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세트(Set) (2)
『저 친구가, 이번에 어비스 터틀을 대신할 거라던 신수인가?』
연우의 머릿속으로 마룡 크르릉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여태껏 반 년 넘도록 현자의 돌에서 잠만 자더니. 이제 기운을 갈무리하는 작업이 끝난 걸까, 아니면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서 잠이 깬 걸까?
『히히. 주인, 나도 일어났어.』
그때, 짹짹이의 목소리도 같이 전해졌다. 아무래도 기운의 갈무리가 끝난 건 같았다. 어쩌면 신수를 보고 작업이 더 빨라진 건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간에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20층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는 수련에 집중하고, 샤논과 한령이 있어 괜찮았지만. 그래도 여태 계속 잠만 자고 있던 둘이 걱정되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깨어나 연결 고리를 통해 전해지는 사념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아직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둘 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몸은? 좀 어때?’
『어어어엄청 좋아. 막막 날아다 니고 싶어, 나!』
‘이따가 해 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응응!』
‘크르릉은?’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설마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도 아직도 못 정한 건가?』
‘좋은 이름이 안 떠올라서.’
『말도 안 되는……!』
크르릉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정말 많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모르게 헤노바와 성격이 조금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동생도 멀뚱하게 있다가 속을 살짝 긁으면 이런 식으로 화를 잘 내는 편이었지. 어쩌면 다들 동생과 성격이 비슷한 게 아닌가 싶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연우는 다시 화를 내는 크르릉을 보면서 웃음을 참았다. 더 놀리면 정말 크게 토라질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아직 녀석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상태가 아니었다.
‘네메시스’
『뭔……!』
‘네 이름. 어때?’
『음.』
크르릉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깊은 고민에 잠긴 목소리였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신의 이름이로군.』
네메시스는 올림포스의 신 중에서 복수와 율법을 담당한다는 존재다. 비록 제우스를 비롯한 12주신에 비하자면 한참 명성이 떨어지고, 신격도 높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엄연히 신은 신. 그런 이름을 빌린다는 것은 신의 위세를 빌린다는 뜻도 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신의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탑에 들어선 플레이어들은 대개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들의 이름을 일부러 피하거나, 갖고 있던 것도 바꾸는 경향이 짙었다.
하지만 연우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98층의 여러 신과 악마들이 저마다 여러 의논을 나눕니다.]
[몇몇 신들이 불쾌해합니다.]
[헤르메스가 그들을 설득합니다.]
[몇몇 악마들이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또다시 신과 악마들에 관련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이런 메시지에 일희일비를 한다면 진즉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연우가 노리는 바는 따로 있었다.
신의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해당 신의 위격과 성향, 신위, 그리고 그들의 개념이 정립된 기호(記號)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사용하면 그의 가호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기 때문에 저주나 파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그들이 98층에 갇혀 아래층으로 힘을 투시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손길을 뻗칠 수 있는 정도는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름의 원주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이름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위명을 실천한다면. 충분히 큰 힘이 되어 주곤 했다.
연우가 노리는 점이 바로 이거였다.
신의 이름을 빌려 환수들에게 그들의 가호를 내리게 하는 것.
잘못하면 신의 명성을 더럽히는 행위라며 저주를 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조금 다르지.’
이미 연우는 몇 번씩이나 신과 악마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보여 주곤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자신이 있었다.
특히 신이 가진 위명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활약을 펼친다면. 그리고 네메시스라는 신을 설정하는 정의(定義)를 제대로 보여 준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연우는 그들이 위세를 높여 주고, 그들은 환수에게 가호를 내린다.
일종의 거래인 것이다.
『네메시스라.』
크르릉은 여전히 신의 이름을 빌린다는 사실이 걸리는 건지 섣불리 대답하질 못했다.
하지만 연우의 생각을 깨닫고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앞으로 자신과 연우가 하려는 일에 있어 그만큼 어울리는 이름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신의 비위를 거스를지 모른다는 사실이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싫으면 계속 크르릉으로 해야겠지.’
『……그대는 정말이지 극단적인 생각밖엔 하지 않는 것 같아. 알고 있나?』
‘알고 있어. 그래서. 대답은?’
『그걸로 하지.』
그 순간.
띠링-
[마룡 ‘크르릉’의 이름이 ‘네메시스’로 변경되었습니다. 새로운 이름에 따라 지정 환수의 개념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네메시스(마룡)이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세상에 기존에 없던 새로운 환수를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할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추가 공적치와 보상이 제공됩니다.]
[공적치를 5,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공적치를 3,000만큼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체력을 5만큼 획득했습니다.]
[마력을 7만큼 획득했습니다.]
……
[주의! 신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네메시스 신은 이번 사안에 중립을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네메시스 신의 눈이 당신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헤르메스가 묘한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화아아-
비록 현자의 돌에 들어 있어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연우는 연결 고리를 통해 크르릉, 아니, 네메시스의 기질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무겁고, 짙으며, 어두웠다. 마치 칠흑색 어둠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네메시스는 새롭게 변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얕게 ‘크르릉’하고 짙은 하울링을 내뱉었다.
이러니 크르릉이라는 이름을 붙였지. 연우는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싶었다.
작명 센스가 너무 없어서 무슨 이름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었는데.
그러다 햅번과 레베카 같은 사도들을 만나면서 문득 든 생각이 주효했던 것 같았다. 이왕에 이름을 바꾸는 것이라면, 보다 뛰어난 효과를 주는 게 좋았으니.
그리고 네메시스도 그만큼 신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게 분명했다.
일기장 속에서 엿보았던 녀석은 자존심 강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으니.
째액!
『그럼 나는! 나는, 나는? 응?』
그때, 짹짹이가 갑자기 불쑥 나타나 연우 앞에서 크게 날갯짓을 했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커져 늠름한 자태까지 뽐내고 있지만, 기대심으로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두 눈만큼은 여전히 순진해 보였다.
‘니케는, 어떨까?’
니케.
승리의 여신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 * *
연우에게는 아주 어려웠던 이름 짓기 시간이 끝나고.
그는 신수를 구경하는 부족원들 틈바구니에서 살짝 빠져나와 인근에 위치한 공터로 이동했다.
타인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초감각을 넓게 퍼뜨려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근처 거목 위로 올라가 네메시스를 소환했다.
화아아-
허공을 따라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퍼지면서 천천히 네메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카샤의 뱀을 닮은 길쭉한 몸체. 하지만 전체적으로 환룡을 닮은 얼굴. 녀석은 짹짹이가 성장한 것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이전에도 5미터는 훌쩍 넘는 길이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7미터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런 녀석을 두고 누가 부화한 지 일 년도 안 된 새끼 환수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뭐, 성이라는 용신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미후왕의 궁전에서 봤던 용신을 떠올리다가, 연우는 네메시스와 눈을 마주쳤다.
『이렇게 마주 보게 되니 많이 달라진 모양이군, 주인.』
네메시스는 이제 ‘주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단련하는 만큼 나도 그만큼 성장해야 하니까.”
『좋은 생각이야. 다른 건 몰라도 그런 마음가짐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어.』
연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메시스가 살짝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래서. 날 부른 용건은?』
“잘 알 텐데.”
『흐음.』
“넌 여태 말을 않고 있었어. 어떻게 환생을 했는지. 고룡 칼라투스가 어떻게 살아 있는지. 그래도 난 굳이 묻지 않았고.”
연우는 여태 네메시스가 마음 정리가 덜 끝났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간을 주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는 녀석도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끝난 것 같았다. 환룡 미리내가 아닌, 마룡 네메시스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이젠 말해 줬으면 하는데.”
네메시스는 한참의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환생한 이유…… 사실 이걸 환생이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기억을 다 갖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번 죽었고, 다시 알을 빌어 이 세상에 나타났으니. 환생이 맞긴 맞겠지. 방법은 다른 신수들이 쓰는 방식과 다르지 않아.』
네메시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난 그동안 공허를 계속 맴돌았다. 거기서 언젠가 정우, 그 친구가 날 찾아 주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공허.
세상과 세상, 차원과 차원의 경계를 따라 흐른다고 알려진 것. 그 속에 흘러 들어간 영혼과 물질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여태 의식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어떻게 기다릴 생각을 하게 됐지?”
『칼라투스가 그러라고 했었으니까.』
“뭐?”
뜻밖의 말.
연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참 이상하지 않나? 분명 내가 알기로도 칼라투스는 정우에게 모든 걸 내주고 눈을 감았었다. 심지어 나에게는 자신의 소중한 드래곤 하트까지 내줬었어. 우리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확인했었다.』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다. 용종이 죽음을 맞을 때에 주로 하는 말이었다.
태생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인 용종은 죽을 때에도 자신의 영혼이며 육체까지 전부 마나 스트림으로 환원하기를 바랐다.
고룡 칼라투스는 죽은 게 확실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청화도 놈들에 둘러싸여서, 정우의 복수를 하지도 못하고 이대로 눈을 감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원통해할 때, 칼라투스의 목소리가 전해지더군. 기다리라고.』
네메시스는 그때 고룡 칼라투스가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기다려라. 그 아이가…… 곧 돌아올 것이니.
돌아온다.
네메시스는 오로지 그 말만 믿고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 동안 홀로 외로이 공허 속을 떠돌아다녔다.
기약이 없는 인내의 세월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몇 번씩이고 공허 속에 묻혀 사라질까 하는 충동심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칼라투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정우와 같은 영혼의 부름을 받아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알을 깨고 나왔을 때, 그는 정말 정우를 보는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렇단 말이지.”
연우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결국 네메시스를 부활시킨 건, 고룡 칼라투스란 의미였다. 연우도 용체를 각성하면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가 아직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짚이는 것이 있었다.
‘정우를 지구로 보내 준 건…… 어쩌면 칼라투스가 아닐까?’
연우가 아프리카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 동생이 발견되어서였다. 지갑에는 신분을 알 수 있는 신분증이 들어 있었고, 주머 니에는 사진과 유품인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다.
탑에 들어온 뒤로 간혹 그런 의문을 던졌었다.
대체 동생을 지구로 보내 준 건 누구일까?
동생이 눈을 감은 곳은 모처에 마련된 옛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였다. 절대 지구가 아니었다.
그 말은 동생을 수습해 준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어떤 이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기장에는 용의자로 지목할 만한 인물이 없었고, 헤노바와 갈리어드 같은 사람들은 클랜 하우스의 위치를 몰랐다.
그런데 만약 그게 고룡 칼라투스라면.
여태껏 갖고 있던 여러 의문들의 아귀가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 칼라투스는 말했었다.
기다리겠노라고.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연우는 네메시스를 보며 물었다.
“칼라투스가 있을 만한 곳이 어디일까?”
『그야 그의 임종을 지켰던 곳이겠지.』
“거기가 어디지?”
네메시스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50층. 용의 신전.』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