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미후왕의 궁전 (4)
‘뭐?’
샤논은 답답하다는 듯이 계속 소리쳤다.
「72선술은 미후왕이 배웠다는 여러 기예 중에서도 하나에 불과하다고. 이건 그런 것들을 총망라해서 새롭게 정리한 요체란 말이야!」
‘……!’
연우는 그제야 자신이 뭘 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수련의 흔적을 넘어 미후왕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별안간 미후왕이 봉인을 풀고 난 뒤에 어떤 별칭을 새롭게 얻었었는지가 떠올랐다.
‘제천대성.’
하늘과 나란히 놓일 만큼 존귀한 자.
미후왕을 그런 제천대성으로 만들어 준 힘이, 바로 눈앞에 떡하니 놓인 것이다.
만약 그저 단순하게 구결이나 동작만 남아 있었다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남아 있는 것들은 손오공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남긴 흔적들이었고, 과정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눈으로 좇기가 쉬웠다.
「정말이지…… 이게 말이 돼?」
「보면 볼수록 놀라워. 어째서 미후왕이라 하면 신과 악마들도 경기를 일으켰는지 알 것 같은데. 어떻게 이만한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샤논과 한령은 미후왕의 흔적에 흠뻑 매료되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들에게는 노다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 오래전에 사라진 옛 선배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그들로서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들 경지를 엿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하나라도 더 깨우치고자 쉴 새 없이 미후왕의 뒤를 쫓았다.
초감각과 용마안이 합쳐지면서 전달하는 정보는 그만큼이나 방대해서, 둘은 지금 이 순간 앞으로 평생 둘도 없을 기연을 맞이 하는 중이었다.
다만, 연우는 그들만큼 매료되지는 못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제 막 달인 급에 오른 연우로서는 보이는 게 너무 미미하기만 했다.
대단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수준이 너무 높았고, 간간이 이해되는 부분이 있으면 감탄을 터뜨리기도 했다. 자신이 가져올 만한 것도 많았다.
하지만 유치원생이 물리학의 이론 서적을 본다고 해서 이해를 할 수 없듯이, 연우와 미후왕의 유산에는 그만큼이나 엄청난 격차가 있어서 도무지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차라리 음검보단 낫다고 해야 하나.’
그나마나은 점이 있다면, 답안지와 문제 풀이가 같이 놓여 있으니 기초 공부를 더 쌓으면 언젠간 따라잡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것.
그래서 연우는 미후왕의 유산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모두 외워 두고자 했다. 기량을 높인 뒤에 조금씩 익히기 위해서.
하지만 차례로 외우는 와중에도 용의 지식이 발동되면서 자연스레 습득이 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건 무술도, 마법이나 주술도 아냐. 이게 선술인가? 아냐. 그런 것도. 분명 마력을 이용한 기예는 맞지만…… 그런 여러 틀 따위로 묶을 수 없는…… 훨씬 뛰어넘은…….’
머릿속이 활짝 열리면서 뻥 뚫리는 기분.
어떤 틀이나 분야로도 묶을 수 없이, 그것들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어떤 것. 새로운 지평을 본 기분이었다.
연우는 한참 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다른 생각에 미쳤다.
‘설마…… 혹시 음검도?’
* * *
『또 갈림길이야.』
레베카는 눈앞에 놓인 세 개의 갈림길을 보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던전에 입장한 지 벌써 몇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동안, 그들은 수많은 갈림길과 마주쳐야만 했다. 거미줄처럼 수도 없이 갈라지는 길과 길게 이어지는 통로.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던전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도저히 길을 찾기가 힘들다. 어디가 어딘지를 알 수가 없으니까.
의념이라도 넓게 퍼뜨릴 수 있다면 모를까, 그랬다가는 미후왕의 사념이 벼락처럼 달려드니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일행은 아까 전부터 계속 같은 위치만 뱅글뱅글 도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진짜야. 정말 헤매고 있어.’
의념을 확장시키는 데 한계가 있는 그들과 다르게, 연우는 이미 초감각으로 던전의 대략적인 구조를 파악해 둔 상태였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주도권을 잡아야 하나?’
그동안 연우는 되도록 자신이 나서는 것을 꺼려 했다.
킨드레드와 마군이 대체 뭘 꾸미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되도록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해야 하는 데다가, 미후왕의 유산까지 외우는 중이니 다른 곳에 크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자꾸 이렇게 복잡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마군의 꿍꿍이를 알아내려고 해도, 일행이 미로에 갇혀 버린다면 아무것도 진행이 되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아까 전부터 미로의 구조가 계속 조금씩 변하고 있어.’
일행들이 같은 길만 뱅뱅 도는 이유였다.
‘저 뒤쪽에 있는 놈도 어떻게 나설지 모르고.’
연우는 슬쩍 의념을 뒤쪽으로 돌렸다. 일행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후방을 따라 어둠 속에 녹아 천천히 이동 중인 박쥐 무리가 있었다.
솔 루나. 살고 싶으니 빠지겠다던 녀석은 뱀파이어의 종족 스킬 은 ‘박쥐 해체’를 사용해서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오는 중이었다.
레베카와 빅토리아는 미처 녀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이 온통 앞쪽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솔 루나는 바로 그런 점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72선술을 훔치고 달아날 생각이겠지. 이렇게 다니면 별 위험 없이 미후왕의 사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있을 테고.
연우는 아직 녀석이 위협이 되지 않아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여차하면 곧바로 손을 쓸 생각이었다.
결국 연우는 마음을 정해야 했다.
『저……』
그래서 연우가 일행들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는 순간.
「끼아악!」
「크르!」
갑자기 검은 팔찌를 따라 괴이들의 비명이 찌르르 울렸다. 그리고 강한 반발력과 함께 괴이들이 어떤 힘에 튕겨 팔찌 안쪽으로 돌아왔다.
강한 뭔가와 충돌해서 괴이들이 꺾였다는 뜻이었다.
‘뭐지?’
연우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발걸음이 멈칫거렸다.
그 순간.
『무슨 말을 하려……!』
레베카가 여전히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연우 쪽을 돌아보는데, 갑자기 연우가 그녀의 손목을 잡더니 안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레베카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무슨 짓이냐며 연우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있던 자리에 가시 같은 뭔가가 불쑥 치솟아 오른 것을 느끼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단하고 뾰족한 그림자 가시. 이질적인 느낌이 마구 풍겨 댔다.
쾅!
연우는 오러가 잔뜩 뭉친 크라슈나의 단검을 거세게 휘둘렀다. 오러가 폭발하면서 가시도 같이 터졌다.
『이…… 건?』
『미후왕의 사념이 본격적으로 우리를 잡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여태껏 정신계 공격만 계속하더니. 이제는 물리적인 행사까지 시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근원에 점점 가까워지니 그만큼 시도할 수 있는 공격 방식도 다양해진 것 같았다.
한편, 레베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번 공격. 자신은 전혀 읽지도 못했다. 사냥 신의 사도인 자신이. 시그니처 스킬, 신지는 전혀 작동도 하지 않았다.
던전에 들어온 뒤로 계속 이런 상태였다. 다섯 번째 산이 주는 속박은 미후왕의 사념 때문에 더 강렬해졌다. 몸을 쇠사슬로 바리바리 싸맨 것처럼 꿈쩍하기가 힘들었다. 컨디션도 바닥이었다.
그런데 한낱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가 그걸 읽었다. 미후왕 사념의 저주에 시달릴 때에 구해 준 것도 녀석이었으니.
레베카는 자신이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보다 쓸모가 없다는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이래서야 지난 몇 년 동안 죽어라 수련을 한 보람이 없지 않은가.
물론, 연우가 보통 다른 플레이어들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세한 소문은 못 들었지만, 그래도 층계에 오르는 플레이어들마다 연우를 보면서 놀랄 때가 많았고, 지난 반년 동안 지켜봤을 때 가장 크게 성장한 녀석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하이 랭커로서의 체면이 있지. 연우만도 못하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려 웠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하지만 레베카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기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어기전성을 열었다.
『카인.』
『예.』
『이제부터 길은 네가 열어.』
칸과 빅토리아가 무슨 소리냐며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레베카는 단호했다.
『지금은 나보다는 카인이 훨씬 나아. 그러니까 네가 맡아.』
『알겠습니다.』
연우는 레베카의 강렬한 의념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렇게 말을 해 주니 다행이었다.
‘시니컬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레베카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하이 랭커 중에서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줄 아는 자는 극히 드물다. 이런 자들은 어떻게든 앞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일수록 되도록 살려 둘 필요가 있었다.
그때부터.
연우는 레베카와 위치를 바꾸고, 본격적으로 길을 열기 시작했다.
연우는 거침이 없었다.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한참 고민하던 레베카와 다르게 선택에 절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야, 너!』
빅토리아가 기겁을 하면서 그런 연우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나서지마. 믿어. 던전 공략에서 헤더(Header)의 말은 절대적이야.』
레베카가 오히려 연우를 두둔하면서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베카는 앞장서는 연우의 뒷모습을 강렬한 의념으로 바라봤다. 신지의 모든 감각은 연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판단을, 녀석을 믿으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연우는 레베카의 굳건한 신뢰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았다.
쾅! 콰앙-
콰콰콰-
연우는 미후왕의 사념이 불쑥 튀어나올 때마다, 귀신같이 눈치 채고는 사전에 오러를 날려 부쉈다.
마치 연우가 이 던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념의 방해를 계속 물리치면서 던전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길도 얼추 맞는 것 같았다. 레베카가 헤더를 맡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차라리 이렇게 급하게 움직인다면 저쪽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보이겠지.’
마군의 반응을 지켜보려던 쪽에서, 반응을 유도하려는 쪽으로 생각을 선회했다. 어떻게든 녀석들이 미끼를 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다 연우와 일행은 어느새 미로의 막바지에 다다를 수가 있었다.
『여기가, 끝인 것 같은데.』
『맞아. 신호도 여기 너머로 이 어지고 있어.』
『크네요. 아주.』
미로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때 즈음, 일행은 엄청난 너비의 공동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끝에는 족히 30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철문이 놓여 있었다.
철문에는 갖가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림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제 모습을 잃어 별 눈길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연우는 달랐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챘으니까. 미후왕 유산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용의 지식을 사용해서 그것까지 단번에 외웠다.
[완전한 형태의 ‘미후왕의 유산’을 습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추가 공적치가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2,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연우는 미후왕의 유산에다 ‘제천류’라는 이름을 붙이고, 뇌리 한 편에다 잘 보관했다.
그사이, 일행들은 철문에 적힌 글자에 모든 의념을 집중하고 있었다.
철문의 좌우에 적혀 있는 뜻을 알 수 없는 글자.
『빅토리아, 이거……?』
레베카가 빅토리아에게 해석을 부탁했고, 룬 문자를 비롯해 여러 신대 문자에 해박한 빅토리아는 뇌리를 한껏 쥐어짜면서 천천히 뜻을 해석했다.
천하정저신진철
여의금고봉쇄문
『맞아. 이거, 여의봉이야.』
『정말 그런 게 있을 줄은…….』
레베카는 길게 탄식을 흘렸다.
여의봉은 미후왕을 상징하는 대표 무기. 뜻한 대로 길이를 무한대로 늘이고, 품고 있는 신력도 대단하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신의 무구를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놀랄 수밖에.
이 철문, 그 자체가 여의봉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특히 문에다 손을 갖다 대는 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주 잘게. 입술이 바싹 메말랐다.
『다만, 이 문은 여의봉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남은 부분은 어디로 간 거지?』
빅토리아는 간만에 학자의 자세로 돌아가 열의에 잠겼다. 그런 그녀의 감상을 레베카가 냉정하게 딱 잘랐다.
『그런 빌어먹을 연구는 나중에 실컷 해. 지금은 킨드레드의 사체부터 수습하자고. 이 문, 어떻게 열어야 할 것 같아?』
『아까 전부터 계속 찾아보고 있어.』
빅토리아는 언락을 비롯한 여러 마법을 시도했지만, 그럴 때마다 룬은 번번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고운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역시 신진철인가…….』
신의 진귀한 철. 신진철은 신과 악마도 봉인시킨다는 전설을 지닌 철이었다. 그런 만큼 항마력이 아주 뛰어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빅토리아의 룬 마법도 계속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큰 것을 완력으로 열 수도 없다. 칸이 있는 힘껏 밀어 봤지만 꿈쩍도 않았다. 킨드레드가 대체 어떻게 통과를 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연우는 그런 일행들을 지나쳐 철문 앞에 섰다.
의념이 쉴 새 없이 철문을 훑었다. 용마안으로 결을 찾아봤지만, 대체 재질이 어떻게 된 건지 결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완전무결. 세상에 이런 물체가 있는 게 가능키나 할까?
게다가 한 가지 걸리는 점도 있었다.
‘신진철…….’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왼손으로 검은 팔찌를 쓰다듬었다.
오래전에 이 팔찌를 에도라에게 보였을 때. 그녀는 혜안으로 검은 팔찌를 살피면서 ‘어쩌면 신진철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다.
그때는 가능성만 염두에 두고 넘겼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니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우웅, 웅-
그때, 연우의 생각을 읽은 듯, 검은 팔찌가 잘게 떨렸다. 연우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바닥을 철문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그그긍-
꿈쩍도 않을 것 같던 철문이 갑자기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렸다.
일행들은 또 무슨 짓을 했냐며 연우를 신기한 놈 보듯이 봤지만, 연우는 그냥 간단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의념을 안쪽으로 던졌다.
내부는 ‘궁전’이라는 이름처럼 화려한 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마치 신하들을 맞이하는 왕처럼. 99개의 높은 계단 위에 화려한 장식을 한 조각상이 앉은 왕좌 아래로 수많은 조각상들이 도열해 있었다.
하나하나가 세밀한 표정으로 장식된 원숭이 상이었다.
그리고 좌우 벽을 따라 20미터는 될 것 같은 크기의 거대 석상들이 호위 무사처럼 줄지어 서서 위압감을 선사했다.
미후왕은 원래 요괴 원숭이들의 왕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화과산이라는 영토를 다스릴 때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한 것 같았다.
단순한 조각인데도 불구하고, 왕과 신하들의 기세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일행은 잠시 주춤거렸다. 섣불리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거대 석상들이 담고 있는 힘은 개체 하나하나가 이미 연우와 칸을 월등히 뛰어넘을 정도였다. 어떤 것은 레베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후왕의 사념이 갑자기 사라졌어.’
호시탐탐 그들을 잡아먹으려 하던 우울한 사념이 보이지 않았다. 연우와 일행은 위기감을 느꼈다.
『저기! 킨드레드가 있어!』
하지만 빅토리아가 마법의 흔적을 따라 킨드레드의 위치를 찾아 낸 순간.
조심스러웠던 레베카와 칸의 행동이 조금 달라졌다.
킨드레드의 시체는 홀의 중앙 좌측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족히 30미터는 될 것 같은 아주 높다란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 표면에 새겨진 아주 작은 글자들이 두 사람을 동요케 했다.
72선술. 미후왕을 만들어 낸 힘이 그곳에 있었다.
『찾았다.』
그때, 칸이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성큼 앞으로 나섰다. 여전히 미후왕의 사념을 경계하는 레베카와 다르게, 이미 칸의 정신은 온통 석비에 쏠린 상태였다.
『저것만 있으면 도일을……!』
그렇게 칸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발길을 앞으로 성큼 내딛는 순간.
『크하핫! 72선술은 내가 가져 가겠다!』
여태껏 후방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던 솔 루나가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레베카와 빅토리아가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녀석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철문을 통과해 석비로 날았다.
그때.
『왕의 영면을 깨우려는 자, 대체 누구인가?』
공동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거대한 어기전성과 함께, 갑자기 검은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솔 루나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어떻게 손을 쓸 새도 없이.
칸은 그 광경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려 걸음을 멈췄지만, 이미 홀 안을 가득 채운 공기는 크게 달라진 뒤였다.
끼이익-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것 같던 백여 개의 석상이 일제히 머리를 뒤쪽으로 돌렸다.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고정되었다.
석상들에게서 일제히 사념이 풍겨 나와 뒤섞였다.
홀을 따라 엄청난 힘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던전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쳤다.
쿠쿠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