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71화 (171/862)

21화. 세트(Set) (5)

연우는 크라슈나의 단검을 꺼냈다.

튜토리얼 때부터 신비 상인에게서 구매해 아주 요긴하게 쓰던 단검이었다.

사실 ‘수행자의 의지’라는 옵션이 없었더라면 더 이상 쓰지 않았을 물건이기도 했다.

등급도 D+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그동안 이리저리 너무 험하게 써서 날도 거의 다 빠지고 내구도도 거의 바닥을 쳤다.

그래도 손에 너무 잘 익은 터라, 그동안 꾸준히 관리를 하며 쓰려고 했었지만.

20층에서의 수련이 너무 고됐던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구도도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평소의 연우였다면 이제 쓸모가 다 했다면서 버리고 다른 단검을 구했을 것이다.

인트레니안에 이보다 더 좋은 단검도 있는 데다가, 자신이 직접 제작해도 이보다 등급 높은 단검을 만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연우는 크라슈나의 단검은 쉽게 버리지 못했다.

미련이 남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너무 정이 깊게 배어 쉽게 버리질 못했다. 어쩌면 튜토리얼에서부터 같이 고생을 한 단검이기 때문에 의미가 더 각별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연우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크라슈나의 단검을 한번 크게 뜯어보고 개조하고자 했다.

마침 괜찮은 재료들도 있었으니까. 특히 꼬리 뱀의 허물이 가장 눈에 띄었다.

질기고 튼튼하며, 맹독 특성을 갖고 있어 무기류로 만들기 좋다던 설명 문구.

왠지 모르게 크라슈나의 단검과 상성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용마안]

연우는 새로운 동공을 활짝 열어 크라슈나의 단검을 따라 세로로 길게 난 결을 관찰했다.

그리고 날을 손잡이와 분리시켜 바닥에다 놓고, 사람 팔뚝만 한 길이를 가진 굵직한 정(釘)을 가져와 끝을 결에다 갖다 댔다. 도구로 날을 단단히 고정시킨 뒤에, 망치로 정을 세게 내리쳤다.

까앙!

깡!

몇 번 그런 식으로 반복하자 날이 총 5개로 분리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각자 따로 화로에 집어 넣어서 시뻘겋게 열이 오르게 했다.

연우는 그것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이번에는 꼬리 뱀의 허물을 꺼내서 작은 탁상에다 반듯하게 펴고 몽둥이로 부드럽게 두들겼다. 무두질로 허물이 조금 더 반듯하고 질길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뒤로도 연우는 인트레니안에서 몇 가지 물건을 더 꺼냈다. 주로 각 층계를 오르면서 히든 피스로 얻었던 광석들. 그중에는 19층에서 어렵게 구한 소량의 오리할콘도 있었다.

오리할콘은 미스릴과 맞먹을 정도로 뛰어난 마력 전도율을 자랑하는데, 내구도는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해서 아주 비싼 값에 거래되는 재료였다.

연우는 그런 것을 반으로 똑 떼어 내 한쪽에서 열을 내고 있는 용광로에다가 집어던졌다.

그리고 가만히 오리할콘이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웬만한 온도로는 녹지 않을 것을 감안해 성화로 화력을 최대로 출력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해 두면 오리할콘에 성화의 기운도 일부 묻어나기 때문에 괜찮은 방법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태껏 연우를 못 본 척하면서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고 있던 헤노바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연우에게 섭섭했던 것일 뿐 크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조금 남아 있던 짜증도 연우가 사과를 하면서 다 풀어진 상태.

다만, 자존심 강한 그의 성격 때문에 말을 붙일 기회를 찾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는데.

연우가 계속 기상천외한 재료들을 꺼내니 눈길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장장이로서 저런 귀중한 재료들로 뭘 할 것인지 궁금하면서도, 허튼짓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같이 들었다.

연우는 힐끔힐끔 훔쳐보는 헤노바를 보면서 작게 웃었다. 그냥 어떤 건지 슬쩍 물어봐도 될 텐데. 참 융통성이 없는 양반이다 싶었다.

하긴 그러니 매번 그가 놀릴 때마다 쉽게 넘어가는 것이겠지만.

연우는 자신이 지은 죄도 있고 해서, 슬쩍 자신이 굽히고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저, 헤노바.”

“흥! 무슨 일이냐?”

헤노바는 재빨리 못 본 척 고개를 자기 주물 쪽으로 돌리면서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귓가가 쫑긋거리는 걸 연우는 놓치지 않았다.

연우는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단검을 하나 개조하고 싶습니다만. 혹시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요?”

“내게서 야금술을 배웠다는 놈이 아직도 물건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게야?”

“제가 가진 재주야 아직 많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아주 간단한 물건을 만드는 정도나, 날붙이를 관리하는 정도라면 괜찮습니다만. 개조는 전혀 별개의 영역이라서요.”

연우가 목소리에 힘을 조금씩 주었다.

“하지만 야금술에서 헤노바는 제 스승님이 아니십니까? 뛰어난 명장이기도 하시고요. 당연히 헤노바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씰룩. 씰룩. 헤노바의 귀가 계속 들썩거렸다. 귓바퀴가 살짝 빨개졌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스승’과 ‘뛰어난 명장’이라는 단어가 듣기 좋았던지, 헤노바는 짐짓 근엄한 척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험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래. 뭐가 궁금한 것이냐?”

“사실 제가 이번에 좋은 재료들을 꽤 많이 구해서 말입니다.”

“음? 재료?”

연우는 헤노바가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고, 슬슬 미끼를 던질 준비를 했다.

“보시겠습니까?”

“꺼내 봐.”

연우는 헤노바의 생각이 바뀔세라 재빨리 인트레니안을 열어 안에 있던 머리 거북이의 등껍질과 허무룡의 역린을 비롯해서 몇 가지 광석을 같이 꺼냈다.

순간, 헤노바의 눈빛이 달라졌다.

“너, 이거……?”

“이것과 이것은 어비스 터틀과 허무룡으로부터 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광석들은…….”

헤노바는 연우가 11층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서 판트 남매로부터 전후 사정을 들어 대강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수들의 부위를 가져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주름진 눈이 동그랗게 떠질 정도였다.

사실 오리할콘 같은 광석은 그의 눈에 크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것이야 비싸긴 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등껍질과 역린은 달랐다. 이런 건 천금을 주어도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신수가 죽어야 구할 수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쉽게 취할 생각을 못하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걸 눈앞에 떡하니 내놓았다. 당연히 헤노바의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대장장이로서의 욕심이 활활 타올랐다. 손끝이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으험! 이, 이것들을 어떻…… 게 하려고?”

헤노바는 놀란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진중한 어투로 물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연우는 드디어 헤노바가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마웠다.

“전체적으로 장비를 재정비하고 싶습니다.”

헤노바의 두 눈이 깊게 착 가라앉았다.

“재정비라.”

“예. 그동안 시간도 꽤 많이 흘렀고, 저 역시 그때와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하긴. 한 번 재점검할 때가 되긴 했지.”

연우가 처음 헤노바를 만나서 마장철면과 마장대검, 그리고 기에스의 눈을 갖게 된 게 탑을 오르기 전이었으니.

사실 따지자면 많이 늦은 편이었다.

이를테면, 플레이어가 착용할 장비는 자동차의 타이어나 브레이크 패드처럼 소모품에 가까웠다.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내구도는 계속 하락할 수밖에 없고, 옵션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시시각각 변하는 플레이어의 스타일에 맞지 않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보통 5개의 층계를 기준으로, 갖고 있던 장비들을 재점검하는 편이었다.

필요 없는 장비는 따로 처분을 하고, 속성과 능력, 그리고 스킬 트리에 맞는 옵션을 찾아 새롭게 장비를 꾸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연우는 그동안 한 차례도 장비를 바꾸지 않았으니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었다.

물론, 이건 연우가 갖고 있는 장비들이 하나같이 저층 구간 플레이어에게 어울리지 않는 최상급들이라는 것도 한몫 단단히 했다.

비그리드와 아이기스, 칠흑왕의 절망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장대검과 마장철면은 중층 구간의 플레이어에게 어울리는 편이었고, 기에스의 눈은 랭커들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튜토리얼에서 구했던 크라슈나의 단검이나 몬스터 5색의 보석, 고블린 왕의 눈이 이제는 조금 의미가 퇴색한 편이었지만, 연우는 이마저도 아직까지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일단은 내가 가능한 전투 방식이 다채로운 편이니까. 원래 그런 방향으로 스킬 트리를 맞추기도 했었지만.’

그리고 이건 전부 연우가 처음부터 계획하던 방향이기도 했다.

연우는 애초 언젠가 용체 각성을 이룰 것을 염두에 뒀었다. 그래서 마력회로의 확장에 신경을 썼고, 그 뒤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싸움 방식인 민첩성과 기동력, 그리고 감각에 중점을 뒀다.

아프리카에서 사선을 숱하게 넘나들었던 덕분에,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물론, 칠흑왕의 절망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보물이었지만.

또한, 연우가 아티팩트와 옵션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방향으로 수련을 했던 측면도 강했다.

여하튼 그런 여러 이유를 바탕으로, 여태껏 크게 장비에 구애를 받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제는 한 번 바꿀 필요를 절실히 느끼는 중이었다. 20층에서 오러를 깨우치고, 선술을 익히면서 육체적인 기량이 월등하게 성장했다. 영혼의 ‘격’이 한 차례 크게 성장한 느낌.

당연히 이것을 보조할 만한 수단이 필요해졌다. 사실 지금도 달라진 육체와 장비가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물론, 21층에 도전하기 전에 완전을 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실상은 스스로를 탈바꿈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장 컸다.

“……그렇게 된 겁니다.”

연우는 이런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헤노바에게 상세하게 털어 놓았다.

그라면 충분히 해답을 내려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흐음.”

헤노바는 간만에 진중한 표정으로 들어가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두들기고 있던 주물이 있었지만 어느새 싸늘하게 식었다. 화로의 불길도 풀무질을 하지 않아 천천히 사그라졌다.

연우는 헤노바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헤노바가 천천히 곰방대에서 입을 뗐다.

“그러니까 돈도 많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바꾸고 싶다, 이 말이지?”

“따지자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몇 개는 직접 네 손길이 닿았으면 좋겠고?”

“욕심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제가 만든 물건이 제게 가장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헤노바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좋은 생각이다. 자신의 정념이 깃든 물건이야말로, 주인과 가장 마음이 잘 맞는 법이지.”

연우가 크라슈나의 단검을 개조하겠다고 나선 것은 절대 단순히 헤노바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젠 자신의 손으로 제대로 된 아티팩트를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어서였다.

야금술을 익힌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희망 중 하나였으니까.

또한, 이제 마법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기 시작했으니 마도공학을 깨우치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브라함을 만나기 전에라도, 야금술을 본격적으로 단련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내게 그 많은 돈을 던져 준 건 이것 때문이로군.”

헤노바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봤다.

“아니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

헤노바는 연우의 뻔뻔한 대답에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는지 가볍게 미소를 흘렸다.

연우가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절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다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하튼 싹 다 바꾸는 작업을 내게 맡기고 싶다는 것이지?”

“예.”

“그런데 그 말, 무슨 뜻인지 잘 알고 하는 소리냐?”

“예. 알고 있습니다.”

연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노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넌 전혀 모르고 있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플레이어에게 알맞은 장비를 제작한다는 것.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당연하고 능률적인 행동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 따져 보면 아주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플레이어가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들을 낱낱이 내놓는다는 의미였으니까.

능력치, 속성력, 스킬 트리, 전투 스타일, 체격, 체형, 마력의 등급, 앞으로의 성장 계획…….

그 방대하고 복잡한 체계를 수치화해서 대장장이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장단점과 약점을 모두 내보여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즉, 대장장이가 나쁜 마음을 먹고, 혹은, 실수로라도 정보가 유출된다면 뼈아픈 타격이 될 수 있었다.

헤노바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했다.

현재 탑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존재를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연우를 꼽을 수 있었다. 50층 이후부터는 아직 덜 관심을 기울인다지만, 그래도 한 번쯤 지나가면서라도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 달리 공개된 정보는 아주 적은 편이었다.

그저 무술에 제법 뛰어나고 기동력을 이용한 전투가 주를 이룬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스킬 트리에 관련된 사항은 생각보다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연우의 정보를 요구하는 곳은 아주 많았다.

헤노바는 그런 점을 지적하고, 연우에게 좀 더 깊게 고민을 해 보라고 말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연우는 아직 자신이 얼마나 주목을 받는 루키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뇨. 알고 있습니다.”

연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 이 일을 맡기고 싶다는 눈빛. 아니, 당신이 아니면 믿을 사람이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서, 헤노바는 또다시 누군가를 떠올리고 말았다.

절대적인 신뢰로 자신을 보던 꼬맹이가.

“……좋아. 도와주마. 하지만 어디까지나 메인은 나다. 너는 옆에서 보조에나 충실해. 농땡이 피우면, 망치로 뚝배기 깨 버릴 줄 알아.”

가면 아래로, 연우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헤노바의 대장간은 밤이 새도록 불이 꺼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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