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72화 (172/862)

22화. 세트(Set) (6)

땅, 땅, 따앙-

몇 시간째, 헤노바는 쉬지 않고 묵묵히 주물만 계속 두들겨 대는 중이었다.

한쪽 옆에는 거의 해체되다시피 한 기에스의 눈과 역시나 여러 갈래로 미리 쪼개 놓은 머리 거북이의 등껍질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헤노바가 가장 먼저 개조하기로 선택한 건 바로 흉갑 부위였다.

전체 방어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부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흉갑의 무게나 재질에 따라서 전투 스타일도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장 손이 많이 가는 곳이기도 했다.

헤노바는 이런 흉갑 부위를 중심으로, 어깨의 견장(肩章)과 건틀릿, 벨트, 바지, 부츠, 그리고 가면까지 전부 한 개의 세트(Set)로 통일시킬 생각이었다.

세트 아티팩트가 주는 부가적인 효과도 아주 뛰어난 편이었으니까.

때마침 괜찮은 세트도 있었다. 마장 시리즈. 그것에 한데 몰아넣으면 될 것 같았다.

‘마장이라.’

헤노바는 망치를 두들기다가 살짝 떠오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마장 시리즈. 사실 이걸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장 첫 번째 물품이었던 마장대검은 원래 다른 주인에게로 갈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장대검은 끝내 원주인에게로 가지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새로운 주인을 맞아 그런대로 잘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헤노바는 문득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마장대검은 원래 처음부터 원주인에게 갈 운명이 아니었던 걸까. 다른 인연을 찾아 움직이고, 거기에 맞춰서 새롭게 개화될 운명이었던 게 아닐까.

헤노바는 오랫동안 쇠를 만지면서, 쇠에게도 그 나름의 운명이 있다고 굳게 믿는 편이었다.

그저 광석으로만 있을 때에는 단순한 무생물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의 손길을 타고, 사념이 스며 들고, 세월이 묻어나면서 조금씩 의지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헤노바가 봤을 때, 마장대검은 비록 자신의 손을 떠나고 원주인에게 가지 못했지만, 새로운 주인의 곁에서 행복해하고 있었다.

비록 그 길은 가시밭길일지언정, 그 위를 걷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헤노바는 그런 마장대검에게 친구들을 여럿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앞으로 계속 걸을 가시밭길을 같이 걸어 줄 동료들을.

“이건 순전히 개조나 개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재조(再造)나 다름없는 수준인데. 하여간 못된 놈. 늙은이를 이런 식으로 부려 먹어.”

한참 뒤, 헤노바는 잠시 쉴 겸 해서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곰방대를 가볍게 물며 툴툴거렸다. 하지만 말투와 다르게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사실 헤노바는 기에스의 눈을 어떤 방식으로 개조, 아니, 재조를 할지 확실하게 정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처음에는 그냥 만들어 둔 마갑 형태를 중심으로 필요한 것들을 추가할까 싶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흐음.”

곰방대를 무는 내내 이맛살이 살짝 좁혀졌다.

그러다 헤노바는 허공을 짚어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플레이어 정보]

* 신체 정보

이름: ???

출신 행성: ???

성향: 중립 (악 61%)

키: 182cm

몸무게: 89kg

특성: 냉혈, ???, ???, 수도자

칭호: 괴물사냥꾼, 개척자, 마력의 축복을 받은, 신수의 계승자, 죽음을 이끄는 자, 미후왕의 후예

* 신체 능력

힘: 812 (+90)

민첩: 851 (+101)

체력: 778 (+88)

마력: 1,052 (+125)

* 스킬

???(51.2%), 초감각(15.9%), 시간 예지(2.0%), 물리 내성(70.9%), 시차 괴리(8.9), 바토리의 흡혈검(42.8%), 성화(10.8%) 순보(68.9%), 마력회로(70.1%), 천익기공(48.6%), 팔극검(80.2%), 푸른 정령의 가호(18.0%), 불벼락(5.5%), 어기전성(15.6%), 72선술(1.2%)

* 속성력

화(火): 102 (+201)

수(水): 35 (+30)

……

암(暗): 88 (+65)

악(惡): 90 (+100)

……

연우가 참고해 달라면서 넘긴 자신의 스테이터스 창이었다.

애초 헤노바는 여러 방법으로 연우의 신장과 무게, 그리고 근육의 발달 정도를 측정하려고 했지만, 연우는 아예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다 넘겨줬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건지, 아니면 자신을 그만큼 믿는다는 건지.

머리가 명석한 녀석이니 만큼 후자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스테이터스 정보를 통째로 넘길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아주 중요하다 싶은 것들은 모두 ‘???’라는 형태로 블라인드 처리되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내용은 볼 수 있게 해 놨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받고 난 뒤.

헤노바는 가만히 정보를 분석하면서 연우에게 가장 알맞고 필요한 방향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직접 측정한 것보다야 탑의 시스템이 제공하는 정확한 수치가 파악하기 훨씬 쉬웠으니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장비를 제작하는 데 더 어려움이 따르는 부분도 있었다.

재료나 부품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연우가 넘겨준 것만도 해도 아주 많았고, 부족한 것이야 돈으로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이냐였다.

스테이터스는 전체적으로 마력에 치중되어 있는 편이었고, 그 외에는 민첩성이 남달리 계수가 높았다.

그렇다는 건, 여태 그러했던 것처럼 경장갑으로 가도 될 것이다. 어쩌면 무게를 더 줄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게를 너무 낮게 잡게 되면 방어력이 한없이 처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어비스 터틀의 등껍질은 무게가 상당했다. 하나하나에 경량화 마법을 각인시켜서 단점을 해소한다고 해도, 재질이 너무 빳빳하다 보니 움직임에 많은 무리가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막상 천 옷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흐으음. 정말이지 이런 걸 두고 누가 저층 구간의 플레이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웬만한 랭커쯤은 쉽게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리고 이건 앞으로 50층에 닿을 때까지 더 크게 성장할 기미가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최소한 그래도 헤노바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때까지는 입고 다녀도 쪽팔리지 않을 물건을 만들어 줘야만 했다.

그렇게 헤노바의 고민은 깊게 이어졌다.

그리고.

헤노바의 두 눈은 유독 한 곳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물음표로 표시된 이름과 출신 행성 위치에.

* * *

우드득. 우득.

가볍게 몸을 풀 때마다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조금 개운해지는 느낌이 든 뒤에야 깊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대장간 일에 익숙한 헤노바와 다르게, 그는 명상을 제외하면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보니 이렇게 수시로 나와서 몸을 풀어 줘야만 했다.

그래도 이렇게 뭔가 깊게 몰두하고 나니 기분은 아주 좋았다. 밤바람도 아주 상쾌했다.

연우는 초감각의 영역을 넓게 퍼뜨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탑 외 지역에서도 최고 외곽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 오래전에 연우가 개인적으로 수련을 하던 장 소이기도 했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도중에 누가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검은 팔찌를 통해 부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 결계.’

「명에. 따르겠. 습니다.」

부의 대답과 함께 초감각이 퍼진 영역을 따라 푸르스름한 파문 이 퍼져 나가더니 단단한 결계가 구축되었다.

결계 마법은 제법 높은 수준의 이해도를 필요로 하는 마법. 하지만 부는 이미 그 정도를 어렵지 않게 소화해 낼 정도로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역시 마법에 특화된 리치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룬 마법이 생각보다 부에게 잘 맞는 건지도 몰랐다.

연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네메시스. 니케.”

부름에 따라 가슴팍 안쪽에 설치된 현자의 돌에서부터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앞쪽 공간이 활짝 열리면서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는 네메시스와 연우의 상반신만 한 크기가 된 니케가 나타났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연우는 아직까지 영 낯설기만 한 두 이름을 두고 입맛을 다셨다. 역시 크르릉과 짹짹이가 정감이 가고 참 좋은데.

하지만 새로운 이름을 얻고 자신만만한 표정이 된 둘을 보니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름 바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랬다간 정말 계약을 파기시켜 버릴 테니까.』

『그런데 왜 불렀어, 주인?』

으름장을 놓는 네메시스와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니케. 확실히 녀석들은 같은 신수이면서도 서로 성격이 정반대였다.

“너희들도 그동안 꽤 많이 달라진 것 같으니까. 확인 좀 해 두고 싶어서.”

『전력 확인이란 건가? 좋은 마음가짐이로군.』

『흐흐흐. 주인, 나 달라진 거 보면 아주아주 많이 놀랄걸?』

니케는 부리를 날개로 가리면서 키득거렸다. 뭐가 그리 재미난지 눈가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럼 먼저 니케부터 볼까?”

『아니. 네메시스부터 봐. 주인공은 원래 가장 마지막에 보여 주는 거라고 했어!』

대체 저런 말은 어디서 보고 배우는 건지. 연우는 살짝 웃음을 흘리다가 네메시스를 봤다.

네메시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앞으로 나섰다. 녀석은 아직 많이 어린 니케를 돌봐주는 큰형 같은 느낌이었다.

“현자의 돌은, 많은 도움이 됐나?”

네메시스가 커다란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도움이 되다마다. 아니, 도움이 아니라 ‘격’이 달라질 정도였다.』

연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정도였다고?”

『그래.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힘을 갈무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 몰라. 어쩌면 수 년이 걸렸을지도 모르고, 그 과정에서 아주 많은 것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네메시스가 그동안 현자의 돌에서 잠만 잔 것 같았지만, 사실은 힘을 갈무리하느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알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으로도 많이 모자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 환룡일 때의 힘을 일부 갖고 있는 데다가, 오랫동안 공허에서 머물며 터득하게 된 속성력도 있었고, 또다시 연우가 부여한 4대 신수의 힘도 있었다.

이 많은 것들을 수용하려는 건 힘든 작업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네메시스는 그동안 전생에서 이뤘던 위치까지 빨리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여기에 현자의 돌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현자의 돌은 단순히 포근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힘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조 역할을 해 주고, 나아가 각 기운들이 하나로 녹아내릴 수 있도록 유도해 주는 역할까지 했다. 거기다 ‘격’의 성장까지 이뤘으니.

그리고 그런데도 현자의 돌이 가진 기능이 무엇인지 전부 감이 잡히질 않을 정도였다.

네메시스는 앞으로도 계속 현자의 돌에 머무는 한, 발전이 멈출 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 신묘한 돌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지?』

그리고 그런 물질을 여태 보지 못했던 네메시스로서는 자연스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드래곤 하트가 아니고서야 이런 마력기관이 있을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연우는 쓰게만 웃을 뿐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았다.

네메시스의 성격 상, 현자의 돌의 탄생 계기를 듣고 난다면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니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연우는 그동안 현자의 돌에 관련된 정보를 임의로 차단해 두고 있었다. 녀석들이 읽을 수 있는 범위가 표층 의식이 한계인 게 다행이었다.

“일단 확인부터 하자.”

『그러지.』

네메시스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원래 내가 갖고 있던 고유 스킬은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네메시스가 ‘미리내’라는 이름을 갖고 있을 때에 가졌던 고유 스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환몽(幻夢)’과 ‘용의 기둥’이었지.”

환룡이란 신수는 원래 뛰어난 마법 저항력을 갖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그래서 외부 마법으로부터 충격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자신도 마법 계통 스킬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물리적 공격을 주로 삼았다.

미리내도 이런 특성에 기반을 두었다.

환몽은 넓은 지역에 걸쳐 마법의 위력을 대거 낮춰 주는 효과를 자랑했고, 용의 기둥은 인위적으로 돌풍을 일으켜 주변을 휩쓸고 다니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한때 탑 내에서는 ‘헤븐 윙이 강림한 곳에는 마법사가 발을 붙일 곳이 없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오죽하면 ‘마법 학살자’라는 칭호까지 얻었을까.

네메시스는 그런 과거를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맞아. 그리고 이번에 갖게 된 것도 그 두 가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니, 직접 눈으로 보는 게 편하겠지.』

네미시스는 그 말과 함께 갑자기 눈을 감았다.

『꿈이…… 저문다.』

시동어를 입에 담는 순간.

화아악-

네메시스를 둘러싼 공간이 마치 먹물을 잔뜩 뿌린 것처럼 새카맣게 얼룩덜룩해졌다. 그리고 네메시스가 수채화처럼 흐려지더니 그대로 녹아들면서 사방으로 어둠이 줄기차게 퍼져 나갔다.

마치 20층 고행의 산에 찾아온 것처럼. 색채도, 소리도, 냄새도, 전부 어둠 속으로 녹아내렸다. 세상이 새카맣게 암전되고,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공허가 찾아왔다.

수 년 동안 공허 속을 거닐더니 그 힘을 품기라도 한 걸까.

이 속에 갇히게 되면 누구나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연우는 왠지 모르게 어두운 장막 뒤편에서 으쓱대고 있을 네메시스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을 두고, 연우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다 좋긴 한데. 시동어가 너무 중2병 같지 않나?”

연우는 왜 녀석이 네메시스란 이름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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