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76화 (8권) (176/862)

8권

1화. 그림자 도장 (1)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 다행이구나.”

헤노바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쀼루퉁하게 뭔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연우는 그런 헤노바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밖에 해 줄 수 없었다.

* * *

[이곳은 21층, ‘그림자 도장’의 관입니다.]

모든 정비가 끝난 뒤.

연우는 외뿔부족에 짧은 인사를 하고, 나이트 워치에서 필요한 것들을 확인한 후에 다시 탑을 올랐다.

연우는 무왕과 몇 마디 나누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말이 없었다. 뭔가 깊게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샤논과 한령도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우와 헤노바 사이에 뭔가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레베카만이 의문을 가지면서 물어봤다.

『그 영감님과는 무슨 사이인 거야?』

“은인.”

『은인?』

레베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연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유일한 사람. 당연히 은인이 아니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꽤 아끼는 것 같더라. 너를.』

마치 부모처럼 말이지.

레베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분위기가 아니란 걸 이제 읽었고, 굳이 하지 않아도 충분히 연우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연우도 가볍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두들기면서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힘을 내라면서 헤노바가 아끼던 재료까지 써서 그를 응원해 주고 있었다.

지금은 층계 공략에 집중할 때였다. 그리고 이곳 21층은 여러 모로 연우에게 중요한 곳이었다.

마당으로 향하는 정문을 통과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21층의 시련을 시작합니다.]

[시련: 그림자는 언제나 묵묵히 당신의 뒤를 따라다니는 충실한 동행자의 역할을 맡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림자들 중에서도 때때로 자신의 의지로 일어서고, 사고하며, 행동하고 싶어 하는 그림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장소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몸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림자들이 머무는 거처는 총 5개의 관문과 각 관문당 33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나의 관문을 선택해, 자신의 의지로 일어서려는 그림자들과 겨뤄서 20개 이상의 구획을 통과하세요.

그림자들을 많이 꺾으면 많이 꺾을수록 그들의 야욕도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연우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안쪽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는 데다가, 도장에 있는 모든 구역을 돌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그때, 연우 앞으로 녹색 포탈이 열렸다. 연우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의 공간 이동을 뜻하는 녹색. 대부분 관리자들이 쓰는 포탈이었다. 누가 오려는 걸까?

16층에서 라플라스를 만난 이후, 여태 다른 관리자는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궁금증은 더 커졌다. 위쪽 층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위급 상황이나 도움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관리자들도 잘 나타나지 않을 텐데.

이윽고 녹색 포탈 위로 작은 꼬마 아이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올라왔다. 동글동글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연우에게 다가가기를 꺼려 하는 투였다.

연우의 눈이 살짝 빛났다.

‘12지신의 해(亥), 루피.’

최고 등급의 관리자들은 원래 하이 랭커들도 쉽게 덤비지 못할 힘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자신만만하거나, 속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루피는 조금 달랐다.

유약해 보이는 생김새처럼 겁과 눈물이 많았다. 툭 하면 제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어 대서 다른 관리자들도 골치 아파할 정도였다.

그래서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도 루피는 골칫거리로 취급받았다. 관리자라면 스테이지에 대한 작은 힌트라도 주기 마련인데, 그는 울기만 할 뿐 정작 그런 건 죽어도 없었으니까.

물론, 여자들 중에는 그런 루피를 귀여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정작 루피를 잘 아는 사람들은 녀석을 피해 다니기 바빴다.

행동은 겁이 많고 소심해 보이지만, 정말 그것뿐이라면 탑이 그를 최고 관리자로 선별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사실 루피는 쾌락주의자였다. 다른 건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극적인 것만 찾아 대는 눈물을 흘리는 건 그런 무대를 만들기 위한 보조 장치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여기는 왜 온 걸까? 그것도 자신을 찾아온 것처럼 보이는데.

“#, ###님이 맞으신가요?”

“그런데?”

“여, 역시 드, 듣던 대로 많이 무, 무서우신 것 가, 같네요.”

자신에 대해서 무슨 소문이 퍼진 걸까. 연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요한 시선으로 루피를 빤히 쳐다봤다.

“그, 그렇게 보시면 제가 너무 무, 무서운데…….”

그래도 연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리자들은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좋다. 루피는 더 그랬다. 차라리 혼자서 마음을 정리하고 용건을 꺼낼 수 있게 놔두는 게 좋았다.

루피는 몸을 배배 꼬면서 한참 동안이나 말하기를 주저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 님, 혹시 라, 라플라스가 다녀 가, 갔었나요?”

“라플라스?”

연우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녀석을 왜 찾는 걸까?

루피는 의아해하는 연우의 눈빛을 읽고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아, 아무래도 여기에 오, 오지 않았었나 보, 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라, 라플라스는 현재 타, 탄핵이 되고 구금…… 주, 중이거든요. 그, 그래서 전방위로 조, 조사를 하고 있어요.”

“……?”

최고 관리자가 탄핵을 당해? 연우는 이런 경우는 처음 듣기 때문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잠시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그때 전령 역할을 했던 것이?’

16층에 처음 발을 들였을 무렵. 라플라스는 어떤 악마의 전언이라면서 우르드를 조심하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었다. 혹시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

하지만 관리자는 98층에 억류 중인 신과 악마들을 견제하기도, 때로는 전령 역할도 하면서 같이 상부상조를 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말을 전한 일로 탄핵이 되었다는 건 뭔가 말이 되질 않았다. 그 뒤에 다른 뭔가가 개입된 걸까. 아니면 전혀 틀린 사실을 짚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루피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더 없었기 때문에 이상했다.

“없었다면…… 되, 되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루피는 그 말만 하고 녹색 포탈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발을 얹다가 뭔가 떠올린 듯,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저, 그, 그리고 혹시 21층 안내 피, 필요하신가요?”

“전혀.”

“그, 그럼.”

루피는 잘되었다는 듯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포탈을 타고 황급히 사라졌다.

연우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12간지 중 하나인 라플라스가 탄핵 되었다는 건 아주 큰 사건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관리자의 일은 플레이어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이 탑이 가진 시스템이었으니까.

연우도 곧 생각을 접고, 마당으로 깊숙하게 들어섰다.

* * *

“독식자…….”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싶더니. 결국 다시 왔어.”

“20층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기 있던 사두들도 갑자기 전부 사라졌다던데.”

언제나 그렇듯, 연우가 가는 곳에는 그에게 따라붙는 눈길들이 있었다.

이미 20층에서의 사건도 꽤 많이 퍼져 나갔는지 거기에 관련된 말들도 있었다.

연우는 마장철면을 고쳐 쓰면서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털었다.

‘역시 여기도 없나.’

연우는 초감각으로 주변을 쓱 훑어보고 쓰게 웃었다. 역시 이번에도 칸과 빅토리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20층에서 나온 이후, 연우는 나이트 워치에게 두 사람의 행방에 대해서 알아보라고 따로 지시를 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소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보름을 더 탑 외 지역에서 체류했지만, 역시나 찾을 수 없었다.

‘마군을 피해 도망치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한 가지 더 걸리는 점은 그때 이후로 마군이 자신에게도 이렇다 할 어떤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자신과 외뿔부족 간의 관계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마군이 그렇게 앞뒤를 재면서 움직이는 놈들이었다면 괜히 미친놈들 소리를 듣지는 않았겠지.’

결국 미후왕의 궁전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해소된 것이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방심을 해서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촉각은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할 무렵, 연우는 어느새 건물의 내성(內城)까지 도착했다.

그런데 연우를 살피던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연우가 선 곳이 다섯 개의 관문 중에서 가장 난이도가 낮은 5번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21층은 총 5개의 관문으로 나눠져 있고, 이 중에 하나 이상의 관문만 통과하면 된다.

언제나 그가 가장 어려운 길만 골라서 움직인다는 것을 잘 알던 사람들로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기에 시끄러워졌지만.

연우는 그런 눈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5번 관문의 문을 활짝 열었다.

[5번 관문을 선택했습니다.]

[21층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165위부터 133위까지 플레이어들의 그림자들이 차례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각 그림자들을 상대로 이기거나, 5분 이상 버틸 수 있다면 다음 구획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총 20개의 그림자를 쓰러뜨리면 시련을 통과할 자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메시지의 내용만 봤을 때, 5분이라는 시간은 아주 짧아 보인다. 그리고 누구나 ‘그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상대는 탑이 생성된 이래로 최고 점수만 기록했다던 자들의 환영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플레이어들의 전체적인 평균 수준도 계속 상향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환영들과 쉽게 겨룰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장소도 협소하기 때문에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구획을 하나씩 통과하려 할 때마다 여러 차례 도전을 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크게 부상을 입고, 몸을 회복하면서 환영의 약점을 어떻게든 파악하려 애썼다.

하지만 연우는 그들과 똑같은 방법을 써서는 발전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제약을 걸 생각이었다.

‘우선 쉬지 않고 5번 관문을 전부 통과해 보자. 환영들을 전부 꺾는 방향으로.’

연우가 아무리 각 층계에 있는 모든 명예의 전당 기록들을 싹 갈아 치우는 중이라고 해도, 역대 기록자들을 연거푸 상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제한 시간인 5분 안에 쓰러뜨린다는 것은 더더욱.

화아악-

곧 연우 앞으로 빛무리가 번지면서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그리 넓지 않은 평수에 사방이 각진 벽돌로 꽉 막힌 밀실이었다.

21층의 관문은 플레이어 각 개개인에 맞춰서 전부 인스턴트 던전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때로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스테이지가 붐빌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연우가 마음 놓고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곧 165위 ‘크라덴’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대기 시간 동안 전투를 준비하세요.]

[00:10:00]

[00:09:59.99]

……

츠츠츠-

그때, 메시지와 함께 밀실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희멀건 낯빛에 요사스럽게 반짝이는 붉은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연우도 일기장을 통해 몇 번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하이 랭커, 그리드.

‘젊은 시절에는 이렇게 생긴 얼굴이었나?’

본명을 버리고 이제는 탐욕 (Greed)이라는 별칭을 이름처럼 쓰는 녀석은 동생이 있을 때에도 상당히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자였다.

어느 곳에도 이렇다 하게 소속을 두지 않고, 승냥이처럼 떠돌아다니면서 필요한 것만 쟁탈하는 녀석.

‘특기는 가짜 검술을 이용한 기습적인 투검(投劍)이었지, 아마?’

그리드는 천천히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하지만 연우는 녀석이 왼손을 허리 뒤쪽으로 몰래 가져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허리띠 뒤쪽에 아주 작은 단검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여러모로 연우가 원래 주로 쓰던 싸움 방식과 비슷했다. 연우도 허리띠에서 크라슈나의 단검을 뽑아 쥐었다.

크라슈나의 단검은 그동안 연우의 손길을 타면서 크게 변한 상태. 사실 이름만 그대로 크라슈나의 단검일 뿐이지, 이미 구체적인 내용물은 대부분 바뀐 지 오래였다.

대기 시간 동안에는 기습 공격이 불가능했다. 공격을 쏟아 봤자 환영을 그냥 통과하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미리 마법을 설치하거나, 유리한 장소를 선점하는 정도의 이점은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연우는 두 개의 검을 빼는 것 외에 이렇다 할 준비는 하지 않았지만.

『난, 어떻게 할까?』

그때, 레베카가 슬쩍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사실 정령과 언데드, 괴이 군단도 연우가 가진 여러 능력에 해당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개입이 가능했지만.

“그냥 거기 있어. 이건 나 혼자서 할 문제니까.”

연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부터 층계 공략은 오로지 자신만의 몫이었다.

레베카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팔짱을 끼며 연우를 주시했다. 연우가 숨겨 둔 힘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실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으니 확인해 둬야만 했다.

앞으로 모시게 된 자신의 주인이니. 여러모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될지 미리미리 파악해 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00:00:00_02]

[00:00:00_01]

[대기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첫 번째 구획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카운트가 끝나자마자 연우는 즉각 땅을 박찼다.

팟-

그가 지난 자리로 후끈한 열기가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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