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세트(Set) (4)
연우는 헤노바의 속내를 깨닫고 쓰게 웃고 말았다.
‘팔아 치워 버릴 생각이신 것 같은데.’
속 썩이기만 하는 놈의 물건을 계속 두고 있어 봤자 울화통만 터지겠지. 그리고 어떻게 들었는지 몰라도 자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욱한 마음에 치워 버릴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헤노바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역시 불같은 성격은 어디 가질 않으시는군.’
그렇게 살짝 웃는데, 답답해하는 샤논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그만 좀 웃고 저거 말리라고! 드워프! 그것도 5대 명장이 만든 물건이 이상한 놈팡이들한테 팔린단 말이야! 으아아! 저기 팔리려고 한다! 좀 뛰어!」
사실 헤노바가 검을 만들어 줄 거란 말에 가장 기대했던 사람이 샤논이었다.
무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무구를 탐낼 수밖에 없고, 당연히 명장이 만든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특히 헤노바는 탑에서도 손꼽히는 5대 명장 중 하나. 비록 아르티야와 엮여서 좋은 꼴을 못 보게 되었지만, 그래도 알음알음 그의 물건을 구해 보고자 손을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그건 한령도 마찬가지였다. 생전에 가지고 있던 9자루의 보도가 전부 신과 악마의 이름을 딸 만큼 대단한 것들이었다지만, 헤노바에게 충분한 재료와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에 못지않은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헤노바가 만들 거라던 아홉 칼을 보고 싶었는데. 저렇게 떨이로 팔아 치우려는 것을 보니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맛있는 음식이 있다고 해도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눈앞에다 줄 것처럼 던져두고 빼앗는 것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없었다.
결국 연우는 계속되는 샤논과 한령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순보까지 밟아 가며 대장간 앞에 도착했다.
즉석 경매는 한창 과열되고 있는 중이었다.
“25만!”
“26.5!”
“이런 미친놈들이. 30만!”
평소에는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5대 명장의 칼이 떠억 하니 눈앞에 있으니. 플레이어들은 경쟁 심리까지 붙어서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저것을 가지고 말겠다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낙오자들이 가득하다는 탑 외 지역에서 저만한 물건이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저것을 가질 수 있으면 딴 데다 팔아도 훨씬 마진이 남을 테니 횡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액수가 올라가려는데.
“50만!”
갑자기 혼란스럽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뒤쪽으로 쏠렸다.
50만 포인트라면 웬만한 중소 클랜의 운영비를 뺨때기 두어 번 때리고 남을 정도였다. 어느 미친 놈이 훼방이라도 놓으려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연우의 가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도, 독식자!”
“저 사람이 이런 곳에는 왜……?”
“그새 잊었나? 독식자가 헤노바와 친하잖아.”
“제, 제기랄…… 송충이가 노는 곳에 뱀이 나타나면 어쩌자고.”
플레이어들은 이 이상 부르기가 난감했던지 슬쩍 뒤로 빠지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한창 칼을 높이 들고 있던 헤노바의 얼굴에 짜증이 섞였다.
그는 대놓고 연우를 노려봤고, 연우는 대신해서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그의 속을 뒤집어 놓던 능글맞은 웃음이었다.
“저 새끼가, 또……!”
헤노바가 이를 바득바득 갈던 그때, 한 플레이어가 손을 번쩍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6, 60만!”
“히익! 자, 자네 그만한 돈 있어?”
“저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손을 든 사람은 눈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꼭 도박판에 올인을 외친 사람처럼 보였다. 이 이상 부를 수 없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100만.”
“흐어억!”
그는 연우가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숫자를 듣고 기함을 하고 말았다.
다른 인파들도 더 이상 놀랄 기력도 없는지 소리 없이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연우는 팔짱을 끼면서 오만하게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더 없지? 그럼 낙찰받은 걸로 알지.”
“…….”
“…….”
헤노바는 한 번 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연우를 노려보다가, 다음 칼을 꺼냈다. 한령이 요구했던 칼 중 가장 폭이 좁은 칼이었다.
“그럼 이……!”
“100만.”
“……개 같은.”
연우는 헤노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100만 포인트를 불렀다.
입을 쩍 벌린 플레이어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연우는 그 뒤로도 계속 높은 액수를 아무렇지 않게 불러대는 미친 짓을 해 버렸다.
당연히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그게 말이 되냐며 따지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우는 안쪽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면서 인트레니안에서 보석을 여러 개 빼돌렸다.
레드 드래곤이 아끼는 몇 개 안 되는 마법 창고이니 만큼, 그 안에 있는 보석이나 재화는 하나같이 비싸고 귀한 것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인트레니안에 많은 돈이 담겨 있다고 해도 그 많은 돈은 쉽게 낼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사실상 현재 인트레니안에 있는 총 재산의 2/3만큼이나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알고 있었다.
헤노바는 분명 그가 준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으로 되돌려 준다는 것을.
아니, 되돌려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연우가 헤노바에게 가지는 고마운 마음은 값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생의 친구이자 아버지 같았던 존재. 그런 사람이니 인트레니안을 전부 달라고 해도 충분히 내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끼지 않고 지를 수 있었고, 연우에게 엿을 먹일 생각이었던 헤노바는 뜻대로 풀리질 않자 그를 노려보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아 댔다.
“빌어먹을 새끼.”
“칭찬 감사합니다.”
“갖고 가, 이 빌어먹을 놈아!”
헤노바는 들고 있던 소드 브레이커와 아홉 자루 보도를 왕창 집어 연우에게 세게 던졌다.
이걸 얻어맞고 볼썽사납게 나뒹굴든지, 아니면 귀찮게 일일이 줍고 다니라는 뜻이었지만.
연우는 이번에도 헤노바의 바람을 뭉개 버렸다.
연우는 손을 뻗어 마력을 쏘아 보내 검들을 칭칭 감았다. 그러자 소드 브레이커와 보도들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면서 연우의 품에 떨어졌다.
의념을 깨달으면서 이제 가벼운 물건쯤은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이이익!”
헤노바는 마지막 남은 수법까지 헛수고로 돌아가자 애꿎은 땅바닥만 두어 번 걷어차다가 홱 하고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인파들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연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그들의 눈빛을 무시하면서 소드 브레이커만 검집에서 뽑아 보았다.
스르릉-
기분 좋은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마치 설원을 옮겨 담은 것처럼 순백색으로 반짝이는 날. 거기다 한쪽에 나 있는 자글자글한 톱니바퀴는 짐승의 송곳니처럼 날카로웠다.
“와.”
“어떻게 저런 물건을 사람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미련이 남아 있던 사람들도, 탐욕에 젖어 있던 사람들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다른 생각을 모두 지우고 감탄만 남을 만큼 대단했다.
이제 막 검을 깨우치기 시작한 연우가 보기에도 절대 범상치가 않은 물건이었다.
용마안으로 살짝 살펴봐도 결이 거의 없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드워프, 드워프라지만…… 저게 가능해? 저런 걸 하루 만에 만들었다고? 딱 봐도 S급은 넘어 보이는데?」
샤논은 경악을 넘어 아예 비명을 질렀다. 마치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만난 신도라도 된 듯한 모습이었다.
[헤노바의 곧고 비틀린 검]
분류: 양손 장검
등급: S~SS
설명: 드워프 헤노바가 꼭두새벽 밤의 이슬을 맞아 가며 두들긴 검. 소드 브레이커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양쪽 날의 용도가 서로 다르게 제작되었다.
곧은 날이 선 오른쪽은 날이 가볍고 날카로워 상대를 빠르게 휘몰아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비틀린 날이 선 왼쪽은 톱니 날에 무게가 가득 실려 적이 착용한 방어구까지 찢어발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다용도로 쓰일 수 있지만, 무게 균형의 편차가 심해 숙련도가 붙지 않으면 오히려 주인이 다칠 우려가 크다. 바람의 축복과 저주가 담겨 있다.
* 곧게 뻗히는 강풍
바람의 축복에 따라, 오른쪽 날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주인의 민첩성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공격 속도가 빨라질수록 공격력도 크게 증폭되어 거미줄처럼 촘촘한 칼질 속에 적을 가둘 수 있게 된다.
거미줄 칼질에 갇힌 적은 혼란 상태에 잠겨 크게 공격력이 하락하게 된다.
* 비틀리게 감기는 선풍
바람의 저주에 따라, 왼쪽 날을 휘두르면 무게가 실린 바람이 돌개바람을 그린다. 최대 12개의 돌개바람을 연속으로 생성할 수 있으며, 이 속에 갇힌 적은 방어구의 내구도가 크게 하락해 파손 될 확률이 높아진다.
숙련도에 따라 두 개의 옵션을 번갈아 사용할 수 있으며, 여기에 따라 공격력도 천차만별로 달라져 최대 2,300%의 위력까지 보인다.
「으아아! 이 미친 주인아! 이런 걸 두고 여태 안 찾아오고 뭘 하고 있었던 거냐아아!」
샤논은 소드 브레이커의 설명을 읽고 이제는 아예 미쳐 버리려 하고 있었다.
한령도 동감한다는 듯이 짙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못해도 ‘수작’ 수준은 될 텐데.」
「수작? 수작이 뭐야! ‘걸작’ 급은 되겠구만!」
수작과 걸작. 연우도 야금술을 익혔기 때문에 두 명칭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무술가의 등급이 달인, 명인, 진인 급으로 이뤄지듯, 수작과 걸작은 대장장이 중에서도 최고에만 오른 실력자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등급이었다.
「이런 것을 하루 만에 만들어 낼 수는 없을 테니, 아무래도 주인께서 나타나지 않았던 반 년 동안 차근차근히 개변(改變)에 개변을 거듭했던 것 같습니다.」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개변에 개변을 거듭했다는 말이 가슴을 울렸다.
애당초 원래 연우에게 줄 물건이었으니 그를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 놨단 뜻이었다.
그리고 다른 보도들도 소드 브레이커만큼에 비견할 만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수작과 걸작 급의 물건들이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반 년이란 시간으로도 절대 만들 수 없었을 텐데. 밤이 새도록 두들기기라도 한 것일까.
대체 자신은 헤노바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걸까?
「하여간 저 미친 새끼들. 이런 물건을 두고, 뭐? 60만? 눈이 삔 거야, 아니면 등쳐 먹으려고 했던 거야? 저딴 식으로 사는 놈들이니 당연히 탑 외 지역에서나 살지! 개 같은 새끼들!」
샤논은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 나와 한바탕 칼춤이라도 출 태세였다. 연우가 재빨리 제동을 걸어 그러진 못했지만, 짙은 살의는 그림자 밖으로 잔뜩 풍겼다.
플레이어들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담력이 약한 녀석들은 바지에 실례를 하면서 제자리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들은 행여 연우의 눈에 띄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연우는 한참 동안 그렇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한령이 깊은 침묵 끝에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군…….」
‘왜?’
「제 것도 확인할 수 없겠…… 습니까?」
그도 빨리 보도들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보였다.
‘들어가서 확인해.’
연우는 쓰게 웃으면서 인트레니안을 열어 소드 브레이커와 보도들을 전부 던져 넣었다.
그림자가 두 개로 길쭉하게 늘어나면서 같이 아공간 너머로 들어갔다.
아마 두 사람 다 안쪽에서 물건들을 확인하고 쓰임새를 파악하느라 한동안 정신없을 게 분명했다.
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장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깡! 깡! 깡!
어느새 헤노바는 화로에 불을 켜 놓고 주물을 두들기고 있었다. 망치질 소리에 짜증이 다분하게 묻어났다.
“썅! 왜 왔어?”
“떨이 상품을 천만 골드나 주고 산 큰손입니다. 너무 박대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이 새끼가 또?”
헤노바는 정말 손에 쥐고 있는 망치를 냅다 던질 것 같았다.
연우는 쓰게 웃었다. 자기도 모르게 또 반사적으로 놀리고 말았다. 어쩌다 보니 패시브 스킬처럼 된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데.
결국 연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망치를 던지려던 헤노바의 손길이 멈칫거렸다. 이맛살이 살짝 찡그러졌다.
“뭐가?”
“소식조차 전달드리지 못했던 것, 죄송했습니다. 늦을 거라고 연락이라도 드릴 수 있는 건데, 제 실수였습니다.”
“……니미.”
이렇게 나와 버리니 망치를 냅다 던지기도 힘들다.
헤노바는 들고 있던 망치를 바닥에다 내려놓고,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곰방대를 들어 입에 물었다.
끔뻑, 끔뻑, 한참 동안 그렇게 연기를 들이켠 뒤에야 치밀어 올랐던 짜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둘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난 말이다.”
침묵을 깬 건, 헤노바였다.
“더 이상 누구를 잃고 싶지 않다.”
“…….”
“더 이상 그런 것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고, 전전긍긍해하며 속앓이를 하는 것도 싫다.”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만 알아 둬.”
헤노바는 그렇게 말하고, 화로 쪽으로 뒤돌아서 다시 망치를 들었다.
땅, 땅, 따앙-
연우는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슬쩍 헤노바 옆에 만들어진 작은 화로 앞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풀무질을 해서 불길을 키우고 망치를 들었다. 쇳물이 끓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장간은 두 사람이 나란히 두들기는 망치 소리로 가득 찼다.
땅, 땅, 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