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69화 (169/862)

19화. 세트(Set) (3)

50층, 용의 신전.

랭커와 세미 랭커를 가른다는 마의 대지. 혹은 장벽이라 불리는 스테이지.

하지만 연우에게 그곳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동생이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 옛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로 이동하는 포탈이 유일하게 설치된 장소였다.

그래서 연우는 50층까지 어떻게든 가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고룡 칼라투스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확실히. 정우도 마지막에 칼라투스를 그리워하면서 클랜 하우스의 위치를 50층으로 설정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세간에는 아르티야의 클랜 하우스가 무너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은 동생이 죽기 전에 결계를 치고, 아공간으로 분리시킨 것이었지만.

“결국 거기까지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건데…… 문제는 내가 당장 그럴 겨를이 없다는 거야.”

연우는 랭커 급에 해당하는 무력을 지니고 있어도, 각 층계를 오르는 데 있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시련은 단 한 번밖에 치르지 못한다. 그리고 거기서 보인 업적을 바탕으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20층에서 두 개의 넘버링 스킬을 얻었던 게 그 증거였다.

물론, 필요한 바가 있으면 다시 해당 층계로 이동해 스테이지를 즐기는 것도 가능했다. 20층의 다섯 번째 산에 머물던 사두들처럼. 하지만 그건 개인 수양일 뿐,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연우가 필요한 건, 막대한 공적치와 그에 따른 보상이었다.

‘명예의 전당을 내 이름으로 전부 채울 필요도 있고.’

10층까지의 초심자 구간처럼 목적이 있어 빠른 스킵을 한 것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의 속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고룡 칼라투스가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면.

천천히 움직이다가 유일하게 남은 흔적마저 사라지게 된다면.

그때는 큰일이 난다.

하지만.

『아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네메시스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커다란 머리를 좌우로 저었다.

“왜?”

『그가 어떻게 있든 간에, 지금 그는 자고 있을 테니까. 힘을 아끼기 위한 동면에 가까운 행위이긴 하지만, 그래도 주인이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지?”

『그새 잊었나?』

네메시스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나는 칼라투스의 분신이자, 사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 * *

.

결국 고룡 칼라투스의 생사는 자신이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네메시스의 말에 따라, 연우는 당분간 기존의 공략 속도를 계속 유지키로 했다.

급하게 오르다가 만약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그때는 정말이지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일단은 스스로 강해지고, 용체 각성을 8단계까지 빨리 습득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칼라투스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고 계획을 정리한 뒤, 연우는 오랜만에 스승인 무왕을 찾았다.

“검기(劍氣)? 어쭈. 이제 사람 구실 좀 하겠는데?”

무왕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연우를 딱 한 번 보더니 그의 어디가 달라졌는지를 단번에 알아 차렸다.

검기. 이는 외뿔부족의 용어로, 오러 블레이드를 의미했다.

연우를 따라왔던 판트와 에도라도 묘한 눈빛을 폈다. 오러를 깨우쳤다는 건, 검술이 달인 급에 올랐다는 의미.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공에 입문했던 그들도 이제야 막 오러를 습득한 터라, 놀라면서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판트는 ‘또냐’라는 표정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고, 에도라는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음.”

무왕은 턱을 짚으면서 연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다른 기연이라도 얻었나 봐?”

연우는 이제 할 말을 잃었다.

「캬! 이 정도면 진짜 무당 아니냐? 무왕, 무왕,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정말.」

「검무신을 만든 스승이라더니…….」

샤논과 한령도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다. 거기다 목소리에는 살짝 존경심마저 어려 있었다. 무도가인 두 사람의 눈에는 연우가 보지 못하는 것도 비치는 것 같았다.

‘진짜 이 사람에게는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연우는 더 이상 속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살짝 한숨을 내쉬었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참에 이번에 겪은 일에 대해서 의논을 나눠 볼 생각이었다. 여의봉의 조각을 모으려는 마군의 목적은 알 것 같았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몇 가지 있었다.

던전을 나왔을 때, 왜 마군은 그 자리에 없었을까? 여의봉의 조각이 목적이었다면 입구 쪽을 단단히 봉쇄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연우가 던전을 무너뜨릴 때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또 한 가지. 이렇게 해서 킨드레드가 얻은 건 대체 무엇일까? 던전의 난이도는 분명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건 연우 등에게만 해당할 뿐, 킨드레드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퀘스트를 나눠 주기만 하고, 그 뒤로 일절 모습을 비치지 않았다.

아무리 마군이 하는 일 중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렇다 할 ‘가정’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하지만 무왕이라면 짚이는 게 있지 않을까?

미후왕의 궁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영매를 통해 탑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을 엿보고 있는 그라면 뭔가 알지도 몰랐다.

더구나 킨드레드는 무왕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었다.

그래서 조언을 구해 보려 했지만.

“하지 마.”

무왕은 연우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씩 웃었다.

“네 일은 네가. 내 일은 내가. 스승 제자 사이에 신뢰가 기반인 건 중요하지만, 그래도 독립을 시작했으면 제대로 해라. 정말 모르는 게 생기거든 날 찾아오고.”

역시 귀신이다.

그래도 연우는 스승의 배려가 보이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 무왕은 미후왕과 닮은 점이 많았다. 말투도, 성격도.

결국 마군에 관한 건, 머리 한편으로 치워 뒀다. 어차피 여의봉의 조각을 얻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마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가면 이유를 알 수 있겠지.

무왕은 팔짱을 끼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제 21층이라고?”

판트와 에도라의 시선이 다시 연우에게로 향했다. 21층. 이제 겨우 11층의 시련을 끝낸 그들로서는 연우를 따라잡으려면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미치는 생각이 있었다. 21층의 시련이 어떤 내용인지 떠올랐던 것이다.

“예.”

무왕이 히죽 웃었다.

“그럼 나랑도 만나겠네?”

“예. 2위에 계시더군요.”

연우는 21층에서 봤던 명예의 전당을 떠올렸다. 그중 두 번째에 기록되어 있던 이름. 나유. 무왕의 본명이었다.

지금은 4위에 있는 동생의 분신을 만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그 위로 올라가면 역대 녀석보다도 더 높은 기록을 세웠던 ‘괴물’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연우는 절대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21층을 오를 당시의 젊은 무왕이라. 어쩐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자신 있냐?”

“자신 있을 게 있겠습니까?”

“뭐야? 쫄…….”

“당연히 제가 이기겠죠.”

“어쭈? 이 새끼 봐라?”

무왕은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가 돌아온 자신만만한 대답에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잘난 척하다가 한 방에 훅 가는 거 몰라?”

“아시잖습니까? 저는 농담 같은 거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전술 전략으로 판단해서 말씀 드리는 거죠.”

“분신한테 뒈지도록 얻어 처맞아 봐야 정신 차리지. 응?”

“그렇지 않아도 여쭙고 싶었습니다. 스승님의 분신, 뒈지도록 실컷 두들겨 팰 생각이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시련이긴 해도, 하늘 같으신 스승님의 잔영인데 함부로 손을 대기가 어려워서요.”

“이 새끼가?”

“아니면 그냥 압도적으로 찍어 누르기만 할까요? 가능할 것 같긴 합니다만.”

무왕은 연우와 잠시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판트는 ‘아버지를 합법적으로 팰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라고 중얼거리면서 새롭게 안 사실에 희열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었고, 에도라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면서 악다문 입술 새로 말을 흘렸다.

“두 사람 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만하세요. 그리고 아버지, 아까 봐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거야 이따 하면 된…….”

“아까 전에 대장로님께서 아버지 찾으시던데, 어떻게 할까요?”

“알았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그 영감님 요즘 얼마나 잔소리 심한지 아냐? 너까지 그러지 마라, 좀.”

무왕은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뒤쫓아 올 대장로의 모습이 떠올랐던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마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대신에 떠나기 전에 연우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해 두는 건 잊지 않았다.

“이겨라, 이왕이면. 1위까지도.”

“예.”

“그래.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내 제자답지. 으흐흐! 그런데 딸아, 내가 아까 어디로 간다고 했었지?”

무왕은 연우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마지막까지 딸을 괴롭히면서 자리를 떠났다.

연우는 그런 무왕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이왕이면 1위를 이기라는 말. 그 말은 당시의 무왕도 1위는 꺾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비바스바트.

그는 다른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올포원.’

77층에 눌러앉은 이후 지금까지 계속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장벽이 된다는 자. 그가 아주 오래전에 남긴 환영이라.

다른 이유를 떠나서 꼭 꺾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더라도 자신의 현재 실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 알고 싶었다.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그사이.

에도라가 짙은 한숨을 내쉬면서 돌아왔다. 또 무왕이 철없이 속을 박박 긁어 놨던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대고 있었다.

그러다 여전히 언젠가 오를 21층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는 판트를 도끼눈으로 살짝 노려보고, 연우에게로 고개를 돌리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탁인데, 오라버니는 부디 제발 저 두 사람을 닮지 말아 주세요. 요즘 계속 조금씩 닮아 가시는 것 같아요…….”

이래서는 정말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는 말투.

하지만 연우는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면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두 눈이 호선을 그렸다.

에도라는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정말 하루하루가 늙는 기분이었다.

“하아!”

“그보다 오늘 밤부터 다시 탑을 오를 거라고 들었는데.”

연우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에도라는 그런 연우가 밉다는 듯이 샐쭉하니 살짝 노려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못 본 새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법도 하건만, 바로 탑 이야기부터라니. 정말 연우답다 싶었다.

“그리핀을 우선 어비스 터틀이 있던 지역에다 데려다 놓고요. 이미 시스템의 인정은 받았으니 뒤의 절차도 큰 어려움 없이 끝날 것 같아요. 그럼 저희도 바로 움직여야죠. 그동안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미적댔으니까요.”

“그럼 23층에서 만나자.”

“23층이요?”

“한동안 계속 거기서 머물 것 같아서.”

에도라는 뒷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초심자 구간에서처럼 같이 플레이하자는 의미.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네. 그럼 거기서 봬요.”

* * *

연우는 판트와 에도라가 탑에 오르는 것을 배웅하고, 탑 외 지역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왜 같이 가지 않냐고 물었지만, 연우는 고개를 저으면서 딱 잘라 말했다.

-준비할 게 있어서.

21층은 여러 괴물들의 잔상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올포원을 비롯해서 앞으로 그가 반드시 꺾어야만 하는 상대들의 과거가 묶여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당연히 연우로서는 전력을 다해 도전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재료도 구한 김에 전력을 재정비할 생각이었다.

‘사과도 해야 하고.’

당연히 연우가 찾은 곳은 헤노바의 대장간이었다.

어비스 터틀의 등껍질과 허물을 취급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사실 헤노바 외에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반 년 전에 맡겨 뒀던 샤논과 한령의 무기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과하지?’

연우는 헤노바가 자신을 보자마자 망치라도 던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했던 기한을 훌쩍 지나 버린 데다가, 에도라에게 듣기로는 자신이 계속 오질 않아서 외뿔부족을 찾아가기까지 했다고 했으니. 크게 걱정을 했던 것 같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헤노바의 입장으로서는 별다른 말도 남기지 않고 잠수를 타 버린 격이었으니까.

친한 사람을 잃는다는 고통을 알고 있는 그에게 몹쓸 짓을 한 셈이었다.

그래서 연우는 어떻게 그의 마음을 달랠까 걱정했다. 평소처럼 농담으로 때우거나, 능글맞게 굴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도무지 좋은 생각이 떠오르질 않아 머릿속이 멍했다. 이럴 때는 인간관계에 서툴기만 한 자신이 너무 갑갑했다.

그렇게 갖가지 생각을 하면서 도착한 대장간 앞은.

“지금부터 재고 상품, 떨이 판매한다. 품목은 소드 브레이커와 칼 9자루! 하나씩 보여 줄 테니까 가격 불러, 이것들아!”

“으아! 헤노바가 또 미친 짓한다!”

“5만 포인트!”

“미쳤냐! 헤노바가 만든 물건을 그딴 가격에 부르게? 10만 포인트! 그거 나한테 넘겨!”

“12만!”

헤노바가 높게 마련된 단상 위에 올라가 짧은 팔로 칼을 높이 들고 있었다.

즉석 경매라도 이뤄지는 중인지,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구름 떼처럼 몰려 흥정을 해 대는 중이었다.

그런데 헤노바가 든 칼이 왠지 모르게 연우의 눈에 낯이 익었다. 샤논이 먼저 눈치채고 빽 소리를 질렀다.

「야! 가서 막아! 저거 내 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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