수고 싶은 힘.’
연우는 되도록 자신이 만드는 오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부술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내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의념이란 자기 자신을 위한 수양도, 누군가를 꺾어 이기고 싶은 열망도 아니었다.
그저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반드시 그에게 필요한 생존 도구였다.
그렇게 한 번 방향이 잡히고 나자, 연우는 곧바로 연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팔극권의 모든 초식을 익히고 있으니 연습은 어렵지 않았다.
‘팔극권에 있어 비기란, 수십 수백 개로 구성된 초식들을, 8괘의 단 8가지 형태로 규합시키는 것. 보다 빠르고 날렵하게 단련해야 해.’
쉬쉬쉭-
연우는 움막집의 전 주인이 만들어 놓았던 연무장을 잘 써먹었다.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움막을 나서서 검부터 휘둘렀다.
보다 빠르게. 보다 날렵하게. 모든 초식들이 하나로 뒤섞일 수 있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하지만 단순히 휘두르는 데에만 집중하지는 않았다.
연우가 봤을 때, 8대 비기라는 것은 단순히 연습만으로 통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마치 건물을 쌓기 위해서 건축 도면을 따라 정교하게 벽돌을 쌓아야 하듯, 비기를 완성하려면 여러 초식들을 순서에 맞게 정립해야만 했다.
고도의 계산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전투 의지를 사용, 사고 가속으로 철저하게 초식들을 분석하면서 빠른 연산 처리로 틀을 구성했다.
그런 철저한 계산 덕분인지 밖에서 볼 수 있는 검의 움직임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정교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형태는 더더욱 정교해져 갔다. 조금씩 보이던 군더더기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검 끝에 정신을 집중한다는 생각으로. 모든 의념을 쏟아붓는다고 생각하면서 검술을 연습해.」
「의념은 추후에 영력이 흘러야 할 길입니다. 의념만 잘 활용할 수 있어도, 오러와 마력을 이용한 다양하고 변칙적인 공격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형태에만 집중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샤논과 한령의 충고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검 끝에 감각을 집중시켰다.
빠르게. 더 빠르게.
날렵하게. 더 더 날렵하게.
언제부턴가 의식 시간과 실제 시간, 분리된 두 개의 시간차가 얼마나 벌어졌는지 짐작도 가질 않았다.
한 차례도 쉬지 않고 계속 검을 휘두르다 보니, 겨우 복구했던 몸이 다시 메말라 갔다. 보통 때였으면 마력이 돌아가면서 피로를 꾸준히 쫓아냈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었다.
피로는 겹겹이 쌓이며 육체를 무거워지게 만들었다. 거기다 계속된 사고 가속으로 심력 소비도 장난이 아니었다. 연우는 각성하고 난 뒤에 처음으로 뇌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하지만 그만큼 감각도 검 끝으로 단단하게 뭉쳤다. 그리고 분명히 걸어 잠갔는데도 불구하고,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모를 소량의 마력이 그쪽으로 스며들었다.
연우는 그게 의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점점 정신력도 메마르기 시작하면서 한데 뭉쳤던 의념도 흐트러지려고 할 무렵.
쑥갑자기 연우는 모든 정신이 갑자기 아래로 움푹 꺼지면서 검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한 점으로 모든 사고 능력이 밀집되는 느낌. 그리고 여태껏 철저한 연산 아래 구성했던 비기가 단단하게 압축되었다. 검이 저절로 앞으로 튕기듯이 쏘아졌다.
쾅!
커다란 궤적과 함께 어마어마한 폭발 소리가 일어났다.
연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 앞으로, 울창했던 숲 사이로 보이지 않던 길이 넓게 나 있었다. 좌우의 나무들이 바깥쪽으로 꺾여 있었다.
연우는 분명히 느꼈다. 한데 몰렸던 정신. 압축되었던 의념. 그리고 하나로 규합된 초식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단천(斷天).’
8대 비기 중 첫 번째. 무왕이 보여 줬던 것처럼 해를 가르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첫 시범치고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성과였다.
‘실마리를 잡았다.’
아직 오러에 대한 단서를 잡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가야 할 길은 언뜻 보이는 것 같았다.
[‘팔극권’의 비기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의념을 다루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팔극권’의 스킬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62.1%]
* * *
[바깥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사고 세계에서 자아를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특성 ‘수도자’를 획득했습니다.]
……
[오랜 시간 동안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극명한 시차를 극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단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수도자로서의 부단한 끈기와 노력을 거듭합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와 보상이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전투 의지’의 진화가 이뤄집니다. 플레이어의 특성과 능력치를 산정하여 새로운 스킬을 탐색합니다.]
[특성 ‘수도자’의 영향을 받습니다.]
[상위 스킬 ‘시차 괴리’가 생성 되었습니다.]
눈 깜짝할 새에 석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아니, 만약 샤논과 한령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연우는 세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전투 의지로 사고 가속을 거듭하며 팔극권을 몇 번씩이나 분해했다가 합쳤고, 비기를 완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정신과 육체가 맞는 시간이 너무 달라져 이따금 위험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연우는 강한 정신력으로 극복해 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새로운 넘버링 스킬의 탄생이었다.
[시차 괴리]
넘버링 75
숙련도: 0.0%
설명: 특성 ‘수도자’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상위 스킬. 뛰어난 집중력을 바탕으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민첩한 사고 활동을 통해 판단 및 추론이 가능해진다.
* 사고 가속
외부 세계의 시간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 활동이 가능해진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사고 능력에 적용되는 시간 배율도 비례해서 늘어난다.
* 병렬 연산
한 번에 사고 기능을 여러 개로 나누어 연산 능력을 동시에 병행할 수 있게 한다. 숙련도에 따라서 동시 병행이 가능한 연산 개수도 늘어난다.
시차 괴리는 전투 의지가 마스터리 스킬이 되면서 새롭게 열린 상위 스킬이었다.
시차(時差)가 괴리된다는 직설적인 명칭만큼, 이 스킬이 가동되는 동안에는 실제 시간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고 활동이 가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분리되어 무한대의 시간을 얻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서 효율이 아주 좋아져 뇌가 받는 과부하의 위험이 현저히 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효과가 더 좋아진 만큼, 외부와 내부의 시차 간격도 커질 수밖에 없어서, 거기서 생기는 후유증과 페널티는 오롯이 연우의 몫이었다.
다행히 용의 육체가 그것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연우는 스스로 느끼기엔 연 단위에 필적할 시간을 투자해 팔극권의 비기를 세 개나 완벽하게 습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팔극권이 아주 정교해져서 각 초식의 구분도 거의 사라졌다.
[검술이 달인 급의 경지를 엿보기 시작합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팔극권’의 스킬 네임이 ‘팔극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팔극검’의 스킬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71.2%]
이것으로 검술도 뛰어나다고 할 만큼 높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넘버링 스킬만 총 5개나 가지게 되었다.
바토리의 흡혈검. 성화. 불벼락. 초감각. 그리고 시차 괴리까지.
아직 정식으로 랭커가 되지 못한 몸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룬 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우는 목이 말랐다.
오러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지만, 여전히 그 뒤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마력을 응축시키고 의념으로 덧씌우는 것까지는 가능한데, 이상하게 형체가 계속 유지되질 않았다.
샤논과 한령은 그걸 두고 이제 검술은 어느 정도 단련되었으니, 오러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면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을 무렵.
[축하합니다! 달인 급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대단한 업적을 이뤘습니다. 추가 보상이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얻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힘이 10만큼 올랐습니다.]
[민첩이 8만큼 올랐습니다.]
……
[오러를 터득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미완전한 오러입니다. 더 많은 연습을 통해 오러를 완전히 숙지하세요.]
웅, 우웅-
크라슈나의 단검을 따라 불그스름한 광채가 길게 솟아나 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모양이 흐트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용케 형체를 유지하면서 날카로운 예기를 드러냈다.
오러 블레이드.
오러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를 완성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