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미후왕의 궁전 (10)
“말씀 감사했습니다.”
연우는 미후왕의 사념에 고개를 숙였다. 그가 어떤 큰 도움을 준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새로운 기회를 얻은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연우는 사념이 살짝 보였던 진면목을 보면서 깨달았다. 여전히 자신은 가야 할 길이 아주 멀다는 것. 그리고 72선술과 제천류를 부단히 수련하다 보면 언젠가 저 정도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확신도 얻을 수 있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 하기는.”
미후왕의 사념은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은 좋았는지 피식 웃으면서 허공에다 살짝 손을 흔들었다.
공간이 비틀리면서 붉은색 포탈이 열렸다.
“그럼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고. 이쪽으로 나가면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다.”
연우는 다시 한 번 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포탈에다 발을 걸치다가, 뭔가를 떠올리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저, 그리고.”
“말 못 들었냐? 네가 할 수 있는 질문은 끝났…….”
“그 질문은 이 퀘스트와 관련된 것 한정 아니었습니까?”
“음? 퀘스트 질문이 아녔어?”
미후왕의 사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자신에게 뭘 물을 게 있냐는 듯이.
연우는 포탈에서 잠시 발을 빼고 그에게 다가가 오른팔을 내밀었다.
“혹시 이 팔찌에 대해서 아십니까?”
“팔찌?”
미후왕의 사념은 별 시답지 않은 거라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 주겠다고 생각하면서 연우가 착용한 팔찌를 살폈다.
아니, 이걸 팔찌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수갑이라는 표현이 옳지 않을까. 손목에서부터 팔뚝까지 올라온 검은 쇠사슬이 유독 눈에 띄었다. 마치 칠흑 밤하늘을 옮긴 것처럼 너무 까맸다.
미후왕의 사념은 신기하게 생긴 팔찌를 손으로 두어 번 두들겨보다가 곧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이거?”
“여의봉과 같은 재질인 것 같습니다만. 혹시 맞습니까?”
“이런 걸 어디서 났어?”
연우는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싶었지만, 질문을 던진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올림포스 보고에서 제우스의 아스트라페를 손에 넣으려다 갑자기 이런 모양이 되었다는 말만 했다.
그러자 사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기능은?”
“영혼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죽은 망자를 다룬다?”
“예.”
“능력의 정도는?”
연우는 손을 가볍게 흔들어 괴이를 소환했다. 그림자가 쭉 늘어나면서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났다.
미후왕의 사념은 이제 아예 눈을 가늘게 좁히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여태껏 태평한 모습만 보이다 진중한 모습을 보이자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연우는 여태껏 아무도 풀지 못했던 이 비밀이 풀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남은 옵션들을 해제할 방법이 생길 테니까.
“사령술사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이만한 옵션을 가진 아티팩트라면 절교 녀석들의 보패 급이 아니고서야…….”
탑 내에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존재한다지만, 그들 중에서도 죽은 망자를 다룰 수 있는 실력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만큼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명확했고, 다룰 수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미후왕의 사념은 칠흑왕의 절망을 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그런 상식들을 뛰어넘는 아티팩트였다.
아스트라페를 잡아먹은 물건이라니. 그도 쉴 새 없이 벼락을 뿌려 댄다는 창에 대한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팔찌는 여의봉에 버금가는 물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가장 사념의 관심을 끈 건, 팔찌를 이루고 있는 재질이었다. 신진철. 여의봉을 만들 때 쓰인 귀한 물질이 여기서도 쓰일 줄이야. 그것도 ‘통짜’였다.
“우선 신진철은 맞다.”
역시나.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용마안으로 살펴도 결이 보이지 않았던 물체는 딱 두 개밖에 없었다. 여의봉의 조각과 칠흑왕의 절망.
“다만, 암만 봐도 뭔지는 모르겠어. 비슷하게 떠오르는 건 몇 개 있긴 한데, 모양이 전혀 달라. 게다가 그보다 더 수준이 높고. 신의 무구야, 이건. 틀림없어.”
연우는 이번에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살짝 실망하면서도, 뒤이어 나온 말에 눈을 반짝였다.
신의 무구.
아스트라페를 집어삼켰을 때부터 유추는 했었지만, 미후왕의 사념으로부터 확언을 받았으니 확실해진 셈이었다.
칠흑왕의 절망은 아이기스와 비교해도,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칠흑왕은 누구인 걸까?
“이거 부품이 두 개 더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예.”
“누가 한 추론인지는 몰라도 정확해. 목과 발. 추가 부품이 더 있어. 모양은 이것과 비슷한 형구(刑具)의 일종일 테고.”
미후왕의 사념은 팔짱을 꼈다.
“조금 재미난 거 가르쳐 줄까?”
“무엇입니까?”
“신진철이 신이나 악마들도 사족을 못 쓸 정도로 희귀한 물건이라고 알려져 있잖아?”
“예.”
“그런데 사실은 반대인 거 알아?”
“그게 무슨……?”
“신이나 악마가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서 환장하는 물건이 아니라, 사실은 두렵기 때문에 환장하는 물건이란 거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미후왕의 사념은 그런 연우의 표정 변화가 재미있던지 실실 쪼개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원래 이 철, 신과 악마를 구속하거나 봉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거든.”
“……!”
“실제로 신진철은 신들 사이에서 죄를 많이 짓거나, 아니면 두려울 정도로 너무 강한 신들을 제어하기 위해서 주로 쓰였었어. 아니면 퇴치를 하거나. 여의봉도 마찬가지로, 한때는 절교라는 곳의 마왕들을 봉인시키기 위해 본체 놈이 요긴하게 썼었거든.”
연우는 오행산을 탈출한 뒤, 삼장법사 일행과 함께 천축으로 이동했던 미후왕 손오공의 전설을 떠올렸다. 당시 그들을 방해하는 마왕들이 숱하게도 쓰러졌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해 남긴 것이 서유기였다.
“그리고 네 물건도 마찬가지.”
미후왕의 사념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형태만 봐도 죄수에게나 채울 것 같은 물건인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사념이 닿아 죄수의 속성으로 바뀐 것 같고. 망자를 다룬다면 어떻게든 죽음과 관련 된 놈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일단 알아낼 수 있는 건 거기까지가 전부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한 소득이었다.
칠흑왕이 신들마저도 두려워할 정도로 강한 자였고, 신위도 죽음과 관련된 게 확실하다는 확언을 받았다.
그렇다면 조사의 범위도 한정된다. 조금만 더 범위를 축소시킨다면 누군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우는 다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미후왕은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간만에 재미난 물건 봤네. 본체 놈과 똑같은 신세였던 양반이 또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 아, 그리고 너 만약에 본체 놈 만나게 되면 절대 그거 보이지 마라. 그놈이 보물에 대한 욕심이나 집착이 참 대단해서.”
“명심하겠습니다.”
연우는 그 말을 끝으로, 붉은색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그렇게.
심상 세계에는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흐흐. 간만에 만난 재미난 놈이란 말이지.”
미후왕의 사념은 재미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사실 그는 여태껏 연우가 던전에 입장했을 때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였던 모든 모습들을 엿보고 있었다.
“용의 기운을 깨운 놈이라. 꼭 누가 떠오른단 말이지. 그렇지 않냐?”
미후왕의 사념은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늘을 유영하다 어느새 다가온 용신, 성이 그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옛 주인도 과거 비슷한 모습으로 그렇게 싸웠었으니까. 묘한 데자뷰가 느껴졌다.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용신은 알게 모르게 사실 연우에게 많은 혜택을 줬었다. 여의주로 피로를 덜어 주는 것부터, 바람을 한껏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것까지.
미후왕의 사념은 어느덧 옛 추억에 잠긴 녀석을 보면서 씁쓸하게 웃다가 돌아섰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연우가 보였던 검은 팔찌. 사실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었다. 단번에 알아채지는 못했다.
하지만 형태나 재질이 딱 한 사람에게밖에 쓰이지 않아 쉽게 추론이 가능했다.
“하여간 헤르메스 새끼, 한동안 뭐 빠지게 열심히 움직여야겠는데.”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실실 웃고 있을 무렵.
미후왕의 사념은 갑자기 뇌리를 따끔하게 때리는 자극에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공간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미후왕의 사념은 혹시 연우가 뭔가를 두고 다시 돌아오려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곧 공간 너머에서 느껴지는 파장이 낯설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성.”
용신이 크게 몸을 뒤틀면서 여의주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얼굴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곳은 미후왕의 사념이 꾸려 낸 심상 세계. 그의 권역이며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무리 허물이라고 해도 그는 이미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신격을 획득한 위대한 몸. 그런 그가 꾸려 낸 권역을 뚫고 들어오는 건, 98층의 최고신이나 주신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쉽게 열고 들어온다는 뜻은 단 하나.
미후왕의 사념, 그의 본체가 움직이거나, 아니면 그와 관련된 ‘어떤 것’이 움직이고 들어온단 뜻이었다. 자기 집으로 찾아오는데 허락을 받고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쏴아아-
공간이 갈라지면서 붉은색 포탈이 열렸다.
미후왕의 사념은 그 너머에서 이질적이지만 낯이 익은 기운을 만날 수 있었다.
날카롭고, 따가우며, 묵직한 마기. 형태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근원은 그와 똑같았다.
그리고 그 힘의 가호를 받아, 작은 체구를 한 소년이 포탈을 타고 심상 세계로 넘어왔다.
악동 같이 익살맞은 미소. 작은 키. 킨드레드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 순간, 그는 여태껏 보였던 모습을 모두 벗어던졌다. 마치 모시는 신을 영접하듯이. 경건한 말투와 몸짓으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천마의 또 다른 얼굴이시여. 당신을 모시러 왔나이다.”
* * *
밖으로 나오자, 용신이 주었던 혜택이 모두 사라지면서 오감의 속박이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초감각의 영역으로 보는 세상도 이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연우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다들 이미 갔나?’
던전 전체에 걸쳐 초감각을 넓게 퍼뜨렸다.
다행히 칸과 빅토리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도 없는 것을 보니 마군을 피해 무사히 달아난 것 같았다.
하긴 칸의 눈치로 킨드레드의 배후가 움직였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빅토리아도 마력을 보충한 뒤 움직인다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출 실력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초감각의 범위를 좀 더 확장시켜 던전 밖에까지 탐색했다. 혹시나 킨드레드나 마군이 남아 있나 싶어서.
하지만 잔잔하게 남아 있는 마기만이 그들이 머물렀다는 것을 말해 줄 뿐.
다른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또 어디로 간 걸까?
연우는 살짝 눈살을 좁혔지만, 곧 고개를 털었다. 없다면 좋은 일. 있다고 해도 그들로부터 종적을 감추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칸과 빅토리아만 무사히 빠져나갔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고,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레베카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거대 석상에게 치여 피떡이 된 모습은 형체조차 알아보기가 힘 들었다.
연우는 조금 착잡해졌다.
아무리 그녀와 이렇다 할 교류가 크게 없었다고 해도, 던전을 통과하는 내내 그녀가 보였던 모습은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몸이 안 좋은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반사적으로 위기에 빠진 빅토리아를 구하려다 횡액을 당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케르눈노스라는 신의 사도라는 점이 끌렸다.
사냥과 풍요의 신. 세간에 신명(神名)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고신에 해당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우는 그녀에게 조금 미련이 생겼다.
‘이 사람의 영혼, 내가 거둘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검은 팔찌는 어디까지나 주인이 죽인 대상자에 한해서만 영혼을 수확할 수 있을 뿐. 그녀는 아니었다.
게다가 영혼도 이 근방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귀천해서 케르눈노스의 품으로 돌아간 걸까.
연우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고는 인트레니안을 열어 그녀의 시체를 안에다 밀어 넣었다.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있었다. 그녀는 딱히 좋아하지 않겠지만. 만약 거부한다면 원상태로 되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정리를 끝내고, 연우는 자신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걸었던 자리로 푸른 불꽃이 거칠게 일어나면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거대 석상과 원숭이 상들의 조각들을 전부 먹어 치우고, 석비에 적혀 있던 72선술의 내용도 지져서 읽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간간이 남아 있던 사념들도 모두 정화시켰다. 미후왕이 오백 년 동안 수련하면서 벽과 천장에 남겼던 흔적들도 예외는 없었다.
‘굳이 남길 필요는 없겠지.’
연우는 여기서 자신이 보고 익힌 모든 것들을 지우고, 사념이 머무는 공간으로 넘어가는 통로까지 전부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미후왕의 사념은 말했다. 탑 곳곳에 여의봉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그것을 찾으려 하는 여러 후계자들이 있다고.
그렇다면 그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라이벌은 필요 없었다.
무엇보다 우연이라도 제천류를 다른 누군가가 가져가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특히 마군이 손대는 건 더더욱.
이건 반드시 자신만이 가질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날.
다섯 번째 산의 어느 모퉁이에 위치하던 던전이 완전히 폭삭 무너졌다.
그리고.
연우는 21층으로 통하는 포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