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랭커-177화 (177/862)

2화. 그림자 도장 (2)

연우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게 그리드도 함께 앞으로 튕겨 나오듯이 움직였다.

쾅!

분명 칼과 칼이 부딪쳤는데도 불구하고 쇳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잘한 폭발 소리가 귓가를 왱왱 울렸다.

‘역시. 모든 게 제대로 구현화되어 있어. 단순한 잔상으로만 봐서는 안 되겠는데.’

연우는 크라슈나의 단검을 따라 울리는 충격파를 느끼고 눈을 반 짝였다.

‘검이나 장비들도 꽤 좋아 보이고.’

탐욕이라는 별칭이 붙은 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보물에 대한 집착.

더 좋은 물건을 갖기 위해 동료의 뒤통수도 치는 악랄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드가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뭔가 옵션을 작동시킬 때마다 표면에 갖가지 마법진이 올라왔다.

대략적으로 용마안에 짚이는 것만 따져도 열댓 가지. 충격 흡수, 충격 일부 반사, 내구도 수복, 투기 증가 등등.

딱 봐도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을지 눈에 보였다.

하지만 연우도 자신이 가진 장비가 뒤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이 랭커 급은 되어야 겨우 장만할 수 있다는 명작 급의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가. 마장은 연우의 움직임을 한없이 원활하게 만들어 줬다.

자신의 손으로 재탄생한 크라슈나의 단검도 마찬가지. 스스로도 내심 흡족할 정도였다.

[+3 크라슈나의 단검]

분류: 한 손 무기

등급: A

설명: 원래는 어느 수행자가 즐겨 사용하던 단검이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전전하다가, 어느 이름 모를 플레이어의 손에 들어가 크게 변화하였다.

정념이 깃든 칼은 기본 뼈대만 남고, 나머지는 여러 번의 개조 끝에 기존의 모습을 거의 잊어버리게 되었다.

특히 칼등 부분은 아만다티움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뛰어난 내구도를 자랑하고, 날에는 갖가지 신비 광석과 마법 보석으로 특수 가공되어 예리함을 자랑한다.

* 수행자의 정념

무기에 깃든 정념은 자체적인 영성으로 변화되며 사용자와의 숙련도에 호응해 큰 변화를 일으 킨다. 무기에 대한 애착도와 숙련도가 오를수록 공격 속도와 공격력이 대폭 증가한다.

* 흑의 칼날

‘칠흑왕의 절망’과 연계되도록 특수 제작되어, 어둠 계통의 속성에 가장 알맞게 되었다. 흑기를 수용할 경우 공격력을 15-20%가량 높여준다.

**현재 사용자와의 상성이 가장 잘 어울리게 제작되었습니다. 더 많은 정념을 불어 넣어 기능을 강화시키세요.

**총 3번의 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강화가 계속 이어질수록 더 단단한 내구도와 뛰어난 효과를 지니게 됩니다.

새롭게 개조된 크라슈나의 단검은 여러모로 연우가 새롭게 시도해 본 기술이 아주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투입된 기술은 두 가지였다.

보석 가공과 자체 강화.

보석은 순도가 맑은 결정체일수록 마법의 효력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 연금술의 기초 재료 중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에, 마탑 내에도 보석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마법 학파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헤노바는 뛰어난 대장장이답게 보석을 다루는 법에 대한 기술도 알고 있었다.

연우는 헤노바를 돕는 내내 바로 이 기술을 오롯이 전수받는 데 집중했다. 낮에는 헤노바의 일을 돕고, 밤에는 기술을 전수받아 그것을 단련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연우는 여기에도 시차 괴리를 사용했다.

기술적 이론을 똑바로 숙지하고, 20층에서 빅토리아로부터 배웠던 마법적 지식을 같이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처음에는 방향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용의 지식을 적절하게 사용하다 보니 어느새 틀을 잡아 보석 가공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체계를 잡을 수 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빅토리아에게 배웠던 대로 검면에다 필요한 룬 문자를 빼곡하게 새겨 넣고, 그 위에다 마법 효과를 부여한 보석 가루를 곱게 뿌려 단단히 고정시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쓰인 보석은 하나같이 순도가 90%가 넘는 최상급이었다. 어차피 연우에게 남는 건 돈이었고,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도 헤노바의 인맥을 통하면 얼마든지 대량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연우는 보석 가공을 완벽하게 터득하기 위해 그야말로 돈지랄을 해 댔고, 헤노바의 갖은 잔소리를 들은 끝에 기술을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단검에 새겨진 룬 문자의 내용은 총 두 가지였다.

-어두운 것을 더 어둡게.

-뜨거운 것을 더 뜨겁게.

아예 연우가 가진 마력의 속성에 맞춰 새겨진 것이다.

그리고 자체 강화도 마찬가지.

인챈트 계통인 보석 가공을 다룰 줄 알게 되었으니, 아티팩트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자체 강화를 익히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연우는 갖가지 연구 끝에, 머릿속에 잡은 설계 도안대로 쇠를 밤새 두들겨 크라슈나의 단검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단검의 쇠심은 단단한 아만다티움으로, 겉면은 미스릴과 곤오철을 적절한 비율로 혼합시킨 합금을 사용하긴 했지만.

그건 헤노바가 자신이 오랜 대장장이 생활 끝에 만든 노하우를 토대로 만든 것들이라, 큰 어려움을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부분을 자잘하게 다룬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헤노바의 노하우를 모두 훔치겠다는 일념 하나로 깊게 몰두했다.

용마안으로 헤노바를 쉴 새 없이 관찰하고, 초감각으로 관찰한 것들을 고스란히 녹여 보고자 했으며, 용의 지식으로 그 행동들의 의미를 파악해 보려 애썼다.

그래서.

연우는 비록 처음으로 만든 아티팩트에 불과했지만. 아직 미숙한 초보 대장장이의 서툰 결과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어도,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가진 검이 대단하다고 한들, 여기에 비교할 만한 건 안 될 것이라고.

콰앙!

그리고 그런 연우의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듯이, 세차게 휘두른 크라슈나의 단검을 버티지 못하고 그리드가 뒤로 멀찍이 떨어졌다.

아무 감정도, 의사 표현도 할 수 없는 환영에 불과하지만.

연우는 녀석이 적잖게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한 번 잡은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면을 다시 한 번 더 거세게 박찼다.

녀석이 오지 말라는 듯 뒤쪽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비수 다섯 개를 재빨리 던졌지만.

따다당!

연우는 가볍게 비수들을 옆으로 치워 내고 금세 녀석 앞에 다다랐다. 까가강, 눈 깜짝할 사이에 단검과 검이 수차례 부딪쳤다.

그러다 연우가 허리 쪽으로 찔러 오던 녀석의 검을 옆으로 크게 밀면서 균형이 흐트러졌고, 연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라슈나의 단검에 오러를 잔뜩 실었다.

그리고 그 위를 성화로 뜨겁게 불태우면서 측면으로 세게 돌렸다.

콰콰콰-

불길이 지면을 뜨겁게 태우면서 금세 밀실을 가득 메웠다. 그 속에 갇힌 그리드는 너무 위태롭게만 보였다.

* * *

“대체 왜 5번 관문으로 간 걸 까? 저 사람……?”

오늘 하루 동안, 21층의 시련에 도전하는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연우에 대한 것이었다.

20층에서 사두들과 어울리던 독식자가 다시 층계 공략을 시작했다.

그런데 모두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그가 도전한 곳은 1번이 아닌 5번 관문.

당연히 모두가 의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각 층계 명예의 전당에 1위로 기록된 ‘비공개’가 그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번에도 1위를 기록하기 위해 가장 높은 관문인 1번으로 갈 줄 알았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5번으로 향하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트리니티 님의 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우는 자신들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겠지만, 사실 그들은 그와 몇 번 다른 층계에서 작게나마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따지자면 그들에게만 일방적인 악연이었지만.

연우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히든 피스들을 쓸어 갈 당시, 그림자 뱀의 땅굴에서 손가락만 빨아야 했기도 했고.

부족해진 공적치를 쌓기 위해 투신했던 레드 드래곤의 외인 부대에서 그를 잠시 조장으로 모시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안 좋은 기억밖에는 없어서, 이제는 더 이상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빌어먹을 악연은 아직도 사라지질 않은 건지, 그들이 한창 고생하고 있는 21층에서 또 마주치고 말았다.

하지만 악연이라고 해도-비록 그들만 일방적으로 가지게 된 악감정이라지만-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 이해 못 할 행동을 하니,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독식자, 대체 무슨 생각일까?”

“혹시 정말 소문대로 20층에서 손가락만 빨았나?”

연우가 잠시 층계 공략을 멈춘 것 때문에, 한때 그런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여태 승승장구만 하던 그가 처음으로 난관에 부딪쳤고, 그 때문에 깊은 슬럼프에 빠져서 가지고 있던 실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좀 더 편한 공략을 위해서 5번 관문을 통과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저 악독한 인간을 그렇게 겪고도 그딴 헛소문을 믿니, 너희들은?”

그때, 가만히 델란과 쥰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하이디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보면서 혀를 찼다.

델란과 쥰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엘프인 하이디는 종족 스킬인 ‘요정안’을 갖고 있어서 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여러 차례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그들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보이는 거냐?”

“뭐가 꼭 보여야만 생각이 정리되니?”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 줘.”

“독식자가 뭘 노리는지가 안 보이냐는 거지. 이 멍청이들아.”

“음?”

“……?”

델란과 쥰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하이디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면서 빽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관문을 통과하려고 그러는 거지!”

그제야 둘의 눈빛도 달라졌다.

원래부터 둔해 빠진 델란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에는 머리가 영민한 편이던 쥰은 또 왜 이렇게 된 건지. 21층에 너무 오랫동안 묶여 있어서 그런지, 최근 들어 녀석도 머리가 많이 딱딱해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예측할 수 있으면서도, 거기까지 생각을 일부러 하지 않았던 건지도 몰랐다.

아무리 잔상이라 해도, 한창 젊었던 시절에 남은 데이터에 불과하다 해도, 그래도 저 안에 있는 것들은 하나같이 ‘괴물’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현재 탑을 좌지우지한다는 자들은 이미 저층 구간을 통과하던 젊은 시절에도 랭커에 못지않던 활약을 보였었다.

특히 아홉 왕이라 불리는 절대 자들은 ‘진짜’라고 불릴 만했다. 하이 랭커들조차 그들과 직접적으로 부딪치기를 꺼려 했다고 했으니까.

실제로 무왕이 본격적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하이 랭커 빙왕과의 싸움에서 무승부를 이루면서부터였다.

그러니 연우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런 괴물들을 ‘연속적’으로 부딪칠 거란 생각은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이디는 자신의 말이 맞을 거라는 듯, 팔짱을 끼면서 살짝 도도하게 턱을 높이 들었다.

결국 델란과 쥰의 시선도 5번 관문으로 향했다. 하이디의 예측이 틀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두고 봐. 아마 하루만 있으면 딱 알게 될 테니까.”

하이디의 그런 호언장담도 들어 맞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쿵!

쿵!

“무, 뭐야, 이거?”

갑자기 지반이 요란하게 들썩였다. 주요 시련의 무대가 인스턴트 던전 내이기 때문에 비교적 소란스럽지 않은 스테이지가 21층인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플레이어들은 진원지를 찾기 위해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감각을 이리저리 뿌려 봤지만, 이렇다 할 진원지는 나오지 않았다.

잡히는 것이라고는 5번 관문뿐.

하지만 상식적으로 인스턴트 던전이 흔들릴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착각했거니 하고 여기면서 다시 다른 쪽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하이디에게서 이미 언질을 들었던 델란과 쥰의 표정에는 ‘설마?’ 하는 당혹감이 어렸다.

그리고.

쾅!

콰앙!

처음에는 잠시 들썩이기만 하던 지진이, 이제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른 진원지를 찾아 헤매던 플레이어들도. 굉음을 무시하고 저마다 대련에 빠져 있던 플레이어들도. 자신이 싸우고 있던 잔상들의 약점을 연구하던 플레이어들도.

모두 경악에 찬 얼굴이 되어 5번 관문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길쭉하게 이어지는 관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여태껏 내부에서 아무리 강한 충돌이 벌어져도, 외부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그런 상식들이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듯 뒤바뀌고 말았다.

마치 거인이 먼 곳에서부터 아주 빠르게 이곳으로 달려오는 느낌이었다.

폭발 소리는 계속 커졌고, 주기도 점차 빨라졌다. 나중에는 마치 바로 근처에서 천둥이 터진 것처럼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막기까지 해야 할 정도였다.

델란과 쥰은 이제 아예 입을 꾹 다물었다.

하이디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력이 잔뜩 투입되면서 요정안이 어느 때보다 크게 발현되고 있는 중이었다.

5번 관문을 따라 퍼져 나오는 마력의 파장들이 눈에 자꾸만 밟혔다.

‘6분 31초, 6분 32초…….’

또한, 하이디는 속으로 초시계를 외고 있는 중이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마력 파장을 가진 새로운 괴물이, 대체 얼마나 빨리 관문을 통과할까 싶어서.

그리고.

콰아앙!

포탄 수십 대가 동시에 터진 것처럼, 5번 관문의 마지막 출구가 그대로 박살 나면서 검은 연기가 밖으로 매섭게 쏟아졌다.

코가 마비될 것 같은 탄내도 함께.

뚜벅뚜벅, 연우는 그사이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게 걸어 나왔다.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입을 쩍 벌리면서 그런 연우를 쳐다봐야만 했다.

단 한 차례도 쉬지 않고, 5번 관문을 그대로 주파한 셈이었으니까.

거기에 소요된 시간은.

‘……9분 51초.’

단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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