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67화 (167/862)

17화. 세트(Set) (1)

[이곳은 21층, ‘그림자 도장’의 관입니다.]

푸른 물결이 갈라지면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20층에서의 속박이 사라지면서 다시 찾아온 감각 때문일까. 간만에 맡은 바깥 공기가 폐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연우의 앞에는 평원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건물이 있었다.

외뿔부족에서 봤던 무서고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연우는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일기장에서 21층의 스테이지를 보긴 했다지만, 실제로 보게 되니 훨씬 규모가 대단했다.

「오랜만이네, 여기도.」

검은 팔찌가 살짝 떨리면서 샤논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재미있었나 보지?’

「나한테야 이만한 곳도 없었으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겠어.’

연우는 일기장에 적혀 있던 21층과 관련된 내용을 떠올렸다.

20층이 자신을 정비하는 구간이라면, 21층은 정비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33개로 나눠진 구획을 차례로 이동하고, 각 구획에 있는 그림자 분신들을 이기거나 제한 시간만큼 버려서 통과하는 것. 자기 실력을 확인해 보기에 이보다 적합한 장소는 없었다.

게다가 그림자 분신들이 하나같이 명예의 전당에 수록된 실력자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특징이나 기량을 확인해 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21층 스테이지의 테마는 쉽게 말하자면 ‘도장 깨기’였다.

스테이지의 이름처럼 이곳은 보통 무를 단련하는 사람들이 주로 머무는 도장(道場)이었다.

도장은 크게 내부와 외부로 분류되어 있었다.

도장 외부에는 넓은 범위에 걸쳐서 곳곳에 연무장과 기초 병기가 제공되어 플레이어들 간에 연습 대련을 펼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한쪽에 허수아비 인형들이 있어 기초 무술을 익히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전부 도장 내부에 설치된 시험 구획을 통과하기 위해 단련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도장 내부는 출입문부터 1번에서 5번까지 총 다섯 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숫자가 높을수록 난이도가 높아지게 되며, 각 문을 통과하면 일직선으로 쭉 이동해 33개의 구획을 통과해야만 했다.

각 구획에서 해야 할 일은 아주 간단했다.

일정하게 주어진 제한 시간 동안, 구획에 있는 각 그림자 분신을 상대해 쓰러뜨리거나 버틸 것.

그리고 그림자 분신은 전부 1위부터 165위까지, 21층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플레이어들의 능력치와 스킬, 그리고 업적을 토대로 만든 환영이었다.

탑이 생성된 이래로, 수없이 흐른 장구한 세월 동안 수많은 강자들이 나타났다가 스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탑(top)’이라고 할 만한 실력자들만 기록된다는 명예의 전당.

플레이어들은 누구나 바로 이 명예의 전당 끝자락에라도 이름을 올리기를 바랐고, 극소수만이 그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당연히 그렇다 보니 일반 플레이어들의 입장에서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데 상당히 버거워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난이도가 낮은 5번 통로만 하더라도, 역대 133위에서 165위까지의 플레이어 환영들이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은 나중에 군주나 사도처럼 뛰어난 하이랭커로 활약을 벌였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환영들의 공격에서부터 제한 시간 동안 버티기만 해도 구획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부상을 입었다면 몸을 회복한 뒤에 해당 구획부터 다시 도전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 덕분에 몇 번씩 재도전을 하면서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공략해서 쓰러뜨리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일기장에 나와 있던 대로 훗날 라이벌이 될지도 모를 자들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고, 그들에 대한 공략법을 연구해 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도 했다.

당연히 분신을 남긴 자들의 경우에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수련을 할 수밖에 없으니, 클리어 후에도 여러모로 좋은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다만, 보통 플레이어들에게 해당되는 이런 모든 경우가 유독 연우에게만큼은 예외였다.

연우는 그동안 10층을 제외한 모든 스테이지에서 ‘비공개’로 1위를 기록했었다. 10층에서도 1위인 에도라와 몇 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사실상 탑이 세워진 이후로 독보적인 행보를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를 아는 사람들은 대개 연우가 이번에도 아주 쉽게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정작 연우로서는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분신이라.’

연우는 잠깐 멀거니 서서 생각에 잠기다가, 명예의 전당이 기록된 메시지 창을 떠올렸다.

[21층 랭킹]

1위. 비바스바트

2위. 나유

3위. 휼

연우는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4위. 차정우

* * *

연우는 곧바로 시련에 돌입하지 않았다.

워낙에 20층에서 오랫동안 있었다 보니 정리해야 할 게 많았다. 인사해야 할 사람도 있었고.

붉은색 포탈을 타고 탑 외 지역으로 이동, 그는 가장 먼저 외뿔 지역의 마을로 향했다.

“으잉? 이게 누구쇼? 얼굴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우리 형님 아니우?”

판트는 연우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마을 어귀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가늘게 눈을 좁힌 그는 건들거리는 자세로 연우를 맞았다.

그동안 농사일이라도 했던 걸까. 밀짚모자를 쓰고 한쪽 어깨에는 갈퀴를 얹었다. 햇볕에 잔뜩 그을린 피부는 그렇지 않아도 까무잡잡했던 피부를 아예 흑인처럼 만들다시피 한 상태였다.

연우는 그런 판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시하고 옆에 있던 야누에게 물었다.

“에도라는?”

판트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거참, 내가 말하고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알았으니까, 됐고. 신수는 어떻게 됐지? 저번에 이제 슬슬 부화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었잖아.”

판트는 이 형님 앞에서 툴툴거려 봤자 받아 주지 않으리란 걸 알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서 느끼는 거지만, 마을 안에서도 갈수록 찬밥 신세가 되는 것 같았다.

“신수야 진즉에 깨어났지.”

그래도 불만이 사라지지는 않아 살짝 뿌루퉁한 표정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연우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어디지?”

“따라오슈.”

연우는 앞장서는 판트를 따라 마을 외곽 쪽으로 이동했다.

길을 지날 때마다 마주친 사람들은 연우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기억나는 사람도 있고, 기억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낯은 익어 일일이 화답을 해 줬다.

그러다 어느 모옥에 도착했다.

하지만 모옥은 이미 많은 마을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는 중이었다. 간간이 장로들이 웃음을 터뜨리면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크르릉이 부화할 때도 그러더니. 신수가 태어나는 모습도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연우는 판트의 도움을 받아 인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던 중에 어느 누구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넌……?”

녀석은 연우를 보며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다 차갑게 비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신수가 너와 관련이 깊다지? 왠지 신수답지 않게 멍청해 보인다 싶더니. 덩치만 크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녀석은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적의를 잔뜩 드러내면서 인파를 빠져나갔다.

따라온 사람이 많았던지 한 번에 제법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다. 덕분에 연우는 방금 전에 비해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상한 놈이군.”

“흐흐. 이상하다마다. 아예 얼굴 안색부터가 싹 바뀌었잖수? 그 뒤로 꽤 고생했다고 들었으니 아마 형님에게 원한 좀 많이 품고 있을 겁니다.”

연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내가 아는 놈이었나? 누구였지?”

“엥?”

판트는 연우가 농담이라도 하나 싶어 빤히 쳐다봤고, 눈빛에 의아함이 깃든 것을 보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정말인가 보네. 장 녀석이 알면 완전 거품을 물겠수. 으흐흐. 하긴 한 번 처바른 놈은 기억할 필요도 없단 거겠지. 역시 난 형님의 그런 안하무인적인 인성이 아주 좋다니까.”

“장이라고?”

연우는 이름을 들은 후에야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외뿔부족에 들어왔던 때. 그에게 덤비다가 단번에 깨졌던 놈이었다. 원래 판트와 함께 차기 왕의 재목으로 거론되었다가, 이후에 갑자기 평가가 확 꺾였다던가. 백선가의 아들이라는 점까지 기억이 났다.

그 뒤로 줄곧 마을에 머물면서도 녀석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반쯤 잊은 상태였다.

그래도 연우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라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웬만해서 잊지 않는 편이었는데. 오랜만에 본 녀석에게서는 옛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 못 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우. 나도 처음 봤을 때는 깜짝 놀랐으니까. 최근에 약이라도 하는 건지, 왜 저렇게 갑자기 달라져 버렸는지 몰라.”

판트도 녀석이 이상해졌다는 것은 아는 것 같았지만 별 관심이 없는 듯 어깨만 으쓱거리고 말았다.

연우는 장이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기…….’

대체 그동안 뭘 했기에 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이전에는 오만하기는 했어도 기운이 선기를 띠고 있었는데.

연우는 여기에 대해 말을 해 둘까 싶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무왕이나 장로들이 알아서 장에 대해 처분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에 관심을 거두고, 판트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밖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장로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으하하! 아까 우리 초롱이가 변을 가리기 시작했다고! 변을!”

“야, 막내야! 초롱이 깨면 배고플 거 아니냐! 빨리 밥 가져와, 밥!”

“기록물! 기록물 어디 갔어? 지금 색 변화가 이뤄졌다고. 빨리 기록해야 하는데 어디 간 거야?”

“기록물이 뭐냐, 기록물이! 육아 일기란 말 못 쓰냐?”

장로들은 저마다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시끄럽기는 또 얼마나 시끄러운지. 시장통에라도 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연우는 신수를 본 순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곳에는 새끼 그리핀 두 마리가 서로에게 기댄 채 쌔액쌔액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매의 머리와 날개, 사자의 몸통과 뱀의 꼬리. 한 녀석은 붉은색, 다른 녀석은 푸른색 털로 되어 있어 구분하기가 쉬웠다. 전체적으로 근엄하고 신성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리핀은 환수들 중에서도 최상위종으로 손꼽히는 녀석들. 여기에 연우가 선물했던 여러 기운들도 제대로 흡수했던지 잠재력도 뛰어나 보였다.

[히든 퀘스트(어비스 터틀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했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와 보상이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

[보상으로 ‘머리 거북이의 등껍질 조각× 30’과 ‘꼬리 뱀의 허물’을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푸른 정령의 가호(임시)’ 스킬이 ‘푸른 정령의 가호’ 스킬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제부터 ‘푸른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 정령술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낮습니다. 정령술을 익혀 ‘푸른 정령’을 상위 정령으로 진화시키세요.]

신수들로부터 받았던 퀘스트 중 마지막 것까지 해결되었다.

연우는 보상으로 주어진 것들을 확인했다.

[머리 거북이의 등껍질 조각]

분류: 재료 잡화

등급: A++

개수: 30

설명: 11층의 ‘어비스 터틀’은 환수와 마수가 서로 자웅동체를 이루던 신수였다. 이중 환수인 머리 부분이 가지고 있던 등껍질.

단단하기로는 아만다티움에 버금갈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등껍질 조각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에게 가져가 방어구로 만드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하다.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꼬리 뱀의 허물]

분류: 재료 잡화

등급: A++

설명: ‘어비스 터틀’의 마수인 꼬리 부분이 신수가 되면서 마지막으로 벗었던 허물.

질기고 튼튼한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꼬리 뱀이 진화하기 전에 갖고 있던 맹독 특성이 묻어 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에게 가져가 무기구로 만들도록 하자.

**이 아티팩트는 ‘유니크’입니다. 탑에서도 오로지 단 한 개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주인에게 완전히 귀속됩니다. 타인으로의 거래나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신수에게서 나온 물건답게 등껍질 조각과 허물은 여러모로 연우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방어구와 무기로는 조금씩 한계를 느끼고 있었는데. 잘 됐어.’

사실 연우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대개 당장 랭커가 써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비그리드와 아이기스, 그리고 검은 팔찌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특히 튜토리얼 때 구매했던 크라슈나의 단검은 이제 날이 다 빠지고 내구도도 거의 다해서 버려야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이참에 신급 무구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아티팩트들의 능력치들을 대거 끌어 올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허무룡이 남긴 역린도 있으니. 함께 쓸 수 있다면 좋은 아티팩트가 나올 것 같았다.

‘23층에 있다는 브라함을 빨리 만나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층계 공략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까.’

20층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우는 21층에서도 전력을 다해 도전에 임할 생각이었다.

특히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실력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연우는 이참에 마지막 165위부터 1위까지 전부 도전해 볼 참이었다.

그중에는 지금은 잊힌 옛 종족들의 잔영들이나, 바토리의 흡혈검의 원주인인 흡혈군주도 있었다. 또한, 아홉 왕들의 옛 모습도 있으니, 앞으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인 연우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무엇보다.

한낱 그림자 분신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을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도 그의 심장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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