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58화 (158/862)

8화. 미후왕의 궁전 (2)

연우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마군의 주교나 되는 작자가 고작 이런 퀘스트에서 죽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연우가 아는 한, 마군의 주교들은 하나같이 음험한 작자들이었다.

뭔가 원하는 한 가지를 얻기 위해서 10년 이상 자신을 숙이는 법을 알았고, 함정을 파서 때를 기다렸다가 먹이를 낚아채는 집요함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포악했다.

킨드레드도 마찬가지. 아니, 탐욕만 따진다면 웬만한 주교들보다도 더 많을 게 분명했다.

마신에 대한 신실함으로 서열이 매겨지는 마군의 특성상, 두 번째 주교라는 건 그만큼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관을 가지고 있단 뜻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대체 노리는 게 뭘까? 자신의 힘만으로는 퀘스트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건가? 하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닐 텐데?’

킨드레드의 실력은 여기에 있는 다섯 사람이 함께 덤벼도 못 당해 낼 정도였다.

당연히 힘이 부쳐서 이들을 모두 이용할 생각을 한 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설사 힘이 역부족이라고 해도 밑에 있는 수하들을 데려올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뭘 노리는 걸까?

하지만 연우는 도저히 이렇다 하게 미치는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킨드레드와 마군이 꾸미려는 함정이.

그리고 그건 연우 외에 다른 사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킨드레드가 마군의 주교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란 것만은 알고 있었다.

레베카가 이번에도 가장 먼저 대표로 물었다. 아주 직설적으로.

『이거 말만 그럴듯하고, 혹시 살아 있는 거 아냐? 우리를 이상한 함정에 빠뜨리거나, 이용해 먹으려고…….』

빅토리아가 팔짱을 끼며 레베카의 말허리를 잘랐다.

『아니. 죽은 건 확실해. 내 마법을 의심하는 거라면 그건 내가 기분 나쁘고.』

『무슨 마법을 썼는데?』

『‘불리는 바람’. 상대의 위치뿐만 아니라, 생체 신호도 알려 주지. 보통 추격할 때에 사용하는 룬 마법이야. 아무리 효과 좋은 디스펠을 써도, 절대 해제할 수 없어.』

불리는 바람은 레베카도 아주 잘 알고 있는 룬 마법이었다. 추격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마법이었으니까. 다른 부작용은 없지만, 빅토리아의 말마따나 숨기는 건 가능해도, 해제는 불가능하다.

시전자인 빅토리아가 그렇게 느꼈다면 사실이었다.

『그럼 당신이 킨드레드와 짜서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

『원한다면 마나의 맹약이라도 해 주지. 어때?』

『……!』

빅토리아는 아예 제자리에서 마나의 맹약을 외웠다. 자신의 말에 일말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마력이 역류하게 되는 맹약. 하지만 전부를 외워도 빅토리아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으음.』

레베카는 침음을 흘렸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가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하나야. 퀘스트 지역으로 가서 킨드레드의 사체를 수습하는 것.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도 크게 내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건 내가 지난날에 그에게 진 빚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유언인 거고, 당신들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아니야.』

『그럼?』

『거래를 하고 싶어.』

『거래?』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퀘스트를 이행해. 나는 던전의 위치를 가르쳐 줄 테니까. 대신에 킨드레드의 사체가 있는 곳까지 날 데려다 줘. 그게 내 거래 조건이야.』

사두들은 다시 긴 침묵에 잠겼다.

확실히 빅토리아가 하는 말에 허점은 없었다.

킨드레드가 들어갔다가 죽은 던전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빅토리아는 자신을 보호해 줄 가드(Guard)를 찾고 있는 것이다.

대가는 던전의 위치. 그 뒤부터는 퀘스트를 이행하든지 말든지, 자신은 손을 떼겠다는 것이다.

사두들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위험 요소와 의심 짙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퀘스트. 하지만 그런 위험 요소를 전부 배제한다면, 그 뒤에 있는 과실이 너무 향기로웠다.

퀘스트가 가짜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탑의 시스템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시스템이 숨기는 건, 퀘스트 안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두들은 섣부르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보다 더 강한 힘을 얻고자, 극심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20층에서 장기 체류 중이었다.

그런데 미후왕의 신물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데 혹하지 않는다면 이상했다.

그리고 이런 달콤한 과실들은 사람들을 이렇게 유혹한다. ‘너는 다를 것이다’라고.

‘꼭 독이 든 성배 같은데.’

연우는 사두들이 은연중에 풍겨 대는 의념을 읽고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지금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다지만, 결국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다들 승낙할 분위긴데?」

샤논도 그런 분위기를 읽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렇겠지. 여기 오래 있었다고 해서 플레이어들이란 놈들이 어디 다르진 않을 테니까. 너도 막상 저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을까?’

「하! 뭔 그런 뻔한 질문을 해? 당연히 해야지!」

샤논은 그렇게 말하면서 뭐가 그리 재미난지 낄낄 웃어 댔다. 그리고 그건 한령도 같은 생각이었다.

‘역시.’

「우쒸. 그럼 주인은 어떻게 할 건데?」

‘나도 당연히 해야지.’

「이 못된 주인 보소. 언제는 안 할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하지만 이유는 조금 달라. 나는 어디까지나 마군이 무슨 함정을 팠는지 확인할 생각으로 가려는 거니까. 그리고 뭔가 꾸미는 게 있는 만큼, 거기서 얻게 될 것도 크겠지.’

「뭐야, 그거. 그럴싸한 미사여구만 덕지덕지 발랐을 뿐이지, 결국 우리랑 똑같구만, 뭘.」

‘나도 일단 플레이어니까.’

「으흐흐. 그렇지?」

연우는 아주 잠깐 자신은 뒤로 빠질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당장 가지고 있는 것도 전부 소화하지 못한 마당에 굳이 새로운 걸 얻겠답시고, 뻔히 위험해 보이는 곳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깊이 생각할수록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마군이 어떤 함정을 파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 그것을 도중에 가로챌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통쾌한 것이 있을까?

게다가 레드 드래곤과 청화도의 전쟁 이후, 남은 8대 세력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마군만큼은 아직 이렇다 할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게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직접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비록 어느 정도의 위험 부담은 감수해야겠지만.

‘어떤 그림인지 아예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모를까, 이미 지금처럼 진행 중인 것이라면. 위험한 만큼 얻을 것도 많겠지.’

아니, 그런 것들을 떠나 마군이 뭔가를 얻게 된다는 사실이 마땅 치 않았다. 어쨌거나 녀석들도 언젠가 직접적으로 싸워야 하는 곳이었으니까. 이참에 전력을 파악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칸 녀석도 뭔가 심상찮고.’

처음 도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부터 지금까지. 칸은 큰 충격을 받고, 뭔가에 쫓기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대체 왜 그러는지가 궁금했다.

결국 연우가 결정을 내리는 시기와 비슷하게, 다른 사두들도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좋아. 하겠어.』

『나도.』

레베카와 칸이 동의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빅토리아는 솔 루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흐흐. 난 이 일에서 빠지겠어. 내가 굳이 뱀파이어가 된 이유가 뭔데. 괜히 나대다가 죽고 싶지는 않다고.』

솔 루나는 양팔을 들고 의자를 뒤로 뺐다.

빅토리아는 끝까지 설득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에 레베카가 갑자기 살의를 드러냈다.

츠츠츠. 발밑에서부터 짙은 넝쿨이 올라오면서 솔 루나의 목을 단단히 옥죄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린다면.』

『내가 미쳤다고 붉은 신목과 케르눈노스의 사도의 눈 밖에 날 일을 하겠나? 말했지만, 난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빅토리아는 룬 마법사이기 이전에 유명한 워 메이지였고, 레베카는 모시는 신을 닮아 잔혹하기로 유명했다. 솔 루나는 그들에게 찍힐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다가, 결국 녀석을 감싸고 있던 넝쿨을 풀었다.

빅토리아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자, 그럼 이동은 내일 이 시각에 하는 걸로 하고. 그때까지 챙길 것 있으면 다들 챙겨서 와.』

그렇게 자리가 끝났다.

* * *

이튿날.

지시대로 네 명이 모였다. 연우, 빅토리아, 레베카, 칸. 그들은 서로 의심하는 기색으로 상대를 살폈지만, 그래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서로를 굳게 신뢰해야만 했다. 킨드레드가 죽은 던전.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다. 한 명이라도 딴생각을 품는다면 그날로 끝이었다.

그들 모두 이런 일에 있어서는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굳이 말로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에 빅토리아는 인원만 체크하고 곧바로 던전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말이 새어 나갈 수 있으니 주변에다 마력 장벽을 둘러 치는 건 당연했다.

『던전은 다섯 번째 산의 정상에 있어.』

『봉우리? 그곳에 동굴이 있었던가?』

레베카가 인상을 좁혔다.

『아무래도 보이지 않는 결계로 둘러쳐져 있었던 모양이야. 킨드레드도 처음에 찾고 나서 너무 어이가 없어 미치는 줄 알았다고 했으니까.』

『하이 랭커도 찾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설치된 결계라…….』

『석가여래나 되는 존재가 만들었다니까.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

당연한 말이지만, 신적인 존재들에게도 위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석가여래는 주신 급에 해당하는 최고신(最高神)이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어.』

빅토리아는 주로 레베카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동했다. 연우는 말 없이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다만, 칸은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연우는 이따가 칸을 한 번 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여기야.』

빅토리아가 도착한 장소는 봉우리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비탈길에 위치해 있고, 불룩하게 튀어나온 작은 언덕이 풀숲으로 덮여 있어서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언덕을 따라 알 수 없는 기운이 떠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힘은 분명히 위압적이었다. 단순히 의념을 쏘아 훑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상서롭지만 무겁다는 표현이 옳겠지.

연우는 16층에서 마주했던 우르드를 떠올렸다. 녀석의 기운이 딱 저랬으니까. 물론, 질적인 차이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게 있었나?’

초감각을 깨달은 뒤로 감지하지 못하는 건 거의 없을 거라고 자부했었는데. 아무래도 오만이었던 모양이다.

신적인 존재가 설계했다는 결계는 달랐다.

하지만 연우는 초감각으로 결계를 쉴 새 없이 훑으면서 구성 요소를 최대한 머릿속에 넣어 두고자 했다.

결계는 여러모로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마법이다. 언젠가는 터득할 생각이기 때문에 구성 요소를 미리 파악해 둔다면, 룬을 조합해서 얼추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빅토리아는 허공을 가볍게 짚으면서 결계를 해제시켰다. 이미 킨드레드에 의해 몇 차례 해제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진 결계라 이미 내구성이 바닥을 기고 있었다.

화아아-

결계 안쪽에 맴돌고 있던 기운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으스스하게 등골을 타고 오한이 들었다. 네 사람은 전부 등골을 쭈뼛 세웠다.

결계가 석가여래의 것이라면, 안에 담긴 힘은 미후왕이 남긴 기운의 잔재가 분명했다.

성질만 다를 뿐, 석가여래의 힘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좋아. 지금부터는 내가 앞장서지.』

팀에서 가장 큰 전력을 차지하는 레베카가 앞으로 나섰다. 사냥의 신을 모시고 있으니 길을 잘 찾을 수 있는 데다가, 여차하면 곧바로 실력 행사에 나설 수도 있었다.

대신에 연우와 칸은 각각 좌우를, 빅토리아는 중앙을 맡았다. 방어력이 약하지만 딜러 역할에 충실할 마법사를 보호하는 건, 던전 탐색에 있어 가장 큰 기본이었다.

『그럼 움직인다.』

레베카의 지시대로 4명은 언덕을 타고 내려가, 수풀을 가르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그리고 곧 자그마한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겉보기엔 평범한 동굴인데.』

레베카는 결계 안에 놓인 동굴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념과 감각을 안쪽으로 밀어 봤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의념이 입구 부근까지만 들어가다가 갑자기 확 하고 흩어졌다. 마치 뭔가를 빨아들이듯이.

‘공허.’

연우의 초감각 역시 안쪽 깊숙한 곳까지 탐색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에, 레베카는 천천히 동굴 안쪽으로 발길을 들였다.

띠링-

[던전, ‘미후왕의 궁전’에 입장했습니다. 입장한 4인을 파티로 지정합니다.]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단순히 한 발자국만 들였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공기가 확 뒤바뀌었다.

바깥을 따라 돌던 미후왕의 기운이 위압적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걸 빨아들일 것 같은 괴기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치 산 사람을 거부하는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

그리고 그 속에는 사람의 심장을 꽉 죄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무섭고, 두려운 원초적인 감각을 저절로 불러일으키는 기운이었다.

차라리 외부 기운을 차단시킬 수 있다면 모를까, 오감이 차단되어 의념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네 사람으로서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억울함, 분노, 두려움…… 보통 한 장소에 오랫동안 갇혔을 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때에 가질 수밖에 없는 기분들이야.’

어쩌면 이 모든 게 미후왕이 남긴 감정의 편린인 걸까.

연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그를 위협할 때마다 검은 팔찌가 잘게 떨렸다.

『……미친 장소로군. 일단 계속 움직이자.』

일행은 레베카를 따라 천천히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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